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만 유독 성폭력문제가 심각한 것인가?
성폭력은 특정 계층, 연령, 사회, 국가에 관계없이 광범위하게 만연된 인권침해이기 때문에 성폭력이 우리 사회만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유엔 사무총장의 2006년 보고서는 여성폭력의 본질적인 원인이 남성과 여성 간의 오랜 불평등한 차별에서 비롯되며, 가부장적 권력 격차, 차별적인 문화규범과 경제적 불평등이 여성인권을 침해하고 폭력을 유발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역사적으로 지속되었던 남녀 간의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여성폭력을 낳았으며, 남성의 여성 지배와 차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여성이 차별과 폭력에 더 취약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던 유엔의 여성폭력철폐선언과 같은 맥락이다. 여성을 남성의 종속된 존재로 여기거나 성역할이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성별 고정관념을 용인하는 사회문화 속에서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보호와 통제의 한 형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성폭력은 여성들의 자유와 평등, 인권을 박탈하는 정도를 보여주는 사회지표가 된다.
여성과 아동이 쉽게 폭력의 대상이 되는 성차별적 구조의 산물
소아성기호자나 정신병력자, 우범가능성이 높은 특정 그룹에 의해 저질러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성폭력은 피해자의 주 생활공간이나 일상에서 아는 사람, 특히 피해자보다 권력을 더 가진 존재에 의해 일어난다. 2011년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상담통계를 보면 성폭력은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전체 1151건 중 980건으로 85.1%이다. 피해 연령별로 살펴보면 성인은 직장 내의 관계에 있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가장 많고, 청소년은 학교 내의 관계에 있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가장 많다. 어린이와 유아의 경우 친족, 친인척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대부분이다. 인간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권리가 인정되는 존재는 성폭력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직장, 가정이나 친족, 학교, 군대 등 대부분의 집단에서 성폭력은 권력이 없는 취약한 대상에게 집중된다. 음담패설, 일상화된 성매매, 취약한 사회복지체계로 인한 여성과 아동의 가장에 대한 경제적 의존, 높은 비정규직 비율과 같은 여성 일자리의 취약성, 권리의 주체가 아닌 통제의 대상인 아동과 학생의 지위, 보호와 배려가 아닌 배제의 대상인 사회적 소수자의 주변성,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좀 더 취약한 대상에게 성적인 폭력을 쉽게 가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을 높인다. 언론에 보도되는 심각한 성폭력에 대해서는 가해자를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해야 한다며 분개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이유는 성적인 폭력과 젠더적 폭력이 결합된 일상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일상의 성폭력에 관한 사회적 통념은 매우 강하다. 피해자에 대해서는 ‘여자들의 야한 옷차림이 성폭력의 원인이다’‘성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 최선책은 여자가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다’‘여자가 끝까지 저항하면 강간은 가능하지 않다’는 등 성폭력의 원인을 피해자로 돌린다. 가해자에 대해서는 ‘성폭력은 남자들의 억제할 수 없는 성충동 때문에 일어난다’ ‘강간은 소수의 비정상인들이 저지른다’‘대부분의 성폭력은 모르는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는 등, 성폭력 동기를 범의가 아닌 욕망으로 정당화하고 가해자의 범주를 축소한다. 성폭력피해자들은 범죄 피해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과 주변의 비난에 시달린다. 반면 가해자들은 살인을 하거나 심각한 상해를 입힌 범죄적 성폭력이 아닌 한 ‘사소한 실수’로 재수 없이 걸렸다거나, 술에 취해서 모르고 그랬다거나,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거나 피해자가 합의금을 받아내려는 꽃뱀이라거나, 다양한 변명으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 결과 수많은 일상의 성폭력이 개인의 잊히지 않을 고통스런 경험으로 묻혀버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 처벌에 몰두하는 반(反)성폭력 정책이 범죄예방에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데 비해 범죄의 신고율이 10% 내외에 불과한 현실은, 정부가 '처벌받아 마땅한 가해자'의 형벌강화에 집중하더라도 처벌받지 않는 90%의 대다수 가해자들이 어떠한 사회적 제재도 받지 않은 채 성폭력을 반복할 가능성을 높인다. 이마저도 기소비율 50%, 유죄판결률 40%인 상황이라 성폭력범죄의 형량을 강화하고 신상공개와 화학적 거세의 대상을 소급적용한다 한들, 성폭력범죄를 막기는 어렵다. 100명의 가해자 중 두어 명 정도에나 적용될 정책으로 터져나오는 범죄의 봇물을 틀어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성폭력상담은 성폭력사건에 대한 상담이 아니라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여성에게 전가되는 수많은 편견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의 발언은 성폭력의 보편성을 넘어서는 우리 사회의 특수한 성폭력 작동기제와 재생산구조를 보여준다. 따라서 반성폭력 정책은 일상에서 작동하는 젠더권력과 여성의 취약성을 강화하는 차별적 사회구조의 통찰에 기초하여 성별규범에 대한 사회적 인식체계를 바꾸고 여성과 소수자 인권존중과 권한강화가 가능한 사회로의 변화를 꾀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여성폭력이 차별의 시정과 평등 및 권한 강화, 여성의 인권발현을 통해서 해결 가능하다는 유엔의 공식적 입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좀 더 근본적인 정책방향의 변화 속에서만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처벌 정책이 구체적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사회적 범죄화하기 위한 더 많은 노력 필요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5일 성폭력에 관한 형법의 제 규정과 성폭력관련법의 개정을 권고했다. 권고문은 성폭력이 기본적으로 ‘정조에 관한 죄’가 아닌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에 관한 죄’임을 분명히 하면서, 강간에 관한 협소한 규정과 친고죄 폐지, 장애인의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 등의 내용을 두루 담고 있다. 이보다 앞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법안심사소위는 성인 성폭력범죄에 관한 친고죄 폐지를 심의했다.
성폭력특별법의 제정과정과 그 이후, 반성폭력운동단체들은 강간을 정조의 침해로 보고 보호받을 만한 정조를 기준으로 성폭력 피해를 위계화하며, 협박, 폭행의 정도가 저항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심대하여 성폭력을 당하지 않기 위해 피해자가 죽도록 저항했는지 여부에 따라 강간과 추행을 인정하겠다는 성폭력 관련법의 기본법인 형법의 이념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형법개정을 통하여 성적 자기결정권을 성폭력의 판단기준으로 하는 사회적 합의와 형사사법체계가 확고히 뿌리 내리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폭력특별법의 형량과 처벌이 아무리 강화돼도 피해자는 여전히 피해자임을 인정받기 어렵고, 가해자 역시 높은 형량은커녕 피해자와의 합의를 통해 기소조차 되지 않거나 다양한 작량감경의 요소를 적용받아 집행유예나 낮은 처벌만을 받게 되는 문제적 상황을 해결하기 어렵다.
성폭력사건의 처벌률이 낮은 것은 상당부분 친고죄에서 기인한다. 친고죄는 피해자의 사생활과 명예를 보호하기 위하여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범죄의 공소제기 여부를 결정할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친고죄는 성폭력을 감추어야 할 피해자의 사생활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사회적 통념을 확산시켰으며, 피해자의 신고포기로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형사사법의 공백을 초래했다. 2012년 전국 형사법관 포럼 자료에 의하면, 2009년 전체 성범죄의 32.1%, 13세 미만의 경우 4.4%, 19세 미만의 30%가 공소권 없음의 불기소 유형이었다. 친고죄 규정이 적용되는 경우일수록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이 되는 비율이 높은데, 공판단계에서 고소 취하로 인해 공소기각 판결로 종결되는 경우까지 합하면 그 비율은 더 높아진다. 피해자가 가해자와 합의하고 고소를 취하하면 형사절차가 종결되는 친고죄의 특성상, 피해자는 가해자 측의 무리한 합의협박에 시달리고, 합의금을 목적으로 한 ‘꽃뱀’으로 몰리게 되는 경우도 많다.
형법개정을 통한 성폭력 관련 법체계의 근본적 정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온 지 거의 18년 만에 성폭력이 무엇이며, 왜 범죄화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근본적 성찰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전기가 마련되고 있다. 이러한 계기가 지난 수년 동안 반복되었던 성폭력범죄로 인한 심각한 희생의 결과라는 점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땜질식 처방에 몰두해온 우리 사회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성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
성폭력이 인권침해인 한 여성폭력을 예방, 철폐, 처벌해야 할 책임은 국가에 있다. 이는 인권을 존중, 보호, 증진, 이행해야 할 당사국의 의무에서 비롯된다. 국가가 폭력가해자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면, 전 사회적으로 더 심각한 학대를 조장하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는 분위기를 심어줄 수 있다. 그러한 면책의 결과는 개인피해자나 생존자의 정의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불평등을 조장한다.
따라서 정부는 여성폭력에 대처하기 위한 국내법과 정책의 실행에 있어 국제적 기준과의 격차 해소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여성이나 아동, 다양한 성적 정체성을 가진 사회구성원을 성에 근거한 폭력과 차별의 악순환으로부터 분리하고 이들이 능동적 권한을 소유한 시민임을 인정해야 한다.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실질적 시민권 보장은 차별과 인권침해로부터의 방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는 반성폭력 정책을 수립함에 있어 여성의 특정경험을 반영하고 성폭력에서 자유로울 여성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시민사회와의 거버넌스에 힘써야 한다. 성폭력 정책을 둘러싼 거버넌스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과 소수자가 처한 특정상황과, 이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양산하고 강화하는 다양한 요인을 고려한 다양한 전략과 효과적인 실행방안 마련을 용이하게 할 것이다.
소수자의 취약성이 보호의 근거가 아닌 배제의 근거가 되는 사회, 연령과 학벌과 성별의 위계가 분명한 사회,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상사와 부하, 교사와 학생, 선배와 후배, 국가와 국민의 역할관계가 권력관계로 등치되는 사회에서 개인의 존엄성이나 차이를 인정하는 인권을 기대하기 어렵다. 성폭력의 근절과 예방에 여성뿐만 아니라 시민사회가 나서야 하는 까닭이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