다나베 아츠미(아츠미) 사진은 그것이 발명되었던 19세기 초부터 인간의 ‘부족한 기억력’을 보조하는 강력한 기록매체로 굳건한 자리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글이나 회화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져왔던 기록자의 지위를 단번에 무력화시킬 만큼 전례 없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사진이 누려왔던 투명성과 객관성의 신화가 의심받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사진은 가장 유효한 기록과 기억의 방법론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매체를 주요 작업수단으로 다루고 있는 작가가 ‘기억’에 방점을 두지 않고, ‘망각’에 주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왜 망각입니까?
저주 받은 축복, 축복 받은 저주
노순택 사진의 역사를 공부하고, 또 제가 나고 자라온 사회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향한, 특히 사회적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어떤 꿈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진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희망이자 강박이기도 했고, 고백하자면 어설픈 환상이자 낭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루이스 하인이나 제이콥 리스와 같은, 사진을 사회개혁의 강력한 도구로 인식했던 분들의 작업을 눈여겨보고,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세계에 전파함으로써 반전운동의 기폭제를 제공했던 돈 맥컬린이나 필립 존스 그리피스 등의 사진에 흥분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의 기록이 아니었다면 저는 20세기 초 아메리칸 드림의 그늘이 어떤 풍경이었는지, 가혹했던 아동노동의 현장이 어떠했는지, 제국주의가 어떻게 그들의 식민지를 황폐화했는지, 전쟁이 어떠한 장면으로 소비되며 또 사람을 파괴하는지 생각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한 작업들은, 기록은 정말로 강력한 것이며, 기록되는 것이 결국 기억될 것이라는 신념을 심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사진을 공부할수록, 사진의 작동방식에 대해 생각할수록 확고했던 생각들이 자꾸 바스러졌습니다. 기록이란 여전히 강력한 것이지만 기록되었다고 그것이 기억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 때로는 기록이 어떤 중요한 기억을 왜곡하거나 망각하게 할 수도 있다는 회의마저 들었습니다.
기록을 통한 ‘고발과 계몽’이라는 사회적 다큐멘터리 작업의 어떤 속성이 지루해졌다, 고 말하면 마음이 홀가분할 텐데, 사실은 겁이 났던 거지요. 사진도 의심스럽고, 저 자신도 의심스럽고.
‘사진이라는 기록’ 또는 ‘사진을 통한 기억’에 집착했던 마음이 망각 그 자체 또는 ‘사진을 통한/사진이 저지르는/사진이 보여주는 망각’이라는 모순적인 생각으로 흘러갔습니다. 하물며 광주는, ‘종결되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사실 그것이 현재진행형임을 반증하는, 기억과 망각의 교차 시공간이거든요. 저는 오늘날 광주의 기억을 말한다는 것은 광주의 망각을 고백하는 일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츠미 기억과 망각은 서로 경쟁합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상대방을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관계인데요. 하지만 현실에서 기억과 망각은 다정히 손을 잡는 공생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물며 그 둘을 선과 악의 관계라 규정지을 수는 없을 텐데요.
저주받은 축복, 축복 받은 저주
노순택 어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의무는 인간에게 부여된 가장 오래된 사명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나누는 기준이 ‘기록의 여부’이기도 하니까요. 기록과 기억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반드시 서로를 요청하는 것도 아니고 완벽하게 호응하지도 않습니다. 둘은 비슷해 보일 뿐, 다르죠.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기록은 가치중립의 탈을 쓸 수 있되, 기억은 가치중립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는 점일 겁니다. 심지어 기억이란 어떤 은유가 아닐까 싶어요. 명료함을 추구하지만 사실은 모호한 것이고, 게다가 주술적이기도 합니다. 망각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기억은 망각을 저주하고 망각 역시 기억을 지우려 듭니다만 사실은 끊임없이 서로를 요청하고 결투와 화해를 반복합니다. 여기서 기록은 늘 기억의 편을 드는 것만도 아니고, 때로는 망각의 편에 섬으로써 배반의 심판자가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월 광주의 오늘’에 관한 이 작업으로 항쟁을 기억하자거나 망각을 반성하자는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기억은 선이요 망각은 악이라거나, 그 반대를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들은 자웅동체이자, 야누스의 두 얼굴이니까요. 다만 오늘의 한국사회라는 시공간에서 오월 광주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 기억과 망각이 어떤 풍경으로 펼쳐지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기억이란 저주받은 축복이 아닐까요. 혹은 축복받은 저주일 수도 있고요. ‘검은 황금’이라 불리는 석유가 이슬람 세계에 축복과 재앙을 함께 가져다준 것처럼, 기억과 망각 또한 인간에게 선과 악을, 혹은 긍정과 부정의 측면을 함께 경험토록 하는 것 같습니다.
아츠미 그렇다면 왜 광주입니까? 왜 5.18입니까? 광주항쟁은 ‘국가적 승인’을 받은 공식적 역사일 뿐만 아니라 이미 30년이 넘게 흐른 과거지사인데요. 혹시 개인적인 기억이나 경험에 기반하고 있는 작업인지요.
노순택 광주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자행될 당시 저는 초등학생이었습니다. 게다가 서울에 살고 있었지요. 구체적인 경험이 있을 리 없습니다. 다만 기억나는 건 밖에서 놀고 있는데 소식 빠른 한 친구가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듯 “전라도에 간첩이 내려와서 칼로 여자들 젖가슴을 베어내고 아주 난리가 났다더라”고 전해준 얘기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건 알면서도 부하의 총에 저격당한 건 모르는 철부지였으니 12.12쿠데타나 ‘서울의 봄’과 같은 사회적 상황도 전혀 알 리 없었지요. 그런데도 친구가 들려준 이른바 ‘유언비어’는 너무나 강렬한 상상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기에 지금까지도 기억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광주에 가본 건 어른이 된 뒤였습니다. 이미 전두환은 권좌에서 내려왔고, 학살의 또 다른 주범이었던 노태우가 통치하던 때입니다. 전두환 정권의 비리에 대한 혐오가 사회 전반에 짙게 깔렸는데다 청문회를 통해 그날의 진상이 어느 정도 드러난 시점이었는데도 관련 비디오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이 여전히 금기시되던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5월이면 축제를 하는데, 그때가 늘 5.18 항쟁계승기간이었어요. 서울, 지방 할 것 없이 전국의 대학가에 전세버스가 준비되고 ‘망월동 순례길’에 오르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입니다. 저도 거의 매해 망월동에 다녀왔지요. 제 기억 속의 망월동은 북적대는 순례객들로 길게 줄이 선, 울분과 다짐과 간간이 구호가 터져 나오는 그런 풍경이었습니다.
당시 광주에 대한 선배들의 집착은 놀라울 정도였지요. 그도 그럴 것이 광주에서 학살이 자행된 지 불과 10년이 흐른 시점이었습니다. 살아남은 자에게 드리운 트라우마가 너무도 짙었을 겁니다.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해선 안 된다는 의무감이 노태우 정권이 끝났던 90년대 초반까지 대학가에 팽배했고, “군사독재 종식”과 “학살자 처벌”이 우리가 외쳤던 주요한 구호이기도 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체포결사대’ 같은 조직이 꾸려지기도 했지요. 광주를 향한 의무감은 야합을 통해 정권을 연장했던 김영삼 정부를 넘어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야 비로소 줄어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느새 30년여 년이 흘렀다지만, 광주항쟁이 ‘공식적 역사’가 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닙니다. ‘국가의 승인’과 ‘국가적 계승’이 드러내고 있는 다양한 현상들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이라는 처절했던 요구가 형식적으로나마 마무리된 이 시점에 광주에 대한 생각들이 더 복잡해졌다는 건 아이러니입니다만,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요. 미래는 언제나 과거보다 어두운 법이니까요. 과거라는 시공간에 등을 밝히는 것보다는 미래라는 시공간에 등을 밝히는 것이 더 어려운 작업이지요.
어쩌면 김대중 정부 이후 광주항쟁에 관한 기억작업들은 우리도 모르게 망각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품고 있는 광주에 관한 직접적인 기억들은 초라한 것들뿐입니다.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었어도 광주의 항쟁, 아니 광주의 죽음은 막 어른이 된 제게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 되어주었고, 광주의 죽음이 광주의 죽음만은 아니라는 평범한 사실도 알게 해주었습니다. 아울러 망월동은 시대를 가장 치열하게 살다가 산화했던 강경대 박승희 등 제 또래의 친구들이 죽어 묻힌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을 열사라 부르건 뭐라 부르건, 오월 광주가 저희 세대에게도 지울 수 없는 멍울이자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의 출발점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분단의 현재성에 관한 작업을 진행해 오면서 오월 광주를 분단 역사의 분수령이라 생각해 왔고, 언제가 됐건 그에 관한 작업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있었지요.
아츠미 말씀하신 것처럼 그동안 당신이 진행해 온 작업들은 ‘분단의 현재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지나간 한국전쟁이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살아 숨 쉬는지를 탐색하고 있다”고 자신을 설명하고 있는데요. <망각기계>를 통해 어떻게 분단을 들여다보려는 것인지요.
노순택 그날의 저항과 학살을 ‘1980년 광주’라는 특정한 시공간만으로 제한하는 건 어리석은 일일 겁니다. 오월의 학살은 권력찬탈을 꿈꾸었던 일단의 정치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면서 발생한 참변이었지만, 오월 이전과 오월, 그리고 오월 이후에 벌어진 숱한 일들의 안과 겉에는 분단 모순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단 상황이 아니었어도 쿠데타는 발생할 수 있었겠지만 분단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오월 광주의 사회적 풍경은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물론 5월항쟁을 분단 모순에 전면적으로 저항했던 조직화된 투쟁이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투쟁의 주체는 참 평범한 사람들, 묵묵히 자신의 삶을 일구어가던 노동자와 학생들이었지요. 그들은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이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소박한 의분, 사람이 죽어가는 걸 구경만 할 수 없다는 평범한 분노가 그들을 일어서게 했던 것이지요. 그들 누구도 자신이 폭도라거나 국가변란세력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물며 빨갱이라니요. 그랬던 이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고문하고 가뒀던 명분이 바로 분단 논리였습니다. 사실 논리랄 것도 없지요. 그저 북괴의 사주를 받았다는 붉은 물감 한 바가지로 모두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 분단의 작동방식이었으니까요. 5월항쟁은 해방 전후사의 갈등과 전쟁, 분단의 고착화 과정에서 극단적 독재를 구축해 가던 남북한 모두에게 하나의 분수령과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남북한의 분단 권력은 각자의 위기감을 포악함으로 표출했고, 그들의 포악함이야말로 각자의 체제결속과 공포정치를 정당화시키는 이유가 되어 주었습니다. 남한에서는 분단체제 내 미국의 역할과 그 이중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 계기이기도 했지요.
2012년 오늘의 5.18
아츠미 분단체제 안에서 미국의 역할과 이중성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광주에서 벌어진 참변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얘기인가요?
노순택 알다시피 한반도는 종전 상태가 아닌 정전 상태로 반세기를 흘려보냈습니다. 끝난 게 아닌, 잠시 멈춘 전쟁 상태지요. 1953년에 맺어진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연합군과 북한, 중국 3자였습니다. 연합군은 사실상 미군을 의미했으니, 미국 북한 중국 3국이 협정을 맺은 것입니다. 전쟁 당사자인 남한은 그저 미국을 따르는 처지였습니다. 한반도에서 미국의 힘과 영향력은 양과 질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변해왔지만 그 본질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특히 군사적 의존도는 예나 지금이나 심각한 상태죠.
단적인 예가 전시작전통제권입니다. 미군의 승인이나 묵인 없이 한국군은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 공수특전단이 헬리콥터와 탱크를 앞세워 자행했던 ‘화려한 휴가’ 작전 또한 미군의 승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미 미국은 신군부의 동향과 공수특전부대에서 실시되고 있던 강도 높은 ‘충정훈련’에 관한 정보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학살작전이 자행되고 있는 와중에 미군은 E-38조기경보기와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에 급파합니다. 항공모함이 한반도 해역에 배치됐다는 소식에 광주시민들은 환호했다고 합니다. 미군이 이 참극을 막아줄 거라 기대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헛된 바람이었습니다. 그것은 한반도 급변사태에 대응하려는 것이었지, 신군부의 학살을 저지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군부에게 방패막이가 되어줬을 뿐이지요.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군사작전에 관한 신군부의 요청을 승인했다는 사실은 <워싱턴포스트> 등의 언론보도와 함께 미국정부의 공식문서로도 확인된 바 있습니다. 주한 미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은 유혈 사태를 막아달라는 중재요청마저 거절했지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해방군이라는 환상’과 ‘점령군이라는 현실’로 다가왔듯, 광주항쟁 당시 미군은 개입의 환상과 승인의 현실로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미국으로선 광주시민을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해왔던 대로 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오월의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은 그들의 배신을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지요.
아츠미 그렇다면 <망각기계> 작업은 누군가의 책임을 밝히거나 묻고자 하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는 건가요? 그것은 이미 규명된 과거사를 되풀이해 말하는, 반복의 효과를 가져 올 뿐일 텐데요.
노순택 글쎄요. 네, 그리고 아니요.
이 작업이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책임을, 특히 학살자의 책임을 상기시킬 수밖에 없기는 할 겁니다. 아울러 그 학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으로 누군가의 책임이, 바로 우리들의 책임이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책임을 묻고 따지는 것이 이 작업의 목적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진상과 책임 규명에 모든 걸 걸어야만 했던 바로 ‘그 시간, 이후의 광주’를 생각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제 누구도 광주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절규하지 않습니다.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은 광주에서 죽었던 이들과 광주에서 살아남은 이들, 광주를 생각하며 눈물 흘렸던 모든 이들이 간절하게 꿈꾸었던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무언가 잊히고 있다는 생각, 여전히 왜곡되고 있다는 생각, 알맹이는 간데없고 껍데기만 남았다는 생각, 이런 복잡한 생각들이 오늘의 5.18을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머릿속 한 편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광주의 그날은 이미 3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이미 역사적으로도 승인됐다지만, 오월의 그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맴돌았습니다.
아츠미 오월의 그날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건 과장된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특별법이 만들어진 지도 십여 년이 넘었고, 그날을 기리는 공식 행사와 유적물, 묘역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되고 있는 걸로 압니다. 사회적 갈등이 폭력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그것이 국가의 이름으로 진압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날의 광주와 비교하는 건 지나친 게 아닐까요.
노순택 물론입니다. 오월의 참극이 오늘날 벌어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큰일이지요. 현재진행형일지 모른다고 말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오월 광주의 피에 빚지고 있는 한국사회가 빛고을의 혼백 앞에 떳떳할 만큼의 민주적 성취를 이루었는가 하는 자문입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사회라지만, 절차적 민주주의만큼은 놀라울 만큼의 진전을 이룬 사회라지만 국가의 폭력성이 얼마만큼이나 민주적으로 통제되고 있는지에 대해 저는 회의적입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진행됐던 광범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폭력성과 노무현 정부 때의 대추리 무력진압, 생존권을 주장하는 농민의 진압타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내몰렸던 노동자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 정부들이 과연 광주의 피울음을 삼키며 탄생했던 권력이 맞는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사건’의 수괴로 지목돼 사형까지 선고받았던 이고, 노무현 대통령 역시 전두환 정권 시절 옥고를 치른 뒤 정계에 입문해 ‘광주청문회’의 맹활약을 기반으로 결국 대통령이 되었던 분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과 광주의 피울음은 뗄 수 없는 관계지요. 하지만 그 두 정부 아래서도 국가의 폭력성은 야수처럼 드러났습니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또한 얼마나 괜찮은 시절이었던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지만 이명박 정부의 노골적 폭력성이 앞선 두 정부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거두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명박 정권의 탄생과 그 정권이 저지른 저돌적이고 뻔뻔한 폭력은 앞선 두 정부가 성취했다고 믿었던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의 것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오월 광주에 대한 왜곡과 훼손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이 비록 감옥에 다녀오고 백담사에서 은신의 시간도 보냈다지만 발포명령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비자금은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2003년 법원의 재산명시 결정에 전 씨는 “29만 원 예금이 전 재산”이라고 대답했죠. 하지만 그의 일가가 소유한 자산은 1천억 원대에 달한다고 합니다. 출판계의 강자로 급부상하고 대형 서점과 IT기업 인수 등의 행보로 주목받고 있는 그의 장남 전재국은 자신을 아버지와 연결 짓지 말라고, 자신은 자수성가한 CEO일 뿐이라고 말했다지만 그 말을 누가 수긍하겠습니까? 영문도 모르는 아비의 죽음을 쉬쉬 감추면서 빨갱이 가족으로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해야만 했던 광주의 자녀들을 잠시라도 생각한다면 전두환의 피붙이가 ‘성공신화’와 ‘자수성가’를 떳떳이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랬던 전두환을 기념하기 위해 합천에서는 그의 호를 딴 ‘일해공원’이 세워지고, 그를 배출한 대구공고에서는 ‘각하 팔순잔치’와 ‘각하배 골프대회’가 열리는 사회가 오늘의 한국사회입니다. “반란수괴, 반란모의 참여, 반란 중요임무 종사, 상관살해,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목적살인, 뇌물”의 범죄를 저질러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은 자에게 관대함과 용서를 넘어 노골적인 경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는 전직 대통령 가운데 가장 호화로운 저택에서, 가장 호화로운 국가경호를 받으며 화려한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경호하는 인원만 156명입니다. 수십억 원의 세금이 그들의 안전을 위해 낭비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12.12 쿠데타에 맞섰다가 강제 예편당한 고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의 가족사는 비극적입니다. 강제예편으로 말미암은 화병으로 장 사령관의 아버지는 스스로 곡기를 끊어 숨졌고, 아들은 2년 뒤 행방불명돼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장 사령관은 2010년 폐암으로 사망했고, 그의 부인은 2012년 1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참군인의 가족사는 이처럼 비극적인데 반란수괴의 가족사는 이토록 화려하다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오월 광주를 훼손하려는 움직임은 추잡할 지경입니다. ‘5.18 파안대소’ 해프닝의 장본인이라는 걸 거듭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이 대통령은 광주와 엇박자 행보를 걸었습니다. 취임 첫 해를 빼고 대통령은 5.18기념식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2010년 국가보훈처는 공식 기념행사에서 오월 광주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금지시켰습니다. 대신 연주한 곡이 ‘방아타령’입니다. 쿵짝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는 추모의 자리에 ‘축하 화환’을 보냈더군요. 유치하고 졸렬해서 이를 조직적 훼손행위라고 의심하는 것마저 우습지만 어쩌면 그렇게 호흡이 잘 맞는지 놀라울 따름이죠.
뿐인가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빈번해진 대북삐라 살포현장에는 ‘광주폭동의 진상을 밝힌다’, ‘5.18의 화려한 사기극을 고발한다’는 따위의 자극적인 유인물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한미우호증진협의회라는 단체는 유네스코가 광주항쟁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걸 막기 위해 프랑스 파리의 본부에 청원서를 보내기도 했는데,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600여 명의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됐고, 그 간첩들이 무기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고 합니다. 이는 ‘전두환을 사랑하는 모임’의 온라인 카페에도 상세하게 게시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정권 차원의 훼손 행위와 민간 차원의 과격 행동을 동시에 관찰하다 보면 5.18은 어쩌면 피해자의 시선이 아니라 가해자의 시선에서 여전히 진행형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통받은 자는 잊으려 몸서리치는데, 가해자 집단은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실체를 밝힌다’며 떠들다니 적반하장인 셈이죠.
사진을 다시 사진으로 복제하는 일
아츠미 작업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거주하고 있는 경기도와 작업지역이었던 광주는 가깝지 않은 거리인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언젠가 광주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다는 막연한 의무감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을 구체적인 실행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간과 비용이 발걸음을 붙들지는 않았는지요?
노순택 그렇습니다. 시간과 비용 모두 간단치 않았습니다. 광주작업을 시작한 해는 2005년이었습니다. 당시 저와 가족은 평택 대추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미군기지 확장문제로 온 마을이 강제이주의 위기에 처해 있었죠. 2004년부터 대추리를 오가다가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잠시 이주해 작업을 진행하던 차였습니다.
어느 날, 인터넷 게시판에서 5.18기념재단의 공고문을 봤습니다. ‘5.18기념공간’에 관한 사진작업자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는데, 조건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대형포맷으로 작업해야 하고, 중간에 평가를 받아야 하며, 작업 종료 후 작품 10여 점을 기증하는 조건으로 약 380만 원을 지원해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년간 수시로 광주를 오가며 대형포맷으로 작업을 하려면 교통비와 재료비로도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마음이 끌렸습니다.
대추리 상황이 무척 좋지 않았는데 그래도 일단 지원해보자 싶어 신청서를 넣었지요. 인터뷰를 하러 오라더군요. 대추리에 행정대집행이 들어오고 군과 경찰이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던 시점이라 인터뷰를 포기했습니다. 헌데 어찌 된 일인지 연락이 왔습니다. 함께 진행하자면서요. 광주에서 작업하는 사진가 황지영 씨와 2명이 선정되어 일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재단에는 먼저 ‘꼭 대형포맷이어야 하는가’를 문의했지요. 저는 35mm와 중형포맷을 위주로 작업해 왔던 터라 대형포맷의 둔함이 부담스러웠거든요. 제가 선호하는 프레임워크는 대형포맷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절충한 것이 6x17파노라마였습니다. 필름면적은 4x5inch보다 6x17cm가 오히려 넓거든요. 그런데도 기동성은 뛰어난 편이죠. 두고두고 쓸 포맷이 아니라 아는 분을 통해 카메라를 빌려 썼습니다.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5.18기념공간을 긍정적으로, 또 미래지향적으로 기록해 달라는 재단의 요구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일단 숙제는 숙제대로 하면서 제 작업을 하리라 마음먹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자꾸 키치가 되는 느낌이랄까요. 한 달에 한두 번 광주를 오갔는데, 후반부에 이르러 작업방향을 틀었습니다. 재단의 의뢰로 시작된 일이지만 결국 제가 책임져야 하는 작업이고, 제 시선을 끄는 것들, 저를 고민케 하는 것들을 담아내지 않는다면 이도저도 아닌 게 돼 버릴 것 같더군요. 재단에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5.18 재단의 일을 종료하고 나니 제겐 광주 작업을 더 해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언제 일단락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오월 광주를 좀 더 오래 바라보고 좀 더 오래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조급함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매 해 시간이 허락될 때 막연히 광주에 들르곤 했습니다. 30주년이던 2010년, 이 작업을 정리해 볼까도 생각했습니다만 왠지 그런 시점에 맞추기가 싫더군요. 전시는 둘째치고, 제대로 된 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2011년 경기문화재단에 이 작업의 마무리와 출판을 위한 기금을 신청했는데, 다행히 지원을 받게 됐습니다.
아츠미 당신은 이 작업을 모두 5개의 장으로 분류했습니다. 그 중 1장 <죽은>은 옛 망월동 묘역의 ‘훼손되는 얼굴 사진의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살아 숨 쉬었지만 계엄군의 총칼에 고통스럽게 죽어간 분들입니다. 망월동은 그런 한이 서린 공간인데요. 산 자의 어떤 의무가 ‘죽은 자를 두려워함’이라고 할 때 그런 공간에 오랜 시간 머문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을 듯합니다. 죽음이 머무르는 고요의 공간에 산 자의 침입은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러한 판단조차도 죽은 자를 두려워하는 산 자의 넘겨짚음이자 변명일 수 있겠지만요.
노순택 말씀드렸듯이 처음엔 큰 포맷으로 작업하다 보니 카메라를 삼각대에 장착해야만 했고, 깊은 심도를 얻기 위해 조리개를 조여 촬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노출 시간이 길어지고, 해가 저물도록 작업하는 날도 많았죠. 해가 기울면 사진 한 장을 촬영하는데 한 시간 이상의 노출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셔터를 열어놓고 어둑어둑한 무덤가에 홀로 앉아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데 이상하게도 무섭질 않았습니다. 제가 겁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담한 성격도 아니거든요.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무덤의 주인들이 나를 해코지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왠지 그 혼백들은 피에 굶주려 산 사람을 괴롭히는 공포영화 속 악령과는 다를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랄까요. 만약 그들이 한 맺힌 악령이 되었더라면 가장 먼저 학살의 주범들이 무사하지 못했겠지요.
무덤가에 앉아 광주 사는 친구가 들려준 얘기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제 대학시절엔 고민에 짓눌린 친구들이 훌쩍 다녀오는 곳이 동해바다 같은 곳이었어요. 넘실대는 파도를 보노라면 오만 생각들이 몰려왔다가 쓸려가기를 반복하잖아요. 그렇게 고민을 가다듬고 돌아오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광주에서는 고민에 짓눌린 친구들이 찾았던 곳이 바로 망월동이었다고 합니다. 아침에 가 보면 술 취한 채 무덤가에 널브러진 사람들, 토악질해놓은 것들, 술병들, 필터까지 빨아 피운 담배꽁초 더미들을 발견하는 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가볍게 들으면 우스운 옛이야기입니다만, 광주의 청년 세대들이 겪었던 분노와 좌절의 단편임이 틀림없지요. 너희가 저마다의 고민을 풀려고 바다를 찾을 때 우리는 망월동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던 친구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과 이모, 형과 동생과 친구의 무덤가에서 술에 취해 흐느꼈던 이들이 과연 한밤의 무덤가를 무서워했을까요. 학생 시절 광주의 학생운동이 왜 그토록 치열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이 마흔이 넘어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는 지나간, 광주에서마저 지나간 이야기입니다만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그런 상처들이 깨끗이 아물 수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늘의 광주에서 왜곡된 형태로 불쑥 고개를 내밀곤 하는 것 같아요.
아츠미 1장에 관해 덧붙여 묻겠습니다. <죽은>은 결국 ‘사진으로 사진을 찍은’ 작업입니다. 언뜻 보면 마치 그림 같거나, 컴퓨터로 합성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 얼굴들이 그냥 스트레이트한 방식으로 사진을 재촬영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게 되면 어떤 서늘함이 머리를 스칩니다. 그런 서늘함은 어디서 기인한 걸까요? 사진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다시 사진을 찍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노순택 <죽은>은 말 그대로 죽은 이들의 얼굴을 담은 작업입니다. 얼굴은 얼굴인데 상해버린 얼굴이지요. 그러면서 자꾸 닳아 없어지는 얼굴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고 얼굴 또한 아니며 단지 훼손된 사진일 뿐입니다. 누군가 일부러 훼손하려고 한 게 아니라 망월동 묘역에서 눈과 비를 맞고 햇볕과 서리를 견디며 자연스럽게 망가진 것입니다.
그것은 사진일 뿐인데 제겐 그 사진의 자연스러운 훼손이 마치 그분들의 죽음을 은유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일괄 제작된 새 묘역의 사진들과는 달리 옛 묘역의 사진들은 제작방법이 저마다 다르고 묘소의 위치에 따라 습도와 일조량도 달라서 사진마다 제각각의 훼손과정을 겪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오월 광주라는 ‘죽음의 시공간’을 공유했을지언정, 저마다의 삶을 각자의 모습으로 가꾸어 가던 개별자였다는 평범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부터 개별 영정을 깊이 보았던 건 아닙니다. 옛 망월동의 황량한 풍경을 몇 장 찍었을 뿐이었죠. 좀 더 근접해 들어갔다 해도 영정과 묘비, 봉분을 한 화면에 담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상해버린 영정사진 그 자체를 오래도록 바라보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다시 옆 무덤의 영정을 찬찬히 보게 됐고, 다시 옆으로 옮겨 가는 식으로 영정사진 모두를 뚫어지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영정들의 제작기법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그랬을 겁니다. 항쟁 이후 유가족들은 마치 조직범죄자처럼 한데 뭉치는 게 허락되지 않았으니까요. 오월이라지만 저마다 사망한 날이 다르고 또는 행방불명된 지 한참이 지나 시신을 찾기도 했으니 영정사진을 일괄 제작한다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래서 어떤 영정사진은 액자나 유리관에 담겨 제작됐고, 또 어떤 사진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진은 코팅이 됐는가 하면 어떤 이의 영정은 사진이라 부르기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정사진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훼손되는 그 풍경은 학생 시절 숨죽이며 보았던 학살의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했어요. 계엄군의 총칼에 짓이겨진,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된다고 다짐하게 했던 그 얼굴들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얼굴들을 정면에서 다시 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요. 총칼에 짓이겨진 얼굴이 아니고, 살았을 적 말끔했던 얼굴도 아닌, 세월이 흘러 (인간적으로가 아니라) 사진적으로 낡고 늙어버린 얼굴들을 담으려 했던 것입니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필연적으로 ‘시간’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죽은 이들의 살았을 적 시간을 담았던 사진이 살았던 이의 죽음을 증언하기 위해 오랜 시간 무덤을 지키다가 자연스럽게 망가져 이렇게 사진으로 다시 담긴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조리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중의 시간을 품고 있는 그 사진들을 다시 사진으로 복제해 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오랜 시간 생각하게 됐지요. 하지만 그 생각들을 단정적으로 정리하라면, 뭐라 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츠미 작업기간이 6년여에 걸쳐있다 보니 이 작업은 훼손된 영정사진이라는 ‘결과’를 바라보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훼손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기도 했겠군요. 그것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산 자들의 삶이 훼손되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순택 해마다 달랐습니다. 류영선 님의 경우 2006년엔 얼굴을 알아볼 정도였는데, 2011년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영정이 망가졌습니다. 어떤 영정은 아예 사라져 버리기도 했습니다. 너무 낡아버린 영정을 그대로 두는 게 마음에 걸려 누군가 치운 게 아닐까 싶습니다. 대부분의 영정이 제가 지켜본 6년의 시간 앞에서 견디거나 바스러지면서 저마다 늙어갔습니다. 얼굴은 모두 증발하고, 유리 액자만 덩그러니 남은 영정도 있었지요. 마치 거울처럼 제 얼굴 형상이 실루엣으로 반사될 때, 그 영정은 제 자신의 영정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이렇게 훼손된 영정과 황량한 망월동의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무관심과 묘역의 관리 소홀을 질타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데, 글쎄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겐 일그러지고 녹아내린 그 얼굴 사진들이, 단지 일그러지고 녹아내린 상태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지켜보게 해준 그 얼굴들이 뭔가 말을 거는 것만 같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말을 걸었다 해서 제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다만 이런 생각은 했습니다. 일그러지고 녹아내리는 것은 저 사진들만이 아니라 산 자들의 삶 자체다.
망월동에서 얼굴을 지켜보고 집에 돌아와 그들의 평범했던 삶이 닮긴 증언록과 자료를 뒤적이는 게 큰 숙제였습니다.
아츠미 무덤에 영정사진을 놓는 문화는 한국에서 그리 보편적인 일이 아닌 것으로 압니다. 망월동에는 왜 영정사진이 놓였던 걸까요?
노순택 죽은 이를 보내는 의식은 문화권마다 동질성과 차별성이 있을 겁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매장문화를 따랐죠. 저마다 규모와 장식의 여부는 다르겠으나 봉분 앞에 고인의 이름과 생몰연도를 적은 비석을 세우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 앞에 사진을 놓는 일은 드물죠.
개인적인 죽음의 경우 살아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고인의 얼굴을 기억하며 개인적인 추모를 하면 될 일이겠지만 오월 광주의 경우 그것이 개인적 죽음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죽음이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기억을 촉구할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고인과 친분이 없는 이라 할지라도 망월동 묘역을 찾아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였으니까요.
비록 묻힌 이가 다르고 비석에 적힌 이름이 다르겠지만 비슷한 크기의 봉분과 비석으로 조성된 망월동 묘역에서 가신 이들의 개별적 삶을 잠시나마 생각하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매체가 아마도 사진이었을 겁니다.
망월동에 묻힌 이들은 남녀노소, 참으로 다양한 삶을 살았던 이들입니다. 방광범 군은 겨우 12살이었습니다. 저수지에서 멱 감다가 총격에 쓰러졌지요. 최미애 씨는 뱃속에 아기를 가진 새댁이었는데 남편을 기다리다가 길에서 총격을 받았습니다. 전남대 휴학생이었던 류영선 씨는 최후까지 도청을 사수했던 시민군이었습니다. 방광범의 앳된 얼굴, 면사포를 쓴 최미애의 눈부신 모습, 청년 류영선의 단단함을 봉분이나 비석이 말해줄 수는 없는 일이지요.
사진이 한 사람의 총체를 말해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생의 단면을 보여줄 수는 있었을 겁니다. 무덤 앞의 사진이야말로, 아, 이토록 어린 아이였구나, 저 면사포는 어쩜 저렇게 눈부시게 슬플까, 스물아홉 살 청년에게 도청의 마지막 밤은 어떠했을까 하는 상념을 불어넣어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손바닥 크기의 돌에 새긴 사진이 일괄 제작되어 묘비에 부착되기도 했습니다만 그 울림은 사뭇 달랐던 것 같아요.
망월동 옛 묘역에는 오월 광주의 열사뿐만 아니라 80년대와 90년대를 치열하게 살다가 산화해 간 수많은 민주열사, 노동열사, 학생열사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광주의 피눈물을 가슴에 담고 군부독재와 싸웠던 이들이고, 죽어 망월동에 묻혀야만 했던 이들입니다. 이한열, 이재호, 이철규, 조성만, 이내창, 강경대, 박승희, 김남주 등 격동기 한국사회를 불꽃처럼 살다 간 분들이 그곳에 묻혀 있어요. 그 분들의 무덤 앞에도 같은 식으로 영정사진이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기억하라’는 명령처럼 들립니다.
죽음을 훔쳐보는 것 또한 산 자의 욕망이자 의무
아츠미 망월동 묘역은 현재 옛 묘역과 새 묘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과 직접 관련된 희생자들의 경우 모두 새 묘역으로 이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옛 묘역을 찾는 이들이 많고, 오히려 그곳에야말로 오월 광주의 정신이 배어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새 묘역과 옛 묘역 사이에는 시간의 절단면뿐만 아니라, 어떤 감정의 절단면도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순택 새 묘역의 정식명칭은 ‘국립5.18민주묘지’입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통령특별담화를 통해 묘역조성 계획이 발표됐지요. 1995년엔 5.18특별법이 만들어졌고, 1997년에 묘역조성공사가 완료되면서 옛 묘역에 묻혔던 유골을 이장했습니다. 이때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무명열사들은 이장이 늦춰졌습니다. 2001년에야 옛 묘역에 있던 11기의 무명열사 유골과 행방불명자 가족 93명의 DNA가 추출되었고, 채수길 권호영 등 여섯 분이 21년 만에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2002년 7월, 신원이 확인된 여섯 분과 무명열사 다섯 분의 유골이 옮겨지면서 이장작업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같은 해, 새 묘역은 국립묘지로 승격됩니다. 따라서 지금 옛 묘역의 무덤은 모두 유골이 없는 상태의 가묘입니다. 유골을 옮기면서 옛 무덤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걸로 압니다. 비록 유골을 옮기더라도 옛 망월동 묘역이 가지는 상징성이 커 그대로 무덤의 형태를 유지하기로 한 것이죠.
이장을 하는 과정에서 ‘그렇다면 오월 광주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진상규명과 5.18정신 계승을 위해 투쟁하다 산화해간 민주열사, 노동열사, 학생열사의 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갑론을박도 있었다고 해요. 서운함과 야속함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국가에서 집행하는 일이다 보니 명확한 범위가 규정될 수밖에 없기도 했겠지요.
현재 새 묘역에는 1200여 기의 유골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웅장한 규모지만 그 묘역의 양식이 마치 국립현충원과 같은 제도공간의 경직성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다며 눈살을 찌푸리는 분들도 있지요. 여전히 광주의 정신은 옛 망월동에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5월항쟁은 1980년 5월에 종료된 게 아닌 80~90년대를 관통하는 항쟁이었고, 그 과정에서 산화해 간 많은 분이 옛 망월동에 함께 묻혔으니까요.
아츠미 망월동 새 묘역에 1200여 기의 유골이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1980년 당시 사망자가 1200여 명에 달했던 건가요? 야만적인 진압작전이 낳은 피해규모에 대해 국가의 통계와 시민사회의 통계가 매우 달랐던 것으로 압니다.
노순택 2005년에 발표된 5.18기념재단의 통계에 의하면, 당시 사망자 수는 165명, 행방불명이 65명이라고 합니다. 사인은 129명이 총상, 9명은 자상, 17명은 타박상이었습니다. 평균연령 27.5세,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상이 후 사망자는 376명이었습니다. 평균생존기간이 13년 1개월이었다고 합니다. 집계된 부상자 수가 3천여 명에 달하고, 통계가 발표된 지 7년이 흘렀으니 상이 후 사망자 수는 더 늘었겠지요. 구속연행자 수는 1394명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빠뜨리기 쉬운 통계가 계엄군의 희생입니다. 23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13명은 계엄군끼리의 오인사격으로 숨을 거뒀습니다. 그들을 잔인한 진압의 가해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명령에 복종해야만 했던 사병들에게 국가범죄의 모든 책임을 덮어씌울 수는 없겠지요. 그들 또한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였음이 분명합니다.
5.18 직후, 한 때 광주에는 2천 명 사망설이 돌기도 했습니다. 전쟁세대들마저 “6·25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고 증언할 정도로 잔혹한 살상이 자행됐던 터라 어림잡아 2천 명은 죽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었던 것이죠. 비록 2천 명 사망설은 수그러들었지만, 군 당국이 저지른 조직적 암매장과 은폐 기도를 감안하면 사망자 수는 공식통계보다 웃돌 것입니다.
사실 5.18의 실체적 진실에 관한 문제에서 정부 당국은 단 한 번도 진솔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쿠데타 세력이 집권했던 시기야 그렇다 치더라도 문민정부라던 김영삼 정부 때도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죠. 뒤늦게 5.18특별법 제정으로 다시금 수사에 들어가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 기소했지만 누가 발포를 명령했는지, 무엇이 조직적으로 은폐되었는지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5월항쟁의 의미를 깎아내리거나 훼손하는 일이 정부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건 참으로 개탄할 일입니다. 심지어 2012년 8월, 국가보훈처는 12.12군사쿠데타의 주역이자 전두환의 경호실장을 지냈던 안현태를 기습적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했습니다. 안장심의규정마저 어겨가면서요. 시민에게 총칼을 겨누고 국가변란을 획책했던 자를 국립묘지에 모신 겁니다. 안 씨는 말년에 ‘국가원로자문회의 사무총장’을 지냈습니다. 이 나라 국가원로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같은 이들이니, 그럴 법한 일이지요.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했으니 쿠데타의 수괴였던 전두환 노태우의 국립묘지행은 보장된 죽음의 예우일 겁니다. 우리는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 모두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겁니다. 흥미롭지만 슬픈 사회입니다.
아츠미 1980년 총칼을 휘둘러 숱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이들도 결국 자신의 죽음 앞에서 무기력한가 봅니다. 그 어떤 살인자도 결국 죽는다는 건 작은 공평함이자, 사실은 무기력함에 대한 실토입니다. 이러한 무기력감은 그들 모두가 죽는 날까지 계속되겠지요. 오월의 죽임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남아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명령. 당신의 작업은 결국 죽임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죽음에 관한 것처럼 보입니다.
노순택 지난해, 광주작업을 마무리 짓기로 마음먹고, 관련 책을 읽고, 자료를 찾고, 또 생각을 이어나가면서 제 머릿속을 지배했던 말이 ‘죽음’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죽음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잠을 잘 때마다 늘 꿈을 꿨는데 지난해에는 이상하리만치 죽은 사람들이 나오는 꿈을 쉼 없이 꿨습니다. 그들이 광주의 혼령인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다만 죽어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제 꿈을 지배했어요. 그들이 왜 나의 잠 속으로 스며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꿈을 악몽이었다고 잘라 말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현실이었다면 끔찍해서 외면하려 들거나 슬퍼서 절규했을 그 장면들을 꿈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었는지 의아합니다.
사실, 죽음은 삶만큼이나 인간에게 중요한 가치지요. 아까 말씀하신대로 ‘죽은 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산 자에게 부여된 의무 같은 것’이라고 할 때 그 두려움을 떨치고 죽음을 훔쳐보는 것 또한 산 자가 품은 욕망이자 의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사진이라는 매체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도 사실은 죽은 이들이 담긴 사진을 통해서였습니다. 대학이라는 곳에 첫발을 딛고 마주한 한국현대사가 오월 광주를 바라보는 일이었고, 잔인하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사진과 비디오를 숨죽이며 바라보던 기억이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제 막 성인이 됐던 제가 곧이어 마주해야 했던 사건들, 한낮의 길거리에서 백골단에게 타살됐던 강경대의 죽음, 박승희의 분신, 동두천에서 벌어진 윤금이 씨 살해사건, 백골단이 장례식장 벽을 뚫고 들어와 시신을 탈취해 갈 만큼 의문으로 얼룩졌던 노동운동가 박창수의 죽음 등 그 모든 충격적이고 이해불가능한 사건들이 ‘사진’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죽음이 담긴 그 사진들은 쉽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것 같아요.
지난해엔 가족을 태우고 지방에 다녀오다가 고속도로에서 타이어가 터지는 바람에 큰 사고를 겪었는데요. 차가 반파됐는데 사람만 무사했습니다. 허나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내 곁에 가까이 머물고 있는 것인지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광주작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실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월의 죽음을 영웅적이고,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맥락의 죽음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나의 죽음이건, 남의 죽음이건, 죽음은 결국 우리 모두를 엄습하고야 마는 잿빛 내일이 아닐까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이토록 초라한데, 학살자들마저 죽음 앞에선 무기력한데, 우리는 왜 이러고 있는가, 이런 자괴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 모두가 무기력하다는 사실이 타인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핑계가 될 수는 없겠지요.
슬라보예 지젝이 이런 말을 했더군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빠르건 느리건 결국 우리에게 도달하는 유일한 편지, 우리들 각자를 결코 틀릴 수 없는 수신인으로 발송되는 편지, 그것은 죽음이다. 우리는 이 편지가 우리를 찾아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한에서만,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아직 그 편지를 받지 않은 자들의 의무 같은 것이, 그 편지를 먼저 받은 사람들, 어쩌면 내가 받아야 할 편지를 대신 받은 건지도 모르는 이들에 대해 기억과 사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사진에 담는다는 것
아츠미 당시 광주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들을 굳이 꼽는다면 계엄군이 무차별적으로 총칼 진압봉을 휘두르는 장면과 저항하는 시민군, 널브러진 시신, 오열하는 가족 등을 들 수 있을 겁니다. 그 중 한 꼬마가 아버지의 영정을 턱에 괴고 슬픔에 빠져 있는 사진은 독일 <슈피겔> 등에 실리며 광주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상징적 이미지가 됐습니다. 이 사진은 뒤늦게 한국으로 반입되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는데요.
노순택 그 꼬마 상주의 이름은 조천호입니다. 당시 다섯 살이었죠. 건축노동자였던 그의 아버지 조사천 씨는 전남도청 부근에서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시위에 동참했다가 5월 21일 총탄에 맞아 숨을 거뒀습니다. 5월 29일 합동장례가 치러졌는데, 때는 계엄군이 광주를 완전히 장악한 직후여서 울음소리조차 크게 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서른네 살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있는 다섯 살 소년은 그저 배고프고 힘들었겠지요. 영정에 턱을 괸 채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외신기자가 촬영했고, 독일 <슈피겔>에 실리면서 광주의 항쟁과 살육을 알리는 상징적 이미지가 됐습니다.
그는 칠 년이 지난 1987년에야 그 사진을 처음 보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고 해요. 당시 한국사회는 6월항쟁의 격랑 속에 있었고, 대선이 코앞이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87년 6월항쟁은, 오월 광주가 낳은 민주항쟁입니다. 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었고, 이는 곧 오월 광주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했습니다. 선거유세장에 자연스럽게 광주의 이미지들이 유포되었겠지요. 조천호 씨의 할머니도 그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젊은 아들의 영정을 들고 있는 어린 손자의 모습이 담긴 그 사진은 잊으려 애썼던 공포와 좌절의 긴 시간이 압축된 찰나로 몰아치는 것과 같았을 겁니다. 할머니는 사흘 만에 생을 달리 하셨습니다.
어쩌다가 보니, 조천호 씨는 사진에 갇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월의 비극이 그의 삶에 끼친 영향만큼이나 그 사진이 끼친 영향이 컸을 겁니다. 그는 어른이 되어 망월동 관리소에서 일하며 묘역을 돌봤습니다. 지금은 광주시청에 근무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이 사진은 오월 광주를 기리는 많은 책자와 행사에 등장합니다. 현수막에도, 버스에도 이 사진이 실려 있지요. ‘2023년 광주아시아문화중심도시 프로젝트’의 여러 시설물에도 이 사진이 사용됐습니다. 긴박했던 광주의 현재 상황을 타전하는 이미지에서, 광주의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과거의 이미지로, 이제는 광주의 미래를 희망하는 이미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지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프로젝트를 알리는 버스에 이 사진과 함께 실린 문구가 제 눈을 붙들었습니다.
“힘든 순간에도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이 사진에 얽힌 가족사와 이 사진의 이용사, 그리고 이 사진을 규정했고, 규정하려는 언어들을 함께 생각하니 왠지 모를 착잡함이 마음을 눌렀습니다. 힘든 순간에도 생각해야만 했던 ‘미래’란 대체 무엇일까요?
아츠미 할머니의 죽음은, 이미 겪었던 일을, 잊으려 노력했던 그 고통의 시간을 사진이 다시 불러옴으로써 야기된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는 아들의 죽음과 장례식을 이미 목격했을 텐데도 왜 그렇게 사진에 충격을 받았던 걸까요? 때론 사진은 현장에 없었던 사람보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에게 더 큰 충격을 주는 듯합니다.
노순택 사진이라는 행위는 일종의 가위질과 같아서 넓게 펼쳐진 공간의 일부를, 길게 이어진 시간의 일부를 잘라내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인간이 눈으로 보는 방식과 카메라가 사진을 만드는 방식은 다르죠. 어떤 사건에 관한 시각적 경험과 그 사건을 기록한 사진 사이에는 간격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그 사건의 당사자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할머니에겐 아들을 잃은 그 비극적인 사건이 칠 년에 걸쳐 사무친, 가슴에 얹어놓은 바위와 같은 한이었을 겁니다. 오월의 그날은, 단지 그 날만이 아니었던 것이죠.
헌데 그 사진은 기나긴 고통의 기억을 ‘순간’으로 압축해 마치 비수처럼 날아들었을 것만 같습니다. 합동장례식에 할머니도 계셨겠지만, 그건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통곡과 절규로 가득한 ‘뭉툭한 시공간’의 기억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진은 그 뭉툭했던 시공간을 날카롭게 잘라냄으로써 할머니의 기억을 뒤흔들어 놓았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츠미 그렇다면 이러한 사진들, 타인의 고통이 담긴 이러한 이미지들이 가져오는 이중적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고통의 사진은 필요한 것입니까? 선의에서 출발한 어떤 사진이 계속해서 그 선의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인가요?
노순택 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자주 그 문제를 고민하지만, 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망각기계>뿐만 아니라 제 작업 전반에 그런 문제들이 똬리를 틀고 있지요. 그것은 전쟁사진의 아이러니처럼 사진의 이율배반과 부조리를 담고 있는 문제여서 간단치 않습니다. 반론에 반론이 가능하고, 또 허용되어야만 하는 문제입니다. 타인의 고통이 담긴 사진에 대한 어떤 사람의 의견도 전적으로 옳을 수 없고, 또한 전적으로 틀릴 수도 없습니다.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결론은 ‘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이므로 고민을 포기하는’ 것이겠지요.
누군가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 게다가 그것이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이거나 구조적 폭력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은폐되어선 안 됩니다.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목격되고, 또 기록되었다면 당장의 폭력을 저지하기 위해, 또 그 폭력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아울러 그러한 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세상에 알려져야겠지요. 베트남전 당시 전쟁사진이 불러일으킨 반전여론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진들이 폭력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식탁에서 단지 쇼킹한 뉴스거리로 소비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미디어에겐 상품이었고, 사진가에겐 밥벌이의 측면도 있었겠지요. 아마도 이런 종류의 작업을 하는 이들은 이 고민에서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윤리적 논의에 붙들린다는 건, 헤어나기 힘든 수렁에 빠지는 일이자, 재미없고 지치는 일이니까요.
한국사회의 갈등과 폭력의 장면들을 다루는 제 작업이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하긴 어렵지만 ‘선의’로 포장하고 싶은 생각은 더욱 없습니다. 사실 저는 누군가의 폭력을 고발하거나 고통을 저지하기 위해 작업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주 이기적으로 제 작업, 그 자체를 위해 일했을 뿐이죠. 다만 그 작업의 원활함을 위해 몇 가지 부수적인 활동을 해왔습니다. 알리바이를 만드는 일인데 그것의 형식을 ‘연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겁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사진에 담는다는 건 고통 받는 누군가의 동의를 구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명시적이건 암묵적이건 그 대상이 사람이건 사물이건 마찬가지지요. 대상이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사진은 작동할 수 없거든요. 따라서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이 현재진행형이라면, 그리고 그가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알림으로써 폭력의 중단을 호소하고자 한다면, 그 호소의 방법론으로 사진을 허락한 것이라면, 촬영허가에 따른 대가를 지불해야지요. 그러한 지불방법이 제한적이거나 어설플 수도 있을 테지만 ‘나중의 작업’을 위해서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에 기고하거나, 포스터·엽서·유인물 제작, 거리 전시, 기금마련 운동 등 다양한 ‘지금 당장의 연대’에 동참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알리바이가 나중의 작업, 예컨대 책을 출판하거나 이른바 ‘화이트 큐브’에 전시하는 일에 ‘선의’를 부여하는 건 아닐 겁니다.
저는 사진에 선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가름할 잣대는 없다고 봅니다. 사진은 결국 맥락에 의존하는 텍스트일 뿐이고, 어느 맥락에 사진을 놓을 것인가, 어느 맥락으로 사진을 읽을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 것이지요. 사진은 결코 착한 매체가 아닙니다. 어떤 ‘선의’도 쉽게 ‘악의’로 변질시킬 수 있고, ‘악의’마저 ‘선의’로 포장할 수 있는 교묘한 매체이지요. 하지만 그 선악의 판단 기준은 사진 그 자체가 아니라 사진이 놓인 맥락일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사진가는 카메라 뒤에 숨은 채 비겁하게 셔터를 누르고, 사악하게 조형성을 추구합니다. 이 ‘비겁하고’, ‘사악한’ 과정은 대단한 윤리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진이 생산되는 지극히 기계적인 과정일 뿐입니다. 사진을 찍지 않는다면 모를까, 찍기로 판단했다면 그 물리적이고 조형적인 과정을 피할 수 없지요.
중요한 지점은 생산된 사진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의 문제인데 안타깝게도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최초의 맥락 이후 사진은 부유합니다. 선의의 맥락에 놓였던 사진도 그와 무관한 맥락에 놓일 수 있고, 심지어 악의를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사진의 함정이라 부를 수도 있고, 반대로 가능성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진 자체에 선의를 판가름할 잣대가 내재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담는 사진의 생산과 사용에 관한 중단 없는 사고의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아츠미 2장, <죽지 않은>은 말 그대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1장이 보여주는 숙연함에 비해 2장은 어떤 블랙 코미디나,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노순택 말씀하신 대로 2장은 오월 광주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무덤 앞에 엎드려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 오월 광주에 관한 뉴스와 이미지를 생산하는 미디어의 풍경, 그에 동승하려는 정치인의 모습도 담겨 있지요. 30여 년이 흐른 오늘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는 연극적인 장면도 있습니다. ‘아시아문화의 전당’을 짓기 위해 옛 전남도청 별관을 허무는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논쟁적 장면도 실려 있습니다.
늦은 밤, 한 어머니가 상복을 입은 채 유인물을 나눠주는 풍경, 그것은 마치 80년대에나 있을 법한 장면인데, 전남도청 별관 철거 문제가 어머니를 다시 거리로 나서게 했습니다. 어머니가 나눠주시던 유인물 속 판화가 제 눈을 끌었습니다.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화가 홍성담의 작품이었습니다. 한때 거리의 유인물로 배포되었다가 갤러리와 미술관으로 들어갔던 그 작품이 다시 거리의 유인물에 실리는 풍경이 마치 역사의 기이한 반복을 슬쩍 보여주는 것만 같더군요.
5월항쟁 계승주간에는 시민군이 되어보는 체험행사가 열리곤 하는데요. 커다랗게 인쇄된 전남도청과 분수대 사진을 배경으로 그 앞에 벽돌로 쌓은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시민군 복장으로 갈아입은 체험자가 소총을 겨누거나 확성기를 들면 행사진행자가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식입니다. 호불호를 떠나 제겐 그러한 장면들이 씁쓸하더군요. 사실 역사를 기억하는 다양한 공간들에서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모습이었을 뿐인데요. 예컨대 역사박물관 같은 곳이요. ‘아, 5.18도 이제는 역사박물관의 기억방식을 따르는구나.’ 아마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살아남았다고 해서, 먼저 떠난 이들을 기억한다고 해서 살아있는 시간 모두를 진혼곡으로 채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산 자에게 남겨진 가장 커다란 과제는 무엇보다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것이니까요. 2장은 이를테면, 죽음을 기억하는 삶의 풍경 같은 겁니다. 전적으로 아름다울 수도, 전적으로 추할 수도 없는.
5.18과 두 명의 대통령
아츠미 2장에는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장례식 풍경도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광주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전직 대통령들인데요. 광주가 그들을 애도하는 장면을, 단순한 슬픔의 장면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노순택 이미 말씀드렸듯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은 오월 광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정치인생을 살아왔던 분들입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체가 광주를 피로 물들였던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조작됐던 사건이고, 김대중은 유신정권에 이어 신군부 통치 아래서도 모진 탄압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김대중을 향한 광주의 사랑은 참으로 각별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을 비롯해 오월 광주의 반석 위에 정치권력을 쌓았던 분들이 얼마만큼이나 오월의 정신을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갔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입니다. 오월 광주를 대변한다면서 눈물과 단물을 소비한 이들 또한 광주의 엘리트 정치인들이었다는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노무현 대통령은 약간은 다른 경우일 겁니다. 그의 정치적 고향은 부산이었지만 망국적인 지역감정, 특히나 광주의 진실에 흙탕물을 끼얹었던 괴물 같은 지역감정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의 대통령 도전에 광주의 지지가 결정적이었다는 건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김대중도 노무현도 광주시민들에겐 애증의 대상이었지요.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몸을 던져 정치적 타살을 증언했을 때, 그를 보내는 우리 사회의 풍경을 서울에서 지켜봤습니다. 하지만 석 달 후 김대중 대통령마저 그 뒤를 이었을 때는 왠지 하루만이라도 광주에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김대중 대통령의 커다란 영정이 현수막으로 제작되어 옛 전남도청에 내걸린 풍경은 마치 한 시대의 마지막 장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광주와 김대중이 맺었던 짙은 관계의 후속 장면들이 그곳에 있었죠. 어떤 남자분이 오래 엎드려 절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지만 저는 그 장면이 정치인 김대중에게 투사됐던 광주의 한과 설움 같은 것이 북받쳐 오르는 순간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듬해 오월 광주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추모 1주기 행사를 봤습니다. 마침 비가 내려 옛 전남도청에 차려진 분향소에도 천막이 설치됐습니다. 천막 안에 세 명의 노무현이 있더군요. 애도를 마친 시민들이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한 ‘사진인형’이었습니다. 낯설고도 익숙한 장면이랄까요. 그래서 더욱 기이했습니다. 그것은 비단 광주에서만 느낄 수 있던 기이함이 아니라 우리가 ‘죽음을 기억하려는’, 아니 ‘기억하려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습관이 던져주는 기이함이었습니다.
망각기계는 ‘오늘의 오월 광주’에 관한 제 나름의 복잡한 생각과 풍경을 담으려던 작업이었는데 그 작업의 와중에 광주를 상징했던 정치인 두 분이 운명하는 것을 지켜보고 나니 생각이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아츠미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도 있습니다. 아마도 철탑 위에서 농성하는 노동자의 모습인 듯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을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이고, 왜 두 장의 이미지로 구성한 것인지요?
노순택 그 철탑은 전남도청과 분수대 사이에 세워진 교통상황 CCTV탑입니다. 2009년 배터리를 생산하는 ‘로케트전기’ 해고노동자들이 하소연할 곳을 찾지 못해 철탑 위에서 장기농성을 벌였습니다.
“공장에서 10년 넘게 일했던 사람들을 폐건전지처럼 내버리더니, 회사사정이 나아지면 재고용하겠다던 합의도 무시하고 뒤에서 몰래 신규채용을 하는 비열함에 항의하고 싶어서” 그들은 철탑에 올라 “살려 달라, 일자리를 돌려 달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던 겁니다.
해고노동자 유제휘, 이주석 씨는 높이 20m, 0.5평의 비좁고 고립된 철탑에서 70일을 농성한 끝에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끝내 복직하지 못했습니다. 석달 뒤 다시 그곳을 찾아갔을 때, 철탑 위에는 쇠사슬이 칭칭 감겨있더군요. 누구의 점령도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경고였습니다. 마침 그해는 용산에서 철거민들이 망루에 올라갔다가, 무리한 경찰 진압과정에서 화염에 휩싸여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던 해입니다. 진압경찰 한 명도 목숨을 잃었죠.
1980년 오월 광주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던 ‘바위섬’의 노랫말이 그렇듯, 광주는 무서운 고립을 견뎌가며 저항했던 곳입니다. 30여 년이 흐른 오늘, 평범한 노동자 두 명이 오월 광주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도청 앞의 철탑에 올라가 고립된 70일을 보내고, 결국 패배하고, 그 철탑마저 폐쇄되는 풍경을 바라보니 착잡하더군요. 사실은 저의 지나친 오해와 환상이 부른 씁쓸함이죠. 그러한 풍경은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고, 광주라고 해서 특별함을 기대한다는 건 우스운 일일 테니까요.
아츠미 3장 ‘다만 닳는’은 장소와 사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시민들을 재판하고 가두었던 상무대의 풍경과 항쟁을 기념하는 조형물, 전남도청, 분수대, 망월동 묘역 등을 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도 더러 눈에 띕니다.
노순택 대부분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추측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공간과 사물입니다. 다만, 두 장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을 해야 할 듯합니다. 광주에서 촬영한 것이 아니거든요.
확성기 이미지가 그 한 장입니다. 그것은 옛 기무사령부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기무사의 전신이 보안사였고, 전두환은 그곳의 사령관이었지요. 보안사는 군과 관련한 정보업무를 담당하는 특수부대였는데,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채 쿠데타를 주도했고, 그 후 군사독재를 보위하기 위해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을 자행했던 곳입니다. 이후 기무사로 명칭을 변경했지만, 오늘날에도 정치적인 문제에 은밀한 손을 뻗고 있어 논란이 되곤 하지요. 제 머릿속엔 시민군의 손에 들린 작은 확성기와 청와대가 바라보이는 기무사령부 옥상에 장착된 확성기가 묘하게 겹쳐졌습니다. 그 둘의 ‘기능’은 같되, ‘용도’는 다르다. 사물의 같은 기능과 다른 용도가 드러내는 기이함은 시민군의 손에 들린 총과 계엄군의 손에 들린 총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부연설명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미지는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진 한 장의 유인물인데요. 위에 언급했듯이 대북삐라를 날려 보내는 임진각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어느 탈북자의 주장을 인용하며 “1980년 광주에 간첩들이 대거 남파, 폭동을 주동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츠미 아스팔트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안에 까만 표지석이 놓여 있습니다. 그 돌에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라는 글귀가 눈에 띄는데요. 이곳은 어디이며, 왜 그러한 표지석이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인지요?
노순택 망월동 옛 묘역 오른편 길바닥입니다. 구멍 난 아스팔트에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마을’이라 적힌 표지석이 깔려 있지요. 이 표지석은 1982년 전두환 부부가 전남 담양군 고서면의 한 농가에 민박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광주의 피비린내가 아직 가시지 않은 시점에 그도 무엇이 두려웠는지, 광주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고 인근 담양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걸 기념하기 위해 마을에 표지석을 세웠다니 우습고도 무서운 시대였지요. 이 표지석은 나중에 마을 한 구석에 방치되었는데, 이를 발견한 5.18유족회 회원들이 가져왔다고 합니다. 당시 한 유족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해머로 내리쳐 조각이 났다더군요. 깨진 표지석을 길바닥에 깔아놓은 까닭은 돌에 새겨진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날의 참상을 잊지 말자는 뜻이라고 합니다. 망월동을 오가는 많은 참배객들이 전두환의 이름을 밟습니다. 전두환이 이런 사실을 알까요?
하지만 사람들이 망월동에서 짓밟는 건 ‘가상의 전두환’일 뿐, 연희동에 사는 ‘현실의 전두환’이 아닙니다. 그는 한 해 수십억 원에 달하는 전직대통령의 예우를 받고 있습니다. 규모조차 파악하기 힘들다는 거액의 비자금을 29만 원짜리 통장에 숨겨둔 채.
우리는 누구인가요? 망각기계인가요?
아츠미 마지막 5장 ‘오지 않은’에 대해 얘기 나눌까 합니다. 5장의 사진들은 마치 1장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얼굴에서 시작해 장소와 사물로 옮겨졌던 이야기가 다시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얼굴이라지만, 그것을 사람의 얼굴이라 부르긴 어려울 듯도 한데요. 이곳은 어디이며 제목대로라면 무엇이 오지 않았다는 의미인지요?
노순택 전남 화순의 운주사입니다. 광주에서 약 20km 떨어진 곳에 있는 사찰입니다. 양쪽에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있고,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다시 산으로 막히는데, 바로 그 자리에 절이 있습니다.
운주사는 고려 시대에 지어진 사찰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이곳은 절 그 자체보다는 절을 에워싸고 있는 천불산의 돌부처와 탑으로 유명합니다. 천불천탑의 신화가 있는 곳입니다. 지금은 많이 망실되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수많은 석불과 탑을 바라보면 ‘천불천탑’의 신화가 허풍만은 아닐 거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운주사 천불천탑이 주는 기묘함과 불가해함은 비단 수량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닙니다. 석탑과 석불의 조형양식이 어느 절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합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난데없는 모양새라고도 하고, 파격이라고도 합니다. 또 누군가는 혼돈과 질서라고 하더군요. 수수께끼, 답을 알려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정답 자체가 없을 것 같은 수수께끼가 산 구석구석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운주사를 찾아 갔던 건, <망각기계> 작업과는 무관했습니다. 그 절의 기이함에 괜히 끌렸어요. 그래서 광주를 방문할 때면, 시간을 내어 들르곤 했지요. 절에서 잠을 잔 적도 여러 번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화해설을 하는 아주머니의 말씀을 엿듣다가 가슴이 서늘해졌습니다.
5월항쟁의 유가족과 친구들이, 잔인한 살육으로 가족과 친구를 잃고 비탄에 빠졌던 그 분들이 이곳 운주사를 찾아와 마음을 달래고 가곤 했다는 얘기였습니다. 운주사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빌 수 있는 종교공간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산과 들에 널브러진 못생긴 불상들, 목이 잘리고 눈·코·귀가 문드러져 부처님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그 돌사람들을 보며, 금남로에서 죽어간 가족과 친구를 떠올렸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운주사의 들과 산비탈에 엎어지고 자빠지고 문드러진 그 돌부처들이 새롭게 보이더군요. 정말이지 그날 쓰러져간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이후 요헨 힐트만의 <미륵>을 읽으며 운주사의 내력과 의미를 공부했습니다. 그 책이 운주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요헨 힐트만은 전남대 교환교수로 왔다가 운주사에 매료되어 미륵불 연구에 매진했던 독일인 미술사학자입니다. 그는 운주사 천불천탑이 ‘아직 오지 않은 용화세계’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못생긴 석불들은 민중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미래에 오시는 부처, 즉 미래불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미래불이 바로 미륵입니다. 미륵사상은 갑오농민전쟁에 불씨를 지폈던 동학의 이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현실이 고통스러웠던 사람들, 사는 게 죽는 것만큼이나 힘겨웠던 이들이 간절하게 꿈꾸었던 용화세상, 그것이 바로 미륵불의 하생에 의해 온다는 것입니다. 허망한 요청이자 현실 도피적 망상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현실이 고통스러울수록 오히려 간절하게 미래의 세계를 꿈꿀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산비탈에는 두 분의 커다란 와불이, 그냥 누운 게 아니라, 거꾸로 누워 있습니다. 힐트만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석불들은 거꾸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된 세상에서 홀로 ‘똑바로’ 누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 부처들이 바로 서는 날, 세상이 뒤집어질 거라고 운주사 와불의 신화는 예언합니다. 계엄군의 총칼에 쓰러진 이들이 다시 일어나 살아오기를 꿈에도 갈망했던 오월의 유가족들은, 거꾸로 누운 미륵불을 바라보며 어서 그가 일어나 세상을 뒤집어주길 바라고 또 바랐을 것입니다.
물론 운주사 천불천탑의 유래를 둘러싼 다른 시각도 있습니다. 13세기 고려를 침략했던 몽골이 자신들의 건승을 빌기 위해 이곳에 대규모 불사를 조성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해상왕 장보고를 추모하는 유적지라는 설도 있지요. 어느 가설이 더 역사적 사실에 근접한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겁니다. 저는 다만, 오월의 항쟁 이후 살아남은 이들이 운주사의 문드러지고 부서진 부처 얼굴 속에서 고인의 얼굴을 찾고 위로받았다는 말에 주목했을 뿐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부처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거꾸로 누운 부처가 벌떡 일어나 세상을 뒤집어주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시간을 초월해 존재한다는 게 마치 지옥의 순환처럼 느껴졌어요. 지옥이야말로 부질없는 간절함, 오지 않는 해방으로 가득한 곳이니까요.
아츠미 <망각기계>는 거꾸로 누운 와불과 꽃밭에 누운 한 남자를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요? 꽃밭에 누운 이는 누구입니까? 지나치게 낭만적인 마무리는 아닌지요?
노순택 2007년 오월, 운주사엘 갔습니다. 따뜻한 봄날이었습니다. 동그란 접시를 크기순으로 포개놓은 것 같은 석탑 옆 마당에 토끼풀이 한 가득이었는데 환갑 즈음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모로 누워 낮잠을 자더군요. 평화로워 보였는데, 어쩐지 안쓰러웠습니다. 머리맡에서 슬며시 사진을 찍었지요. 그리곤 그 장면을 잊었습니다.
이 사진을 다시 보게 된 건 <망각기계>를 마무리하기 위해 필름들을 다시 훑어보면서였습니다. 찍을 당시엔 산기슭의 와불과 전혀 연결 짓지 못했는데, 작업을 정리하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보니, 그 둘이 묘하게 겹치더군요.
딱히 어떤 메시지를 의도한 건 아닙니다. 거꾸로 누운 와불이 언제 일어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토끼풀밭에 잠들었던 이 아저씨가 잠에서 깨어 무거운 몸을 일으켰을 거라는 추측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겠죠. 어쨌건 산 것은 살아야 하고, 그것이야말로 산 자에게 부여된 가장 막중한 의무니까요. 다만 산다는 것이 누군가의 죽음 위에서 성립되었다는 거부할 수 없는 그 사실을 가끔은 기억해야 할 겁니다.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해.
제겐 거꾸로 누운 미륵이 일어나길 기다릴만한 끈기와 믿음은 없었습니다. 다만 아저씨가 일어나길 기다릴만한 여유와 호기심이 있었을 뿐이죠.
아츠미 결국, 우리는 누구입니까? 망각기계인가요? 그것을 말하고자 함입니까?
노순택 아니오. 우리는 기억기계인 동시에 망각기계입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기억해야 한다!’ 거나 ‘망각하지 말자!’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월에 스러진 이들만을 보려던 게 아니라, 그들을 기억하고 망각하는 오늘의 우리와 마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폭력의 장면을 관찰해 왔던 제게, 왜 오월 광주가 마치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의식처럼 여겨졌는지 지금도 곰곰이 생각합니다. 어쩌면 제 나름의 장례를 치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어린 시절, 동네 골목에서 놀던 내 귀에 날아와 박혔던 유언비어와 어른이 되어 알게 된 그날의 사실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오며 목격했던 죽음의 풍경들에도 오월 광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이 작업의 이유라고 딱 잘라 말할 순 없지만, 아무튼 제겐 그랬습니다. 제 꿈속에 수시로 드나들었던 죽은 사람들에게, ‘당신은 오월의 영령이고,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장례를 치르노니 이제 작별을 고하노라’ 통보할 수는 없지만 이쯤에서 제 생각의 일단락을 지을 수는 있을 듯도 합니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라지만, 가능하다면 오월의 살인마 전두환이 죽어 기억되고 망각되는 풍경도 지켜보고 싶습니다. 화려하고도 잔인했던 그의 휴가가 어떻게 종료되는지, 산 자들은 지켜봐야 하는 거잖아요.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