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리반, 탈리반 또 그 놈의 탈리반 이야기구나. 에이그 야, 이제는 지겹다, 탈리반. 아야, 느그들은 절대로 그런 데 가지 말거라. 그런 데 가면 고생하고 위험하다.”
라디오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탈리반이니 아프가니스탄이니 이야기를 하니까 매일 라디오를 틀어놓고 장사 일을 하시는 할머니는 탈리반 소리만 나와도 듣기 싫으셨을 거다. 매번 전하는 소식이 좋은 소식도 아니니 더더욱 그럴 수 밖에. 납치된 사람들이 하루 빨리 무사히 풀려나길 바라면서도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할머니만이 아닐 거다.
▲ 아프가니스탄 지도 |
그런데 나는 뉴스를 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좀 다른 걱정이 든다. 뉴스에서 아프가니스탄이라며 보여주는 영상은 총을 든 무슬림 남성들이 사막을 돌아다니는 장면뿐이고, 사람들은 지난 7년 동안 미국과 나토 점령군의 침공으로 사망한 수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납치 사건의 결말과는 상관없이 한국 사람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은 테러리스트와 비인간적인 납치범들이 사는 이상한 나라로 기억될 것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이 전쟁으로 어떠한 고통과 피해를 받았고, 아프간 사람들이 새로이 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 같다. 내가 한국 사람들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인터넷 뉴스에 몰상식한 댓글을 다는 ‘네티즌’들을 위해서라도 아프가니스탄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세계 지도를 펼쳐 보면,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과 이란, 우주베키스탄, 투르쿠메니스탄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수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를 잇는 대륙의 교차로 역할을 해왔다. 우리가 세계사 책에서 봤던 유명한 정복자들-알렉산더 대왕, 징기스 칸 등-은 한번씩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지배했었다.
아프가니스탄이 지금과 같은 하나의 국가를 갖추게 된 것은 1747년 아프가니스탄 토착민 출신의 지도자 아마드 샤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역 대부분을 관할하는 하나의 국가를 세우면서부터 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점령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한국이 위치적으로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고 반으로 갈라질 운명이었던 것처럼 아프가니스탄도 끊이지 않을 침략과 분쟁과 멀어지기 힘든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 정복자 혹은 침략자에게 아프가니스탄은 차지하지 않으면 안될 노른자 땅이었다.
19세기 초, 러시아와 영국은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놓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경쟁을 벌인다. 영국은 지금은 파키스탄이 된 당시의 인도 북쪽으로 통치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친 영국 성향의 지도자를 앉혀 아프가니스탄이 영국에 종속시키려 하였다.
영국의 압력으로 쫓겨났던 왕은 아프간 사람들의 봉기로 다시 자리에 올랐으나 1957년 아프가니스탄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 영토 일부를 양도받고 카불을 점령했으며 드디어 친 영국 성향의 왕을 세웠다. 그리고 1907년 러시아와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외교권을 영국의 영향 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을 합의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1919년이 되어서야 외교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중립을 지켰으나 2차 대전에서는 연합군에 합류하였고, 2차 대전 후 아프가니스탄은 1970년대 후반까지 미국과 소련의 원조를 모두 받으며 위험한 중립을 유지하게 되었다.
위험한 중립이란 말 그대로 정말 ‘위험한’ 중립이었다. 미국과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이 ‘중립’을 지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은 미국과 소련이 지원하는 국내 권력 쟁탈전에 휘말렸다. 참견은 배를 산으로 가게 한다. 배가 산으로 가면 산산이 부서져 일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1970년대 초에 아프가니스탄의 젊은 무장 그룹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는데, 1978년에는 소련과 더 가까운 사이였던 막시스트 그룹(인민민주당)이 대통령과 수상을 탄핵하고 권력을 잡았다. 다음 해에 인민민주당을 이끌던 누르 모함메드 타라키가 살해되고 하피줄라 아민이 권력을 잡자 소련은 곧바로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파견하여 아민을 암살하였다. 그리고 소련이 지원하는 바라크 카말이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
▲ 아프가니스탄에 건조한 사막만 있는 것은 아니다 |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토지 개혁과 여성 평등 등의 정책을 펴는 인민민주당 정권의 사회 정책에 반대하는 여론이 증가하고 있었다. 무슬림 대중이 그들의 정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79년부터 사람들이 널리 ‘무자히딘(이슬람전사)’라고 부르는 게릴라 반군이 아프가니스탄의 많은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아프간 정부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다. 미국은 소련에 맞서 파키스탄과 함께 적극적으로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반하는 군벌과 이슬람 주의자들을 지원하였다. 이 전쟁은 1989년까지 10년 동안 이어졌다.
소련이 무너진 후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게릴라 반군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잃었다. 1992년 초, 게릴라들이 카불을 통제하였고 게릴라 연합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여러 게릴라 조직들의 파벌 싸움이 계속 되었고 아프가니스탄은 결국 지역별로 각각 통치자를 갖고 있는 여러 독립된 지역으로 분할되기에 이른다.
1994년에 우리에게 익숙한 탈리반이 등장한다. 탈리반은 아프가니스탄 남동부와 파키스탄 북서부에 사는 파슈툰 민족 출신의 이슬람 근본주의 학생 조직이다. 이들은 급속하게 세력을 넓히며 카불을 장악하였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Islamic Emirate of Afghanistan)을 선언하였다. 당시 탈리반이 통제하는 지역은 전체 아프가니스탄의 2/3 정도였고 탈리반은 이 지역에 엄격한 형태의 이슬람 법을 공표하였다.
이때까지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 정권이 여성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펴든 말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1998년에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 폭파사건이 일어나고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배후로 지목하여 오사마 빈 라덴이 지도하는 대규모 테러리스트 훈련 장소를 파괴시킨다며 카불 근처에 미사일 공격을 가했다. 왜 미국이 오랜 친구였던 오사바 빈 라덴을 저버렸는지 그 속내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 미국 정부는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로 꽤나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미국은 미 대사관 폭파 사건의 보복으로 수단에도 미사일 공격을 하였는데 미국이 공격한 화학무기 생산 공장은 사실 수단 민중에게 보급할 의약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세계 최고의 정보력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미국이 설마 그곳이 의약품 생산 공장이라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어쨌든 미국은 수단에서의 고의적인 실수는 묻어둔 채 아프가니스탄 내 반 탈리반 세력-북부동맹군-을 지원하면서 탈리반이 세력을 확장하는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심지어 미국이 이끄는 국제사회는 아프가니스탄의 90%를 통치하는 탈리반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대신 북부 동맹군을 정부로 인정하였다.
1999년 3월, 탈리반과 북부 동맹군 사이에 유엔이 주재한 평화협정이 맺어졌으나 3개월 만에 싸움이 재개되었고 유엔은 아프가니스탄에 경제제재를 내렸다. 2000년 12월에는 아프가니스탄에 무기를 수출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2001년 10월, 미국은 911 테러의 혐의자로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하고 그를 체포한다며 아프가니스탄에 공습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이전에 영국과 소련이 그랬듯이 미국의 말을 ‘잘 듣는’ 정부를 구성하였다. 침공이 2개월 후 미국은 파쉬툰 민족 출신의 하미드 카르자이를 임시 지도자로 임명하였다. 2002년 1월에는 망명했던 이전 왕 무하마드 자히르 샤를 다시 불러와 과도 정부를 세우고, 무하마드 자히르 샤를은 “국가의 아버지”로 선언하고 카르자이는 2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 미국 부시 대통령(좌)과 아프가니스탄 카르자이 대통령(우) |
임기가 끝난 후 카르자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첫번째 민주 선거라고 불리는 선거를 통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실제 아프가니스탄에서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은 일부에 불과하고 미국 없이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미국과 나토 점령군의 전쟁이 7년 째 계속되고 있지만, 전쟁은 끝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전쟁 초기에 모두 도망가고 적은 수만이 산 속에 숨어있다던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왔고, 아프가니스탄의 많은 지역이 탈레반 시절에 권력을 갖고 있던 지역 군벌들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작년 5월에 미국이 주도한 연합군은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 침공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탈레반 소탕 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이것은 탈레반 세력이 얼마나 확대되었으며 이에 미국과 나토 군이 얼마나 위기감을 느꼈는가의 증거이다. 2006년 6월 한 달 동안만 무려 340회의 공중 폭격이 나토 군에 의해 진행되었다. 미군과 나토군은 작년 말에 지원 병력을 늘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지난 7년 동안 전쟁으로 사망한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의 수는 수만 명으로 추정할 뿐 누구도 정확한 집계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나토 점령군에 의해 사망한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수는 약 4,400여명(휴먼 라이츠 와치 발표)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어린이 4명 당 한 명이 5살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평균 기대 수명은 42살로 침공 이전 보다 하락했다.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삶은 그 어느 때 보다 위협받고 있다.
사람의 목숨은 똑같이 소중하고 귀하다. 아프가니스탄 사람 보다 한국 사람의 목숨이 더 소중할 리 없고, 탈리반 병사보다 미군 병사의 목숨이 더 귀할 리 없다. 사람을 납치하여 목숨을 위협하는 일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지만, 전쟁과 점령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도 잘못된 일이다. 이런 진리가 통하는 곳은 세상에 몇 군데 안될 테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더더욱 통하지 않나 보다.
우리의 눈에 협상도, 호소할 기회도 없이 죽음을 맞은 수 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려고 하지 않는다. 태양은 이 세상 어디에나 똑같이 빛을 비춘다. 사람의 눈빛도, 마음도 조금만이라도 태양을 닮았으면 좋겠다.
* 글 : 수진. 2007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