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쿠데타가 분명 과거의 사건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5·16 군사쿠데타는 단지 과거의 사건으로 묻어두면 그만인 사건이 아니다. 그 자체는 물론 그것이 낳은 ‘부당함(injustice)’이 아직도 풀리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부당함은 정치군인들의 쿠데타로 인한 ‘불법적 헌정중단’ 식의 ‘실정법적 언어’에 기댄 표현으로는 미처 다 설명이 되지 않는다. 생명은 물론 자유와 평등을 위협하고 억압하는 ‘인간 존엄성의 파괴’, 즉 ‘인권 유린’이라는 ‘자연법’마저 위배한 ‘최고 범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5·16 군사쿠데타는 의도했든 아니었든 간에 그것이 가져온 결과가 무엇이었느냐와 상관없이 ‘인간의 세상’이라면 엄정히 청산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즉 5·16 군사쿠데타는 과거청산의 대상인 것이다.
왜 5.16 군사쿠데타가 과거청산의 대상인지 그 세력이 자행한 인권유린의 한 단면이나마 살펴보자. 쿠데타 세력은 ‘거사’ 사흘 후인 19일 930명의 ‘용공 및 혁신을 빙자하는 친용공분자’를 구속했다. 22일에는 용공분자 2,014명을 검거했다.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을 수행한 세력 전원을 수배한 가운데, 결국 쿠데타 직후에만 4,000여 명을 구금했다. 이 중 608명이 혁명검찰부에 넘겨졌고 기소된 수는 216명에 달했다. 190명은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중 5명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더군다나 이들은 자유당 시절 좌익분자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백 수십 명의 죄수를 일거에 처형했다. 반공의 기운이 약화되어 나라가 위험에 처했다며, ‘국시’로 반공을 내세우며 저지른 처사였다. 하지만 이미 민주당 정부에서도 데모규제법, 반공 임시특례법, 강력한 정보기관 창출 계획 등 강력한 반공정책을 실행, 추진하고 있음을 봤을 때, 설득력이 없는 폭력의 행사였다.1) 이는 1980년 5월 광주학살로 정권을 장악한 후 대량 구속과 해고, 삼청교육대 등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자행했던 국가권력의 폭압성과 인권유린을 연상시킨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인권유린 교과서’가 바로 5·16 군사쿠데타였던 것이다.
과거청산의 인권적 의미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자. 과거청산이란 무엇인가. 과거청산이란 부당했던, 즉 ‘정의롭지 못했던’ 역사 속 과오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 위한 규범과 교훈을 창출하는 실천이다. 역사 속 부당함은 심판받아야 하고, 결국은 심판받는다는 규범과 교훈을 세우는 일이다. 부당했던 역사 속 과오란 무엇인가? 여러 유형과 종류의 과오가 있겠으나 ‘청산’의 우선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그 무엇보다도 ‘인간 존엄성의 파괴’이리라. 과거청산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전범 재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그리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전쟁범죄의 주역이 바로 ‘독재 권력’이라는 것을).
인간 존중의 규범을 세워낸다는 의미에서 과거청산은 과거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미래지향적인 것이다. 즉 과거청산은 ‘미래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특히 공동체의 운명과 관련하여 그렇다. 인간 존중의 규범이 제대로 서 있지 않은 공동체에 누가 남아 그것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고 하겠는가. 행복추구는커녕 생존마저 위협받을 테니 말이다.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나라들이, 전쟁을 끝내고 인민들의 삶을 복원해야 하는 나라들이, 독재를 끝내고 민주화를 이룬 나라들이 모두 ‘과거청산’에 나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인권을 강조하고 과거청산을 논하는 것이 ‘그냥 당위’이기 때문에 혹은 ‘그냥 좋은 것’이어서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공동체를 꾸리는 목적 자체가 바로 존엄성을 보장받기 위함이라는 것 역시 다시 한번 꼭 상기할 일이다.
‘박근혜 정치철학’의 빈곤함
박근혜 후보가 혹은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5·16 군사쿠데타의 ‘혁명성’을, 그리고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주창하는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가정들(assumptions)’ 때문이리라. ① 5·16 군사쿠데타가 4·19 혁명 이후 민주당 정부의 무능과 학생 및 사회운동세력의 급진주의로 인한 정치 사회적 혼란과 그것으로 인한 북한 괴뢰도당의 무력침탈의 위험성을 막아냈다(사회 전체 차원에서 개혁을 감행할 사회세력은 당시 조직적 자원과 물리력, 가장 앞선 교육을 받아 지적 자원을 보유한 군밖에 없었다). ② 산업화·근대화에 전력을 다할 수 있는 효율적인 정치경제체제(억압적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우선체제)를 만들었고, 그에 바탕해 실제로 경제성장을 가져왔다. ③ 다수 국민이 인권유린 등의 희생이 있었지만 ①과 ②로부터 생존에 가장 긴요한 물질적인 이익을 얻었고, 그로 인해 삶의 질이 향상되었고 만족감을 느꼈다(추가적으로 ④ 박정희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우리가 목도하는 엄연한 현실인 ④를 제외해도) ①과 ②의 설득력은 높다. 민주당 정부는 정말 무능했다. 경제개발 계획도 갖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들이 과연 엄혹한 냉전적 세계질서에서 국민적 동의에 기반한 민주주의적 체제를 수립하고 그것을 지켜내며 경제발전을 실현할 능력이 있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2012년 지금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이 박근혜 후보와 5·16 군사쿠데타를 두고 공방을 벌이기에 앞서 새겨야 할 역사적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급진적 학생운동과 혁신정당 세력이 시대조응적이지 못한 통일운동에 빠져들어 국민들로부터 외면받았다는 것 역시 대부분의 역사학자와 사회과학자가 동의하는 바이다.2) 비판적 지성을 대표했던 『사상계』마저 5·16 군사쿠데타의 ‘불가피성’을 인정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함석헌 선생이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의 민정이양 약속을 ‘군인다운 말’이라고 칭찬하며, ‘빨리 그 사명을 다하고 잊어져야 한다’면서도 어쨌든 ‘꽃’이라 불렀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3) 바람직한 것이었느냐의 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정치학자로서 ‘박정희와 그 독재체제’에 어느 누구보다도 비판적인 손호철 교수도 인정했던 바와 같이4) 적어도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신생 독립국 중 ‘(종속적) 자본주의의 길’을 걸었던 나라 중에서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는 모두 독재체제였다. 독재체제가 경제성장에 효율적이었다는 주장은 간단히 부정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2012년의 대한민국’에서 5·16 군사쿠데타를 논함에 있어 문제 삼아야 할 것은 ①도 ②도 ④도 아닌, ‘③’이다. 우선 ③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다른 무엇보다도 대통령을 노릴 정도의 정치지도자급 반열에 오른 정치인이라면 결코 가져서는 안되는, 가지면 결코 정치지도자라 할 수 없는 그런 사안이기 때문이다. 즉 ③은 정치지도자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인간관과 공동체관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③과 같은 시각에서 국민들을 이해하는 정치인은 결코 정치지도자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세계 10위권에 달하는 경제규모로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20-50 클럽(국민소득 2만불과 인구 5000천 만이 넘는 나라군)’에 가입한 ‘클만큼 큰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정치인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조차) 지금 시대의 당면 과제가 되어버린 ‘인간존중의 미래를 결코 열 수 없는 정치철학의 극심한 빈곤’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시대를 경과하면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것, 보릿고개로 상징되었던 절대 빈곤을 극복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자체도 세계 최고의 ‘저임금-장시간 노동’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이 되지 않는 노동자와 서민의 고통스러운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절대 빈곤의 탈출 그 순간부터 다수 서민이 직면해야 했던 현실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점차적 심화였다.5) 그리고 그 불평등의 정도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해소되었던 것은 민주화 이후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가 한창이던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였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상황에서 결성된 민주노조 운동이 지난한 투쟁을 통해 권력과 자본의 양보를 끌어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박정희 시대 그 자체가 노동자를 비롯한 다수 서민의 삶을 향상시켰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심각한 문제는 인간에 대한 이해 방식이다. ③이 전제하고 있는 시각은 인간을 단지 (아주 부정적 의미에서) ‘경제적 동물’로 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간이 경제적 보상을 대가로 인권유린을 묵인했다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다수 노동자들과 서민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지성을 돈 몇 푼에 인권을 내다버릴 정도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라. 과연 다수의 서민들이 바랐던 것이 ‘돈’이었던가. 또 결국은 임금인상 협상으로 덧칠되어 있으나, 1980년대 말 터져나왔던 노동자들의 요구가 돈이었던가. 그들은 ‘인간 해방’을 기치로 삼았으며,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쳤다. 게다가 경제적 형편의 나아짐이 삶의 질의 향상과 등치될 수는 없다. 만약 그리 본다면 그것은 정말 정치철학의 빈곤이 아니라, ‘인간적 천박함’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다수의 ‘서민’은 공동체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이 인권을 유린함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머물러 살기는 한다. 경제성장, 국익수호 등과 같은 이러저러한 명분에 기댄 고통분담의 미명에 희생을 강요당하며 사실은 고통을 전담하고 있을 때에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것은 ‘탈주의 비용’ 혹은 ‘대안창출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지, 얼마 되지도 않는 경제성장의 부스러기에 만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또 연명이나마 가능케해주는 그 부스러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한 공동체라도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박근혜에게 5·16 군사쿠데타의 평가를 묻는 이유
백 번 천 번 양보하여 대한민국 노동자와 서민이 ‘돈’을 바랐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정치지도자는 인간에 대한 그런 관점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가서는 안 된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철학자들은 물론, 존 롤즈와 마이클 센델 같은 정의론자들도 간파했듯이 누군가 -특히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그것도 공평치 못한 희생을 강요하는 공동체는 어떤 의미에서도 정의롭지 못한 공동체이다. 도덕적 정의의 관점에서만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약자의 희생을 담보로 강자의 탐욕을 채우는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는- 정의롭지 못한 공동체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6) 꼭 쇠락의 길을 걷게 되어 있다. 세계 최강대국에 오르긴 했으나, 인간을 공리주의의 화신으로 보며 국가가 정의로운 공동체 만들기에 소극적이었던 영국이나, 무한경쟁에서 승자독식을 향해 돌진하는 개인의 끝 간 데 없는 탐욕을 자유라고 소리치며 결국 걷잡을 수 없는 불평등의 현실에 서 있는 미국이 처한 현실을 잘 봐야 하는 것이다. 미국은 존 롤즈나 마이클 센델 같은 저명한 ‘정의론자’들을 배태했지만 그만큼이나 -정의를 애써 고민하고 내세우며 설파해야 했던 만큼-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현실은 정의로운 공동체 건설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의로운 공동체는 결코 인간에 대한 경제적 이해, 즉 효율과 결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적 이해나 혹은 자유경쟁에서 승리한 자의 철학으로 귀결된 자유주의적 이해에 기반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박근혜 후보가 진정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역사평가에 이와 같은 ‘인간에 대한 이해’의 문제가 담겨 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바탕해 정의롭게 만들어갈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박근혜 후보는 대선행보 과정에서 복지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시금 인간에 대한 ‘경제적’ 이해에 바탕한 것이어서는 결코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없다. 최근 박근혜 후보는 전태일 재단 방문 시도와 전태일 열사 동상에 헌화를 가는 등의 ‘파격행보’를 선보이고 있다. 더 파격적인 행보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국민통합’을 명분으로 한 행보이다. 하지만 진정 국민통합을 위해서라면 산업화 과정에서의 희생자들이 왜 자신의 그러한 행보에 오히려 상처받고 모욕받았다고 느끼는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왜 ‘약자의 가슴을 후벼파는 서슬 퍼런 칼날’이 되는지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자신에게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평가를 묻는 것이 결코 ‘아버지에 대한 소회’를 묻는 것이 아님을,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의 비전에 대해 묻는 지극히 ‘미래지향적’ 물음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이런 의미에서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로 호명하며, 그래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관계 여부를 떠나 정치적이지도 설득력도 갖지 못한 언사다). 이러한 자각이 없다면 (야당의 대통령 후보도 마찬가지이지만) 결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설사 되더라도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 그런 자각을 박근혜 후보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를 떠나, 그러한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대통령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 덧붙이는 말
-
1) 박태순·김동춘, 「군부의 등장과 사회변동의 양상」, 『1960년대 사회운동』, 까치, 1991 참조 2) 김수진, 『한국 민주주의와 정당정치』, 백산, 2008 참조 3) 『사상계』 96호, 1961 참조 4) 「박정희 정권의 재평가:개발독재 바람직했나?」, 『해방 50년의 한국정치』, 새길, 1995 참조 5) 최장집, 『한국 현대정치의 구조와 변화』, 까치, 199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