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적으로 <존엄한 주거>라는 하나의 포괄적인 프로그램은 자산관리, 사회복지, 동료상담 등의 개별적인 프로그램으로 분할되었습니다. 사실 동료상담은 조직화를 위한 과정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동료상담을 홈리스 당사자들이 담당하면서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택청은 이러한 부분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홈리스연합의 역할은 보조적인 수준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이처럼 운동이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조직의 목적이 온건해지고 심지어는 조직이 몰락하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제도화 과정이 근본적인 개혁 확대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운동을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주요한 교훈 중 한 가지는 초기 단계에서 역량과 명확함을 갖춘 헌신적인 지도력을 발견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경험도 부족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국가권력의 술책과 기만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 1968년 전국복지권기구의 행진 모습 [출처: the Jack Rottier Collection] |
저는 1987년에 만들어진 (전국복지권기구와 거의 동일한 이름인) 전국복지권연합(NWRU)에 소속된, 당사자(복지수혜자)이면서도 동시에 지도자였던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븐과 클라워드의 입장에 분명하게 반대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피븐과 클라워드의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 같습니다. 과거 노예 해방 투쟁에서도 노예들은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한 조직화 과정을 거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습니다. 확실히 그 당시의 노예들보다 현재의 빈곤층의 상황이 더 열악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피븐과 클라워드는 동원과 조직화를 이분법적이고 추상적으로 해석하면서 조직화를 통해 아래로부터의 창조적인 운동을 지원할 수 있다는 현실을 간과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공부해온 역사와 제 자신의 경험들은 가난한 빈곤층이 운동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거나 또는 지도력을 드러내거나 운동을 지속시키기 어렵다는 주장들을 반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어떤 조직을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피븐과 클라워드는 광범위한 반빈곤운동에 있어서 빈곤층이 주도적인 사회세력으로 형성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회적인 관계에서 빈곤층이 주도적인 세력이 될 수 없다는 기본적인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