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고]는 글쓰기 모임“늦봄에”에 참여한 당사자들의 노숙 경험을 글로 적은 꼭지입니다.
폭탄 사진에서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
홈리스행동 기자학교를 마치고 사람들은 기자학교에서 부족했던 글쓰기와 사진 찍기를 후속 모임에서 계속 이어가자는 의견을 너나없이 던졌다. 하지만 격주 금요일 저녁 2시간으로는 본격적인 글쓰기도 사진 작업도 힘들었다. 보다 쉬운 글쓰기를 고민하다 한 장의 사진을 정독(?)하고, 대화를 나누고, 다시 그것을 글로 써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사진을 그냥 훑어보는 것이 아닌 적극적인 읽기였다. 사진에 무엇이 어떻게 있는지, 찍은 이의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등을 표현하고 예견하며 글쓰기 재료를 풍부하게 해보자는 것이었다.
사진 읽기에서 선택한 이미지는 2010년 7월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이 ‘최저생계비 한 달 나기 희망 UP 캠페인’에 참여해 “6300원짜리 황제의 삶”이란 제목으로 “황제의 식사가 부럽지 않았다”며 자신의 홈페이지에 밥을 먹고 있는 장면을 찍은 홍보 사진이었다. 모임 사람들은 왜 이 사진 한 장을 ‘우리를 슬프게 하는 사진’이고, 우리의 마음을 ‘폭탄처럼 터트리는 사진’으로 보았을까?
지금은 돌아가신 토끼가 “저 사진을 보면 김치 종지도 없다. 김치 정도라도 올려놓고 먹으면 괜찮은데. 저건 너무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찍었다. 너무 없이 먹는다는 것을. 실제로 우리가 저렇게 쪽방에서 혼자 밥 먹다 보면 김치 하나 정도는 올려놓고 먹거든…”라고 말하며 차 의원 사진은 ‘체험 활동을 위한 인증샷’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 폭탄 같은 사진을 눈으로 읽고, 입말로 해체하는 과정에서, 차 의원이 밥을 진짜 먹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력까지 더해졌다. 결국 사진은 연출된 사기이고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는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말들이 오가는 수다는 어느새 글이 되어가고
사진 읽기처럼 대화하듯 말을 글로 써보자고 했지만, 글쓰기는 A4 용지의 텅 빈 여백을 마주할 때처럼 막막했다. 그래서 핸드폰으로 찍은 자신의 일터나 집, 그리고 주변 사물들을 포토에세이 방식으로 짧은 생활 글쓰기를 했다. 그러다 새로 시도한 작업이 동료 홈리스들에 대한 삶을 구술하는 공동 인터뷰였다. 림보가 지난 2002년 6월 월드컵이 한창일 때 남대문시장 근처 회현역에서 노숙하다 만난 할아버지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다. 질문을 하나씩 준비해 미리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할아버지는 공동인터뷰를 흔쾌히 승낙했다.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는 아홉 살 때 버려져, 불광동 아동보호소에서 경주 고아원으로, 강냉이죽만 먹어 배고파 살 수 없어 도망친 이야기, 그리고 현재 ‘홈리스 행동’ 활동까지 이야기해주었다. 차와 간단한 먹을거리밖에 없었지만 슬프고, 재밌고, 진지하고, 수다스런 두 시간의 인터뷰가 훌쩍 흘러갔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할아버지는 “인터뷰하면서 편하고 좋았어. 이렇게 말하니까 말을 하는 게 좀 느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편하고…”라고 하며 인터뷰가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했다. 언론에서 노숙인이 이슈가 되었을 때 가끔 찾아와 듣고 싶은 것만 질문하고 쏘옥 빠지는 일반 신문 방송 인터뷰 방식과는 다른, 함께 진행한 모임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말들이 오가는 수다는 1년여의 관계가 지속되면서 어느새 글이 되어가고 있었다. 함께한 작업 속에서 잃어버렸던 자기 목소리가 곧 글이 될 수 있음을 찾았던 것일까? 그동안 했던 인터뷰, 자기 글쓰기, 포토에세이, 사진 읽기 등을 모아보았다. 먼지보다 가볍다고 여겼던 글들이 켜켜이 쌓여 두꺼운 층을 이루었다. 그것을 100여 페이지의 문집으로 만들었다. 문집의 제목은 ‘늦봄에’로 정했다. ‘늦봄에’가 글쓰기 모임을 부르는 새로운 이름이 되었다.
홈리스, 늦봄에 서울역을 찍다
‘늦봄에’는 사랑나라, 바우, 샘물, 선녀, 달마 등 새로운 얼굴들을 불러 모았다. 그동안 미뤄왔던 사진 찍기를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어디를 찍을 것인지 이야기하다, 모임 사람들 중에 서울역 노숙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있어 홈리스에게 각별한 곳인 서울역을 찍기로 했다. 마침 2011년 8월, 서울역과 코레일에서는 저녁 11시부터 서울역사 내 노숙인을 강제 퇴거한다는 방침을 언론을 통해 발표했고, 이에 단체들이 공동대책위를 구성해 대응하고 있던 시기였다.
‘늦봄에’는 서울역을 찍을 때 어떤 주제를 정하지 않고, 아무런 준비 없이 자신의 몸과 카메라로 서울역 공간을 대면하기로 했다. 보통 걸음 속도보다 천천히 걷다가 서울역의 공간, 사물, 기억 등이 문득 말을 걸어오면 비로소 카메라를 꺼내 찍는 방식이었다. 익숙하던 것들을 낯설게 보려는 시도였다.
찍은 사진 속에는 사람들의 서울역에 대한 기억들이 담겨 있었다. 사진 보는 시간이 1초도 채 걸리지 않는다는 통계 수치를 무시하듯, ‘늦봄에’에서는 사진 한 장을 두고 두 시간의 모임 시간도 모자랐다. 그렇게 세 달여의 시간 동안 서울역에서 찍은 사진을 함께 천천히 읽어나갔다.
그런데 유독 사진 해석이 불가능한 사진이 있었다. 샘물이 카메라에 가득 담은 40여 장의 서울역 상품 광고판 사진이었다. ‘늦봄에’는 마치 시각적인 문맹처럼 어떤 말을 잇지 못했다. 샘물도 왜 찍었는지 모르고 그냥 찍었다고 했다. 무엇이 샘물의 카메라에게 셔터를 누르게 했을까? 샘물의 무의식이었을까? 서울역에 대한 몸의 기억이었을까?
“서울역 하루 유동 인구가 하루 30만 명이고 그들이 왔다 갔다 하면, 매출이나 상품 선전 효과가 얼마만 하겠습니까? 서울역 주변에 그런 광고판이 많다는 것 자체가 그런 유동 인구를 감안해 광고판을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았나 싶어요.”
바우가 바라보고 펼쳐낸 해석에서 서울역 공간의 보였지만 보이지 않던 어떤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울역 민자역사는 기차역이라기보다는 백화점에 딸려 있다는 느낌이 더 큰 것 같아요. 서울역은 한화에서 민자역사를 지어 한화 콩코스가 들어와 있는 거고. 서울역에서 노숙인을 내쫓은 것은 대기업이 지어서 더 내쫓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몇십 년 동안 사용하면서 이익을 뽑아내야 하기 때문에, 시민들의 공간이나 통행보다는 자기들이 임대해주거나 직접 사용하면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설계 자체가 그렇게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진을 찍고, 읽고, 그것을 글로 쓰는 여정을 통해 도착한 서울역은 말만 공공 공간이지 민간이 들어간 자본만을 위한 공간으로, 홈리스나 노숙인은 잠깐 동안도 머물지 못하게 만든 곳으로 다가왔다. 서울역의 다른 모습․배치․풍경이 드러났다. ‘늦봄에’는 서울역을 ‘잠깐 있다 나가라는 역’, ‘서울역이라고 쓰고 한화 콩코스역이라고 읽는다’라고 이름 붙였다. 이름을 짓고 그것을 부르는 사람에게 그 힘이 생기는 걸까? 주어가 되지 못하고 사진의 대상으로, 소재로, 그래서 항상 목적어로 위치하던 사람들이 시선의 방향을 역전시키는 순간이었다.
‘늦봄에’는 서울역의 노숙인 강제 퇴거 방침에 대한 사진적인 대응은 늦었지만, 2011년 12월 동짓날마다 진행하는 제 9회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에서 찍은 사진과 글을 모아 서울역 광장 앞에서 <홈리스, 서울역을 찍다>라는 제목의 첫 번째 사진전을 열었다. 그리고 2012년 12월 동짓날 추모제에서는 당시 서울역 홈리스들과 함께 <서울역, 길의 끝에서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홈리스행동 글쓰기모임, ‘늦봄에’는 격주 금요일 저녁 8시에 홈리스행동 사무실에서 모임을 갖고 글쓰기, 사진찍기, 책읽기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홈리스행동으로 연락 주세요. 모두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