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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다림질] ‘노숙인’이 아니라 ‘홈리스’이어야 하는 이유

[다림질]은 홈리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확대하는 문화를 ‘다림질’해보는 꼭지

2017년 10월 10일,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서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홈리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이를 ‘노숙인’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홈리스라는 영단어가 현실을 은폐하고 있으며, 당사자들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그는 완전히 같은 주장을 2014년에도 제기한 적 있는데, 3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주장은 변한 것이 없다. 또 그것이 명백히 잘못되었다는 사실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홈리스’는 영어라서 안 된다?

그의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자. 첫째, 그는 ‘노숙인’과 ‘홈리스’라는 단어를 단순히 한국어-영어의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데, 사실 두 단어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서 각각이 지칭하는 대상의 범위가 아예 다르다.

‘노숙인’은 ‘이슬 로(露)’자와 ‘잘 숙(宿)’자가 합쳐진 것으로, 말 그대로 ‘이슬을 맞으며 한뎃잠을 자는 사람’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 노숙인이란 용어는 ‘거리노숙’ 상태에 처한 이들 중 일시보호시설이나 응급잠자리, 지하도나 처마, 대합실 통로 등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 실내가 아닌 바깥에서 자는 사람만을 지칭할 뿐이다.

그러나 ‘홈리스’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이보다 넓다. 홈리스는 ‘홈(home)’을 ‘박탈당한(less)’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 때, ‘홈’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홈’으로 대표되는 상호돌봄, 사회적 관계, 심리적 안정성 등을 포함한다. ‘홈리스’란 용어에는 ‘집이 없다’는 경제적 현상뿐 아니라 그들이 처한 관계와 정서의 측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홈리스가 지칭하는 대상은 실제로 주거가 없는 사람들 뿐 아니라, ‘무연고’상태에 있는 사람들(일본의 정의), ‘일정소득 이하’의 경제적 빈곤층(미국의 정의), ‘곧 사적인 주거를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 또는 세대’(유럽의 정의)를 폭넓게 아우른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노숙자’와 ‘홈리스’는 개념적으로 다른 단어이기 때문에, ‘홈리스’가 영어라고 해서 그것을 단순히 ‘노숙자’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류다.


그들이 ‘노숙자’를 선호하는 이유

둘째, 2011년,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을 위한 법률」이 ‘홈리스’가 아니라 ‘노숙인’이라는 명칭으로 법제화 된 맥락을 살펴보면, 오히려 ‘노숙인’이라는 명칭이야말로 주거빈곤 문제의 심각성을 감추고 피해가려는 의도로 선택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정부와 여당은 2005년부터 시행된 ‘개정 사회복지사업법 시행규칙’에 명명된 ‘노숙인’이란 용어를 주장했고, 야당과 시민사회진영은 ‘홈리스’란 용어를 주장했다. 결국 법제명은 ‘노숙인 등’으로 정책대상을 정의했는데, 지원 대상으로 언급된 다양한 주거취약계층이 아무런 개념정의 없이 ‘등’으로 표기되면서, 이 법에 의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거리생활자’와 ‘시설생활자’의 범주로 확연하게 줄어들고 말았다. 실제 ‘노숙인등 복지’ 정책상, 일부 쪽방 주민을 제외하면 고시원, 만화방, 다방 등 다양한 주거취약계층이 받을 수 있는 복지 지원은 아무것도 없다. 법률이 지칭하는 대상은 단순히 언어적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인 효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당시 정부, 여당이 ‘홈리스’란 용어 사용을 반대하고 ‘노숙인’을 고집한 이유는 복지 정책의 대상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홈리스라는 단어가 현실을 “포장하고 은폐한다”는 이건범 대표의 주장은 완전히 거꾸로 된 주장이다.


홈리스도 사회변혁의 주체다

셋째, 운동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홈리스’라는 용어가 ‘노숙자’라는 용어보다 더욱 유용하다. ‘노숙자’라는 단어는 이들이 처한 현상태, 즉 이들이 ‘바깥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상황을 단순히 묘사할 뿐이다.

그러나 ‘홈리스’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할 홈이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우리가 홈리스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도,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홈을 박탈당한 사람들’로 인식할 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무기력한 피해자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홈’을 박탈하여 거리노숙 상태에 이르게 한 사회구조의 부조리를 명확히 인식하고, 스스로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게 하자는 의도에서다.

이런 점에서, 왜곡된 묘사에 불과한 ‘노숙인’이란 용어보다 ‘홈리스’라는 용어가 더욱 현실적이고 객관적이며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언어와 삶은 분리되지 않는다

3년 전, 이미 같은 주장을 같은 근거로 반박한 적이 있는데도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꼿꼿이 내세우는 것은 다소 의문스럽다. 그는 우리의 비판을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 단순한 말꼬리 잡기 정도로 치부했거나, 애초에 홈리스들이 처한 상황과 빈곤 문제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물론,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외래어가 정부 정책이나 공공분야에서 우리말 대신 사용되고, 이것이 복지 체계에 대한 접근을 막는다는 그의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언어의 표면적인 사용을 살펴보기 이전에 그것이 담고 있는 삶의 의미와 모습을 파악하고 그 대상들과 직접 교감하는 일이다. 이러한 노력도 없이 ‘홈리스’를 ‘노숙자’로 바꾸어야 한다는 이건범 대표의 주장은 옳지 않다. 그의 주장에는 언어만 있지 삶은 없다. 언어와 삶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