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투마요의 농부들은 자신들은 바퀴벌레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이 저지른 죄라곤 코카라고 불리는 작은 관목을 재배한 것 뿐이었다. 나는 그것들 중 일부를 봤다. 아무런 해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코카 잎을 씹어보기도 했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코카 잎이 매우 영양가 높고, 안데스의 광부들이 수세기 동안 등이 부서질 것 같은 노동을 견딜 수 있게 해줬다는 사실을 안다.
당시 여행에서 나는 콜롬비아의 미국 대사관도 방문했다. 대사관 직원은 우리에게 그들이 농부들에게 뿌리는 화학제품들은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또한 미국이 콜롬비아에게 13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는 대신 콜롬비아는 미국산 군사용 헬리콥터를 구매한다는(비록 콜롬비아가 네 배 더 많은 돈을 지출해야 했지만) '플랜 콜롬비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헬리콥터들은 콜롬비아 농부들을 소독하는 비행기도 포함된 것이었다. 이는 미국인들의 코카인 흡입을 막아 줄 거라 예상되었다.
그 무관은 우리에게 아편과의 전쟁에서 대게릴라 전쟁으로 옮겨갈 것을 고려 중이라고말했다. 알다시피, 콜롬비아 게릴라는 대중적인 지지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면서 말이다. 게릴라들은 마약 판매자금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농부들에게 소독약을 살포함으로써 사실상 게릴라들의 돈줄을 말려 그 나라의 평화에 기여하는 동시에 미국 아이들을 마약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준군사조직(민병대)에 대해 물었다. 이 군벌들은 그 나라 전역에 분포한 수천 여명의 무장세력으로 콜롬비아군대와 매우 밀접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수백만 명의 콜롬비아인들을 학살하고, 강간하고, 내쫓았다. 그들은 농부들을, 토착민들을, 아프리카계 콜롬비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고문한 뒤 지역에서 내몰았다. 그들은 노조운동가, 인권활동가, 기자들을 살해했으며 사회진보를 위한 활동을 했다고 의심되면 누구나 게릴라라는 딱지를 붙였다.
준군사조직 지도자들이 실토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또한 마약 거래에서 수입의 70%를 거둬들이는 마약 매매업자들이었다. 그들은 콜롬비아 정부와 군의 보호를 받지 않고는 그런 살인을 저지를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이 아편과의 전쟁과 대게릴라 작전에서 지원해 준 바로 그 콜롬비아 군대 말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끄집어낸 이유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이다. 마약 작물이나 약품과의 전쟁을 하고자 하는 정부는 어떻게 성공 여부를 판단할까? 만약 그 핵심이 마약에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단지 마약 가격과 마약 카르텔의 이윤만 올려주었을 뿐이다.
만약 게릴라들을 분쇄하는 것이었다면, 게릴라들은 납작하게 엎드려 지난 몇 년을 보낸 게 다였다. 그들은 여전히 상당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포기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들은 건재하다. 그들은 여전히 상당한 군사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매우 넓은 지역에서 활동 중이다. 그들은 군대가 없는 지역으로만 다닌다.
반면, 민중들을 풍요로운 땅에서 쫓아내고, 노동운동을 파괴하며, 국영석유회사 같은 경제의 핵심적인 부문들을 다국적 기업에게 넘겨주는 것이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라면, 그 작전은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리고 지금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오늘날 준군사조직들은 다시 원상회복하고 있는 중이며, 민중들을 학살한 대가로 사면과 보조금이라는 보상을 받았다. 가장 최근에 추정한 바에 의하면 콜롬비아 의회의 3분의 1이 준군사조직들의 통제를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대통령 차례다.
플랜 콜롬비아는 한 가지 기준(마약과의 전쟁이나 평화 회복)에서 보면 실패이고, 다른 기준(산업과 영토를 다국적기업들에게 넘겨주는 것)에서 보면 성공이었다. 겉으로 내세우는 목적에 우롱당하지 말자. 그것(플랜 콜롬비아)은 마약이나 반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자, 지금부터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 헤로인의 90%를 공급한다. 캐나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마약과의 전쟁 및 대게릴라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캐나다가 상대해 싸우고 있는 마약은 물론 점령의 산물이다. 그 마약들은 그 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군벌들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동맹을 맺은 나라들의 산물이다.
또한 캐나다 혹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기와 기만의 산물이다. 그리고, 농부가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현금을 만질 수 있게 해주는 이 작물을 통해서라는 현실의 산물이다. 물론 그 현금이란 건 불과 몇 푼 안 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양귀비를 재배하거나 콜롬비아에서 코카를 재배해 부자가 되었다는 농부는 한 명도 없다.
그 대신, 그 돈은 서구의 은행에, 그리고 우리 모두의 손에 있다. 나의 콜롬비아 친구인 마누엘 로젠탈은 이런 얘기를 할 때면 20달러 짜리 지폐를 꺼내 사람들 중에서 그 돈이 마약을 판 돈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있냐고 묻곤 한다. 그 돈이 돈세탁을 거친 거라면 말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아니,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캐나다는 점령의 산물인 마약과 싸우고 있는 셈인데, 그 이유는 미국과 캐나다가 점령하기 전에 그 나라를 통치했던 탈레반이 양귀비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탈레반을 칭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음악과 스포츠와 텔레비전과 웃음도 금지시켰다. 그것은 양귀비에 의존하고 있는 아프간 인구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는 230만 명의 생계를 해결할 없다.
마약 문제의 해결책은 명확하고 충분히 알려져 있다 - 중독에 대한 치료, 법제화와 통제, 농업 경제를 위한 통제와 지원이 그것이다. 우리의 기억력이 짧고 뚜렷한 커넥션을 알 수 없는 한, 우리는 마약과의 전쟁이 단지 유용한 핑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마약과의 전쟁은 이 정도만 얘기하자. 사람들이 관심이 있다면 나중에 다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대게릴라 전쟁에 대해 이야기해봐야 할 것이다.
캐나다는 어떻게 대게릴라 전쟁에 연관되게 되었을까? 무슨 목적으로 캐나다 정부와 군이 2,200명의 군인들을 그 곳에 보냈을까? 이는 어떻게 통과되었을까?
위선에서 표류하다
캐나다의 외교정책은 종종 위선에 기반해왔다. 아, 수많은 일련의 일들이 있다. 캐나다의 지도자들은 항상 서구인으로서 서구가 연관된 전쟁에 관련되어 왔다. 식민지 전쟁을 포함해서 말이다. 아니, 특히 식민지 전쟁에서 그렇다. 선주민들과 캐나다라는 국가의 관계는 식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캐나다가 강대국 편에 서고 세계 민중들에게 모욕을 안겨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캐나다는 또한 식민주의 역사가 없고 정직한 평화의 중개국이자 수호국이기 때문에 전 세계의 신뢰를 받을 가치가 있는 나라라는 인상을 심어주려 애써왔다.
어떻게 우리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고, 미국과 이스라엘을 지지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후환을 두려워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퍼(역주;스티븐 하퍼. 올 초 집권한 보수당 출신의 캐나다 현 총리)의 최근 발언들은 새로운 것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폴 마틴을 예로 들어보자. 1965년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마틴은 하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은 시범 케이스이다. 나는 중국의 묵인 하에서 북베트남의 침략이 성공한다면 다음 희생자가 선택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일 것이다... 미국이 현재 시점에서 베트남을 떠난다면, 누가 그 다음 희생자가 될 것인가?"
어쨌든 그것은 폴 마틴의 이야기다. 레스터 B. 피어슨은 이미 1950년대에 프랑스를 상대로 한 베트남인들의 "침략"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공적인 외교였다. 캐나다는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전쟁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기구인 국제통제위원회(the International Control Commission)에서 미국의 대리인처럼 행동했다.캐나다는 또한 그 전쟁-인도차이나를 통틀어 2백만에서 5백만명이 숨진-의 병참센터이자 훈련장이었다. 캐나다는 공급기지이자 외교적 후원자였고, 훈련장이었지만 식민지 전쟁에서 직접적인 군사적인 참여에서는 꽁무리를 뺐다.
그것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캐나다는 미국과 경제를 통합하는 '자유무역'협정을 채택하는 절차를 밟고 있었다. 신자유주의는 다른 나라들을 미국에 대해 취약하게 만들고 의존하게 만들었다. 일정 정도의 독립성을 추구하는 엘리트 집단의 힘은 약해졌다. 맞서 싸우려던 사람들은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
다음은 같이 나누어봐야 할 그 시기의 캐나다 외교 정책에 대한 세가지 이야기들이다.
1980년대로 돌아가보면, 팔레스타인과 적대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캐나다의 지지에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다. 1948년 팔레스타인인들이 추방되던 초기에, 캐나다는 영국의 입장을 따랐다. 1967년 이스라엘이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한 동안에는 미국을 따랐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할 무렵, 그리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1차 인티파다를 진압할 무렵에는 일부 캐나다의 지도자 - 트뤼도와 클라크(역주: 트뤼도는 자유당, 클라크는 진보보수당 출신 전 총리) -는 실제로 이스라엘을 비판했다.
그러나, 1990년대 오슬로 협정이 팔레스타인에 엉터리 "평화"를 가져다줄 무렵엔 다시 위선적인 역할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평화"를 지지하고, 비공식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면서, 그리고 점점 공식적인 이스라엘 지지로 나아가면서 말이다.
1990년과 1991년, 멀로니 총리는 부시가 이라크를 파괴하기 시작했을 때 냉큼 미국의 편을 들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 시절 일이다. 캐나다의 전투기와 함정들은 비교적 방비가 허술한 이라크 군대와 완전히 무방비 상태의 이라크 민간인들을 폭격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작전으로 수십만 명이 살해되었고 수십만 명을 더 죽음으로 몰고간 제재가 뒤따랐으며 캐나다도 그 제재에 참여했다. 그 제재 뒤에는 십만 명 가량이 숨진 또 한번의 침공이 이어졌는데, 그 추정치는 비교적 보수적으로 잡은 것이며 그다지 최신 통계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2003년 침공에도 다시 그 곳으로 되돌아갔다.
1993년, 캐나다 공수연대는 소말리아로 파병되었다. 이것은 기억해야할 가치가 있다. 여기서도 캐나다는 미국 편에 섰다. 미국은 "희망을 되찾기 위해" 그 곳에 갔고 수치스럽게 그 곳을 떠나기 전에 작전 과정에서 수백 명(혹은 수천 명)의 소말리아 인들을 죽였다. 캐나다는 그 작전을 함께 지원했다. 이 이야기는 잘 알려진 것이다. 소말리아는 "실패한 국가"였다. 캐나다는 악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캐나다는 벨렛 후엔(Belet Huen)이란 마을에 기지를 세웠다. 비참할 정도로 가난한 나라, 모든 것이 절망적일 정도로 부족해 사람들이 굶어죽어가는 나라의 한가운데에 제대로 된 설비를 갖춘 기지를 건설한 것이다. 그사람들 중 일부는 기지로 몰래 들어와 물품들을 훔치기 시작했다. 캐나다인들이 그들을 가둘려고 했다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가둬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벌을 가했다. 무장한 경비병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그들을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게 하는 수치심 유발의 처벌이었다. 그들을 꽁꽁 묶어 때리기도 했다. 그들을 향해 총을 쏘기도 했고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결국, 16살 난 소년이 밤새 그런 처벌을 받다가 숨졌다. 한 캐나다 군인에 의해 목이 묶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그 아이의 이름은 시단 아론(Shidane Arone)이다. 원한다면 그 아이의 사진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부 그라이브의 사진들을 봤을 때 맨 먼저 그 아이의 사진을 떠올렸다. 그 사진이 나올 무렵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여러분들이 아프간에서의 캐나다의 역할에 대한 논쟁과 토론 기사를 읽는다면, 여러분들은 캐나다 군인들이 "게릴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잡았을 때 그들이 겪는 도덕적인 딜레마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이다. 캐나다 군인들이 그들을 아프간 정부로 보내면 고문을 당할 지도 모르는데 그들을 인계해야 하는가? 가장 급진적인 평론가들은 고문에 대한 미국의 행적에 비춰봤을 때 미국에게 그들을 인계해서는 안된다고 감히 말한다. 그러나 그럼 캐나다 군인들은 그들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캐나다의 시사평론가들은 "소말리아 사태"를 캐나다인들에게는 국가적인 상처로 이야기한다. 그것은 자기중심주의이다. 우리는 희생자들보다는 우리 자신에 초점을 맞춘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위선을 벗어던져라
그것은 캐나다의 대외 정책에 있어서 위선의 시기였다. 그 시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가장 최근에 일으킨 발작증세는 2003년에 이라크를 두 번째로 파괴한 것이었다. 캐나다는 전쟁을 위한 보급 기지이자 훈련장이면서 동시에 외교적인 지지자로서의 역사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지금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동맹국들로부터 더 많은 것들을 원했고 그것은 캐나다가 '(그동안의)방어막을 걷어야한다'는 것을 뜻했다. 어떻게 '방어막을 걷었는가'?
맨 처음에는 아이티인들의 시체 위에서-이에 관한 이야기는 시간관계상 여기서 하지는 못하겠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 레바논인들, 아프가니스탄인들의 시체 위에서였다. 캐나다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대단한 건 아니었다. 2만여 명의 미군을 포함한 3만 6천여 명의 아프간 주둔 군대에 2천 2백 명의 병력을 보태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마 그 길이 '방어막을 걷어내는 길'이리라.
캐나다가 위선을 벗어던지면서 한 첫 번째 행동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동참한 것이었다.그러나, 최근까지 캐나다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작전이 소말리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순수한 평화유지 활동인 것처럼 가장했다.
위선을 벗어던진 두 번째 행동은 2004년 12월, 부시가 오타와를 방문하고 난 이후에 취해졌다. 어쨌든 그건 부시의 똘마니 같은 짓이었다. 이전에 캐나다는 이스라엘이 국제법에 따른 의무를 이행하고 1967년 점령한 지역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하는 몇차례의 표결에서 기권표를 던졌었다.
당시 유엔 주재 캐나다 대사 알란 록은 유엔의 의제에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명시하려고 애쓰던 위원회들의 "덧붙여진 진의"가 "의심스러우며" 그러한 절차가 이스라엘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발언했다. 그 뒤 캐나다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권리에 반하는 표를 던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 6개월 뒤인 2005년 7월에 캐나다의 수석국방참모인 릭 힐리어는 화려한 수사로 "평화유지"와 "실패한 국가"에 대해 역설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캐나다 군인들을 받아들이는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아주 역겨운 살인자들이고 인간 쓰레기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자유를, 사회를 혐오한다... 우리는 캐나다 군인들이고 우리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 힐리어는 우리가 평화를 유지하고픈 순수한 사람들이라는 캐나다인들의 신화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캐나다가 유혈이 낭자하고 잔혹한 대게릴라 작전에 참여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런 발언을 한 것이다. 하퍼 총리처럼 그는 그같은 강경한 발언을 통해 사람들이 유혈사태를 점점 용인하고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하퍼 총리는 보수파가 집권하기 전에 자유주의자들이 이런 움직임을 보이도록 분위기를 잘 만들어나갔다. 올해 초에 집권하자마자 그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치른 선거를 이유로 그들을 재정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역자 주;팔레스타인 총선으로 하마스가 집권하게 된 것을 일컬음) 팔레스타인에 대한 일체의 원조를 삭감한 첫 번째 총리가 되었다. 올 여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발전소를 파괴하고 폭격으로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갈 때도 하퍼 총리는 "계산된" 반응을 보였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의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헤즈볼라에 의한 (이스라엘) 군인들의 희생이 커지자, 피터 맥케이는 저항세력을 "냉혹한 살인자들"이자 "레바논의 암적 존재"라 불렀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여러분들은 지난 몇 년간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캐나다는 더 이상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다. 캐나다는 공공연히 식민주의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캐나다는 이 식민주의 전쟁을 자신들의 전쟁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캐나다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제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됐는가?
하나는 억압받는 사람들으르 공격하는 것에 대해 관대해지고 너그러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슬로 협정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이 협정을 이행하기를, 정착촌을 철수하기를, 점령자이자 식민 지배자로서의 행동을 멈추기를 7년간 기다렸다. 그들은 현재의 인티파다가 시작되기 전에 7년을 기다렸고, 6년 전 샤론 전 총리가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했을 때도 가장 격렬한 반발은 일주일이 채 가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도 인내하고 있다.
힐리어가 2005년 7월에 그런 강경한 발언을 했을때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참고 기다렸다. 점령군에 의한 끔찍한 만행들이 있었다. 고문과 무차별적인 폭격이 이어졌고 계속해서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러나 아프간인들이 이미 수많은 고통의 시간을 보냈고, 개발과 안전에 대한 약속들이 진지한 것이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정치를 믿었고, 무장해제가 실제로 진행될 거라 기대했고, 상황이 나아지기까지 많은 것을 기꺼이 희생했다.
그러나, 개발에의 약속은 헛된 것이었다. 2001년 이래, '국제사회'는 군사작전에 825억 달러를 썼지만, 구호와 개발에는 73억 달러만을 썼을 뿐이다. 캐나다의 통계도 마찬가지로 왜곡된 것이었다. 캐나다의 개발원조 금액은 수억 달러에 달했지만 그 중 대부분은 사용되지도 않았다. 반면 군사예산은 수십억 달러에 달했고 계속 증가하고 있다.
아프간 중부에 번듯하게 지어진 기지의 존재가 어떻게 도둑질과 그에 따른 만행과 고문으로 이어졌는지를 기억해보라. 팀 호튼(역자 주;캐나다에서 가장 대중적인 까페 이름)이 들어선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는가? 그것은 얼마나 모욕적인 짓인가?
우리는 하루 건너 두 명, 세 명, 네 명의 캐나다 군인들이 사망했다는 보도를 접한다.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여러분은 수십 명의, 수백 명의 "탈레반으로 의심되는 사람들"도 미군의 공습과 캐나다의 "소탕작전"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올 초 앤드류 레슬리 소장이 "여러분이 외국에서 한 명의 성난 젊은이를 죽일 때마다 여러분은 열 다섯 명의 사람들이 여러분 뒤를 따르게 하는 셈이다"라고 기자들에게 한 말을 기억하라. 우리는 그걸 계산하고 있는가?
글쓴이 : 저스틴 포두르(Justin Podur)
출처 : Znet (2006년 9월)
원문 : Abandoning Hypocrisy
옮긴이 : 최재훈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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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Znet
원문: Abandoning Hypocri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