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바뀔 때 혹은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바뀔 때마다 산업육성, 혁신성장, 첨단산업육성 등 산업지원 정책이 등장했다. 과감한 국가투자, 무조건적인 재벌 퍼주기, 각종 규제 완화와 전폭적인 세제 지원까지, 경제와 산업 관료들이 돌려막기식으로 반복하고 있는 산업지원정책이 또 나왔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180조 원 투자, 300조 원 투자 등 거의 매년 투자 액수를 100조 원씩 늘려가며 반도체 지원과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급기야 대선을 1년 앞둔 지난 2021년 5월에는 문재인 정부와 반도체 기업들이 ‘K-반도체 전략 보고대회’를 열고 기업은 2030년까지 510조 원 이상 투자하고, 정부는 그에 걸맞은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런 산업지원계획이 윤석열 정부에서는 첨단산업 육성과 국가첨단산업벨트 조성 계획으로 그리고 2026년까지 550조 원 투자 계획으로 옷 색깔만 바꾼 채 다시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월 15일 제14차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열고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바이오, 미래 차, 로봇 등 첨단산업 부문의 육성전략과 ‘15개 지역 국가첨단산업벨트 조성계획’을 밝혔다. 수도권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 민간 자본 300조 원을 포함해 민간 기업들은 6대 첨단산업에 550조 원을 투자하고, 정부는 각종 세제 지원과 규제 완화 그리고 수십조 원의 예산을 투여해서 이들 기업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전략, 한국형 뉴딜
사업 계획에서 환경 부문인 그린뉴딜만 빼고 나머지는 그대로다(그린뉴딜 관련 부문인 재생에너지 생산 및 전환 확대 대신 소형모듈원전(SMR), 원전 활용 수소 육성 등 원전 육성으로 대체됐을 뿐이다). 윤석열 정부의 첨단산업 육성전략은 재벌 지원, 퍼주기 전략에 다름 아니다. 정부가 지원·육성한다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바이오, 미래 차, 로봇 등 6개 부문 첨단산업은 모두 4대 재벌의 핵심 전략사업이며, 독점 영역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바이오는 삼성그룹의 현재와 미래의 전략산업이며(최근 삼성은 로봇 부문에도 진출), 미래 차(수소 분야 포함)와 로봇은 현대차그룹, 반도체와 배터리 부문은 SK그룹, 디스플레이와 배터리 부문은 LG그룹의 핵심 산업이다. 해당 영역에서 각 재벌그룹은 국내 독점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순위를 다투는 글로벌 독점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또한, 첨단산업과 관련된 15개 지역 국가첨단산업벨트 조성계획은 첨단산업을 장악한 재벌의 하청기업을 육성하고 관련 산업을 하청 계열화, 집단화하는 계획에 지나지 않는다. ‘재벌-하청’이라는 한국 경제의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더 악화하는 계획이다.
그에 더해 첨단산업 육성전략에는 각종 규제법 개정을 통한 세액공제 확대와 전력, 용수 등 인프라 지원, 60일 내 인허가 미처리 시 인허가를 처리한 것으로 간주하는 인허가 타임아웃제의 도입도 포함됐다. 노동, 금융 등 핵심 규제 개선을 위해 해외 경쟁국 수준으로 규제를 완화하고, 신설되는 규제를 사전 평가하는 ‘첨단산업영향평가’ 제도 도입도 검토하겠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첨단산업 분야를 사실상 규제 무풍지대로 만들고, 세금도 거의 없는 ‘조세 천국(tax heaven)’으로 만들겠다는 심산이다.
▲ 3월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4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모두발언 중인 윤석열 대통령. [출처: 대통령실사진기자단] |
미국의 기업 지원, 규제와 사회적 조건 확대
윤석열 정부는 “미국, 일본, 중국 등 주요국은 첨단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자국 우선주의 기반의 강력한 견제와 파격적인 투자 지원을 추진 중”이지만 “우리나라는 (…) 지원 수준과 규제 여건은 아직 부족하다”며 첨단산업 지원, 재벌 지원의 필요성과 근거를 설명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남들이 해당 산업을 지원하고 규제도 풀어주니 우리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 일본, 중국, 대만 등 주요국은 첨단산업과 재생에너지 등 전환 부문에 대한 국가 지원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 지원법 등을 통해 반도체, 자동차 공급망 변경, 재생에너지 및 탈탄소 전환 등 핵심 산업 지원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지원 산업이 대기업이나 글로벌 IT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지원을 하지 않는다. 같은 민간기업, 대기업 지원이라 하더라도 지원조건이나 지원방식, 재원의 성격 등 국가 지원의 성격과 조건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민간기업에 대한 지원이 이뤄지기 위해서 기업은 각종 규제를 수용해야 하고 국가나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기업 지원의 반대급부)을 충족해야 한다.
인플레이션감축법만 하더라도 미국은 기업 지원의 조건으로 각종 규제를 어마어마하게 확대했으며, 사회적 부가 조건도 대폭 강화했다. 이 규제 확대 때문에 한국이나 유럽, 일본 등 외국기업에서 보조금 지급에 대해 특히 더 차별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인플레이션감축법의 지출을 보면, 총재정 투입의 84.4%에 이르는 3,690억 달러의 예산이 에너지 안보 및 기후 변화 대응 부문에 편성됐다. 세부적으로 보면 청정 전력 부문 세액공제, 친환경 제조업·차량·연료 관련 세액공제, 개인 대상 청정에너지 인센티브 제공 등을 골자로 한다. 즉, 미국 정부는 미국의 기후 대응 리더십 회복 및 자국 내 투자·생산 확대를 통한 에너지 안보 강화라는 사회적 조건을 충족하는 기업에 한해 지원한다. 이는 기업이 청정에너지 생산과 전환, 안보 강화를 위해 생산 조건을 변경하는 등 비용을 감수하고 이익을 희생했기 때문에 보상하는 성격이다. (이런 기업 지원의 성격 때문에 미국의 기업 지원에 대한 논쟁은 왜 대기업에 지원했는가 하는 지원 대상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 지원의 성격과 조건 중심으로 논란이 형성된다.)
또한,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에 따라 자국 내 반도체 투자 기업에 주는 보조금 지급 조건은 더 냉혹하기만 하다.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 생산 지원금 신청 조건으로 경제 및 국가 안보, 사업 상업성, 재무 건전성, 기술 준비성, 인력 개발, 사회 공헌 등 6개 심사 기준을 제시했다. 동시에 아주 까다로운 안보 관련 조건(사회적 조건)을 내걸었다. 국방부를 비롯한 미국 정부 기관이나 주요 시설에 필요한 반도체를 얼마나 생산하고,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할지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최첨단 반도체에 대한 국방부와 국가안보 기관의 접근, 중국 등 우려국과 공동 연구 또는 기술 라이선스를 할 경우 지원금 전액 반환, 국가 안보 프로그램과의 통합 용도로 이용할 수 있는 반도체 시설 제공 등의 안보 조건을 명시했다.
뿐만 아니라 지원금 신청 기업은 재무 건전성을 검증할 수 있는 수익성 지표와 예상 현금흐름 전망치도 제출해야 한다. 또한 1억 5천만 달러 이상 지원금을 받는 기업의 경우 수익 전망치 초과분을 미국 정부와 공유해야 한다는 조건, 초과이윤(독점이윤) 환수 조치까지 있다.
또한 기업 지원이 특히 독점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다면, 그 재원은 대기업 속에서 구성된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을 보면, 기업 지원에 드는 재원을 대부분 글로벌 대기업과 제약회사, 주주 이윤에서 마련한다. 인플레이션감축법에서 재원은 글로벌 대기업에 도입되는 15% 최저 법인세율(글로벌 최저세)을 도입해서 총 재원의 1/3 정도를 만든다. 또한 처방약 가격책정 개혁 즉, 대형 제약회사의 이윤 제한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자사주 매입 시 1% 개별소비세 신설 등을 통해 나머지 재원을 마련한다. 반도체 지원법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초과이윤 환수를 통해 지급한 정부 보조금을 환류하는 방식을 취했다. 지원받을 대기업과 주주들로부터 지원할 돈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에 직접 지원하는 것에 나아가서 저소득층을 지원함으로써 기업 지원이 이뤄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가령, 공급망과 생산조건을 만족시킨 전기자동차 구매에 세액공제를 주는데, 전기자동차 회사에 직접 혜택을 주는 게 아니라 저소득층이 구매할 시에만 세액공제가 되도록 했다. 저소득층 지원인데, 이를 통해 전기자동차 기업이 지원 효과를 보게 한 셈이다.
어떤 경우라도 국가의 기업 지원은 무조건적일 수는 없다. 국가 또는 사회를 위해 뭔가(이윤)를 희생했거나 손해를 봤기 때문에 보상하고 지원한다. 심지어 기업이 도산의 위기에서 정부가 기업 대출이나 보조금을 확대하는 조처를 할 때조차 아무런 조건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해당 기업에 다양한 사회적 조건이 부여되고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국유화 등 소유권이 국가로 이전돼야 한다. 민간 기업에 그런 사회적 조건이나 반대급부 없이 국가 지원이 이뤄지면 그것은 ‘특혜’일 뿐이다. 사기업, 재벌 기업이 오직 돈을 더 벌기 위해 국가의 자금과 자산과 자원을 조건 없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재벌 성장의 트릭클 다운 효과 없어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기업 지원 정책도 사실 적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 재원 구성이나 환수 방안이 여전히 불투명하고 불만족스럽고 결국 미국 대기업, 글로벌 대기업에 더 많은 지원이 이뤄진다. 그렇지만 재원에 대해서 입도 뻥긋하지 않고, 대가나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수십조 원의 정부 자금과 각종 세제 혜택을 주고, 노동규제와 금융규제를 면제해주는 윤석열 정부의 기업 지원 정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윤석열 정부의 재벌 지원정책의 심연에는 재벌이 독점하고 있는 산업이 성장해야 국민경제가 발전하고 성장한다는 ‘재벌주도 성장’(재주성)이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이 글로벌 경쟁에서 밀리지 않게 재벌에 대한 조건 없고 과감한 지원을 할 수 있다. ‘재벌주도 성장’이야말로 한국 경제를 발전시킬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경제의 구조와 세계 경제 속에서 재벌의 성장은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르지 못하고 재벌만 성장한다. 독점 중심으로 이윤이 모여 기업 이윤을 양극화하고, 부자들의 자산만 더 키워 소득의 양극화만 커진다. 재벌 성장의 과실이 국민경제 전체로 확산하는 트릭클 다운 효과(trickle down effect, 낙수효과)는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재벌 지원과 규제 완화, 세금 삭감은 재벌 특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