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노숙 장소였던 회현역 6, 7번 출입구에서 자고 있는 당시 노숙 동료들의 모습. 지금은 백화점 연결통로가 생겨 이와 같은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
2002년 4월 봄이었다. 이곳저곳 일자리를 찾아다녔지만 경기가 어려워 쉽지가 않았다. 어머니랑 같이 살다가 어머니한테 피해주기 미안해서 지방에 가서 일 좀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짐을 싸들고 집을 나와서 그 때부터 노숙을 시작했다. 하루를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했다. 며칠 동안 남산 공원 의자에 앉아 있다 졸리면 누워서 자다가, 서울역에서 TV도 보고 밤 10시쯤 잠자리를 구하러 남대문 지하도로 갔다. 자려고 박스를 찾으러 다녔는데 쉽지가 않았다. 어느 빌딩 뒤에 박스가 여러 개 쌓여 있길래 몰래 두 개를 가지고 와서 남대문 회현역으로 내려갔다. 회현역 1, 2번 출구 지하도에 갔더니 다들 자리를 잡고 자고 있어서 6, 7번 출구로 내려갔다. 거기에는 사람들도 많이 없고 해서 제일 구석에 자리를 잡고 첫날밤을 보냈다.
따각따각, 또각또각, 저벅저벅. 첫날밤은 하이힐 소리, 구두 발자국 소리, 슬리퍼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노숙하면서 잠잘 때 최고 듣기 싫은 소리가 구두소리였다.
월요일은 사당동, 화요일은 수원, 목요일은 일산으로
노숙을 처음 시작했던 첫날밤을 떠올리다가 회현역에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던 일들이 생각났다.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하고 서먹서먹하게 지내다가 일주일정도 지나니까 말을 트기 시작했다. 주변 동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급식 주는 곳을 알려주며, 점심은 용산에 가서 먹고, 저녁은 서울역 지하도에서 해결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 라면 하나에 허기를 면하고, 바닥에 눕지 않은 채 잠을 청하는 거리 노숙인. 지하도 잠에 익숙지 않은 초기 노숙인일 것이다. |
‘자네 술 한 잔 할 줄 아냐?’
‘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자네 결혼은 했나?’
‘저도 얼마 전까지 사출기 일을 하면서 월 150만원씩 벌며 3년 동안 생활했는데, IMF가 터져서 회사가 부도가 났어요. 먹고 살기 위해서 동네 주변에 인력 사무실에도 나가 봤지만, IMF라서 그런지 일자리가 없었어요. 한 달에 나가봐야 5번 정도 일당 5만원에 노가다 일을 했어요. 살기가 어려워지니 마누라가 도망가 버렸습니다. 2년 동안 기다려 봤지만 헛꿈이었습니다. 혹시 아버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럼, 나도 아들 하나 생긴 셈 치지, 뭐’
그 다음 날부터 어르신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나이가 있으신 어르신이 서울역 매표소에서 무임승차권을 얻으면 그걸 나눠서 지하철을 타고 교회로 꼬지를 다니기도 했다. 당시에는 서울역 1호선에서 4호선까지 매표창구를 돌아다니면 65세를 넘긴 어르신은 무임승차권을 8장이나 얻을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동료들과 요일별로 월요일은 사당동, 화요일은 수원, 목요일은 일산으로 꼬지를 나갔다. 어떨 때는 만원을 벌기도 했다. 오후 4시쯤 되면 꼬지를 끝내고 회현역 주변 식당에 들어가 동료들과 족발을 시켜서 술 한 잔을 나눠 먹기도 했다. 용산이랑 서울역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한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 할아버지랑 자주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더 친해지게 되었다.
어떤 날은 낚시를 좋아하시는 할아버지랑 인천 소래포구에 놀러갔는데, 망둥이를 다섯 마리나 잡아서 회현역으로 가져왔다. 회현역 물품보관함에 넣어 두었던 부루스타를 꺼내다가 무 하나, 파 하나를 사와서 매운탕을 끓였다. 그 매운탕을 놓고 회현역 식구들과 오붓하게 술 한 잔을 하기도 했다. 다들 허물없이 지내니까 자기가 아는 꼬지 코스가 있으면 같이 데리고 가기도 했다.
어느 샌가 구두소리도 익숙해져버렸다
회현역에서 자다가 술 취해서 지나가는 사람이 “왜 이런데서 노숙하냐?” 고 하면, “예전엔 우리도 다 똑같은 일반사람이었어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아저씨도 똑같이 당해보세요” 라고 대답하곤 했다. 어느 샌가 구두소리도 익숙해져버렸다. 먹고 살기 힘드니까 다들 그렇게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