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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뉴스 17호-연속기고] 내가 이십대로 돌아간다면

[연속기고]는 글쓰기 모임“늦봄에”에 참여한 당사자들의 노숙 경험을 글로 적은 꼭지입니다.

<편집자>글쓰기 모임에서는 동료들이 모여 서로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건네며 생애사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함께 대화하듯 나누었던 인터뷰들을 글로 옮겨 적었습니다. 이번호부터는 ‘사랑나라’님의 이야기들을 2회에 걸쳐 소개할 예정입니다.

내가 이십대로 돌아간다면?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렙니다. 누구나 이십대가 지나간 뒤 그 시절을 한 번쯤 뒤돌아보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나는 배움이 부족하여 세상을 무척 어렵게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 경험은 많지만 경험에 비등한 지식이 있어야 좀 더 세상을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식이 뒷받침 된다면 나의 경험은 내 삶 속에서 보다 풍성하게 가꾸어질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하였던 일은 육체노동입니다. 육체노동 분야의 일은 무엇을 하든지 쉽게 익힐 수 있었지만, 노동에 필요한 지식은 책을 보아도 잘 습득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배움이 짧은 탓에 책을 접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이유도 있지만 애초부터 사회생활만 염두에 두고 책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잘못이 큽니다. 주위의 환경이 나에게 배움의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예 그 길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보려고 하지 않은 나의 잘못이 큽니다.

나는 지금 악기를 배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기초가 없으니 막막할 따름입니다. 일단 악보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다음 단계로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은 수없이 많이 들어왔지만 막상 내가 무엇인가를 배우려하니 그 말이 더욱 절실하게 와 닿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십대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공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만이라도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자 합니다. 나의 남은 삶에 풍족함과 여유로움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또한 나의 남은 삶을 남에게 헌신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나의 꿈과 소망입니다. 아래 이야기들은 글쓰기 모임 동료들과 나눈 나의 20대의 이야기들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을 나오다
사랑나라(이하 사랑): 제가 고향이 강원도 동해입니다. 동해 구미동. 예전에는 삼척군으로 들어갔는데, 지금은 구미동으로 변했어요. 도계에서는 초등학교를 다녔고, 4남매 중에서 셋째였어요. 형이 2명, 여동생이 1명.

Q: 집 나오기 전 이야기가 궁금해요.
사랑: 집 나오기 전에요? 집 나오기 전에 초등학교 4학년 1학기를 다니고 있었어요. 집 나오기 바로 전에. 밥을 해놓으면, 연탄불에 밥을 했거든요, 밥을 제가 했어요. 제가 밥을 언제부터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항상 밥을 제가 했어요. 그래서 형들이 저번에 돌아가신 형하고 작은 형, 두 분이 계신데, 두 분이 한 솥 밥을 다 먹어서 제 밥이 없는 거야. 그래가지고 밥을 다시 하기 귀찮으니까 굶고, 그러다가 어릴 적에 국수집에 국수를 사러갔다가 그냥 쓰러졌어요. 단지를 깨면서 쓰러졌는데, 단지 깨진 조각 위로 쓰러졌는데, 다친 곳은 없고 눈을 떠보니까 아버지가 안고 차에 타고 가고 있더라고요, 병원으로. 병원에 가니까 영양실조라고. 그래서 계란 찜 한 번 얻어먹었어요, 집에서(웃음).
저희 아버지가 밖에서는 그런 것이 없는데, 집에만 오시면 제 머리가 축구공으로 보이는지 머리를 툭툭 차고 그래가지고 겁이 나서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오시는가 아니면 맨 정신으로 오시는 가 항상 망을 봤어요, 매일. 그래서 술을 안 드시고 오면 집에 가만히 있고, 술 드시고 오면 집에 쪽문이 있었어요, 도망치라고(웃음). 그 문으로 도망을 치는 거에요.

Q: 아버님은 뭐하셨었어요?
사랑: 아버지가 탄광 감독으로 있었어요.

Q: 여유가 있으셨겠네요?
사랑: 여유가 있었죠. 대한석공에서 감독을 하셨으니까. 쌀이 기본적으로 나오는 게 있는데, 그전에는 가마때기 쌀로 보통 80kg 이렇게 나왔었는데, 집에 반찬이 없으니까 반찬이 멸치, 종이 봉다리에 싸져 있는 그거 하나하고 장, 고모님이 장을 갔다 주셔갔고 밥 먹을 때 멸치 장 찍어가지고 밥 먹고 그거였어요. 아니면 간장에다가 밥을 비벼가지고 먹고.

돼지 우리에 잤던 기억
사랑: 저는 고향에 대한 기억이 저희 아버지 때문에 돼지 키우던 돼지 우리에 잤던 기억도 있어요. 남이 키우던 돼지 우리에. 아버지가 주무시나 안 주무시나 봐 가지고 주무시면 들어가고 안 주무시면 못 들어가고.

Q: (아버님이) 많이 무서우셨나보다.
사랑: 어릴 적이니까. 아버지가 집안에서만 그래요. 바깥에 나가면 안 그런데. 그게 참 이상해. 그래서 저는 어머니도 안 계시고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마치고 방학이 되니까 집도 싫어지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20원가지고 도둑차를 타고 도계역에서 청량리까지 왔어요. 그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어가지고 바깥에서도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Q: 예전에는 노숙이 없었을 수도 있겠네요. 통행금지가 있어서 밖에서 못 자게 했으니까. 그래서 막 잡아가고 그랬잖아요.
사랑: 좌우간 (저는) 과일 파는 경동시장으로 들어가서, 거기는 야간에 시장 안에서는 돌아다녀도 괜찮았어요. 그래가지고 경동시장 안에서 가게 쪽 잠자리가 괜찮은데서 자고(웃음), 낮에는 돌아다녔는데 저는 그 때 보통 3일은 기본으로 굶었으니까. 경동시장 맞은 편에 식당이 있었어요. 거기서 잔심부름이라도 하면서 밥은 줄 테니까 있어라 그래가지고. 제가 74년도(12살)에 서울역을 왔다가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에 붙잡혀서 아동보호소 차를 타고 갔어요. 거기서 그 안에 초등학교가 있어요. 주소만 제대로 있으면 부모님이 찾아 가게 하는데, 그 당시에는 주소를 가르쳐줬는지, 안 가르쳐줬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여하튼 6개월을 넘게 있었어요. 거기에 있을 때는 좋았어요. 계란에다가 버터를 넣고 밥을 비벼먹고.

가을 운동회날, 아동보호소를 탈출하다
Q: 아동보호소에 몇 명 정도나 있었나요?
사랑: 그 당시에 제가 알기로는 3,000명 정도 있었다고.

Q: 진짜 많았네요.
사랑: 아파트식으로 지어 놓고 거기에서 사는 애들이 있고, 처음에 들어오면 강당 식으로 되어 있는 데서 재우는 데, 한 7~80명을 거기서 재워요. 근데 피부병이 있는 애가 2~3명 들어오면 여러 명이 다 옮아버리는 거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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