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거 말고는 방법이 안 보이는 상황이구요"

장기투쟁 사업장 특별기획② - '하이텍 알씨디 코리아'
"무너지든지 가든지, 이기면 이기는 거고 지면 다 지는 거다"


"생계의 막막함이 청춘 바친 공장서 쫒겨난 억장 무너지는 마음을 꺾을 순 없었죠."

서울 가산동 가리봉 공단에 위치한 '하이텍 알씨디 코리아'는 무선 모형 조정기를 생산하는 업체다. 총 사원 130명 중 생산직원은 45명. 그 중 14명의 여성 조합원으로 이루어진 하이텍 알씨디 코리아 노조는 2002년 임금협상 과정에서 5명이 해고를 당한 이후 만 2년을 해고자 복직과 임단협 체결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이미 지방노동위와 중앙노동위에서 전원 복직 판결을 내렸지만, 사측은 지더라도 대법원까지 간다는 입장이고 2003년 8월 특별 근로감독까지 받았지만 현장의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장기투쟁 사업장 기획 두 번째, 김혜진 노조위원장을 찾아 하이텍 알씨디 노조를 방문했다. 노조 사무실에 들어서자 한 쪽에서 여성오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국장이 볼펜 만드는 부업을 하고 있다. 하이텍 투쟁기금이 바닥나서 재정사업을 위한 포스터를 부치고 온 길에 시간이 남아 부업을 도와주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집회 참석을 위해 들어서는 조합원들도 오자마자 자연스럽게 볼펜을 한 무더기씩 잡고 앉아서 담소를 나눈다. 그 한 켠에서 김혜진 위원장과 인터뷰를 시작했다.

김혜진 위원장
90년대부터 공단에서는 산업공동화로 인한 구조조정과 노동조건 악화가 가시화되고 있었다. 하이텍 알씨디도 96년 필리핀에 생산공장을 세우면서 정리해고를 통한 인원을 축소하는 시도를 했고, 이에 맞서는 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하이텍 알씨디 노조는 99년부터 천지태광 노조와 대각선 교섭을 진행해 왔다. 그런데 2002년 4월 임금협상에서 회사측은 천지와의 공동투쟁을 새삼 문제삼으며 처음부터 교섭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김혜진 위원장은 41일간 죽음을 오가는 단식을 감행하다 급기야 쓰러졌고, 보다 못한 조합원들이 6월 25일부터 3일간 전면 투쟁을 벌였다. 회사는 6월 28일 쟁의에 결합한 조합원만을 대상으로 공격적 직장 폐쇄를 단행했다. 그리고는 조합원 개인에 대한 회유에 들어갔다. 조합원 21명 중 3명이 사측의 공작에 넘어갔고 그들만이 현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조합원들은 작업장 앞에서 구사대의 폭력에 밀려나야 했다.

"단식 당시 이렇게 하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살아서 승리하자고 북돋아서 반강제로 단식을 풀 정도였는데, 그랬던 사람이 회사측으로 돌아섰을 때 그 배신감은 너무 컸죠. 조합원 내부에서 한 차례 동요의 회오리가 불기도 했어요"

회사는 공격적 직장 폐쇄도 모자라 용역업체를 부르려했고 이를 눈치챈 조합원들이 전날 회사를 엎어서 용역이 들어오는 걸 막았다. 그러나 그 일로 구사대와 몸싸움이 있었고 회사는 조합원들을 형사 고발했다. 회사는 직원들에게 "조합원이 악질 폭력 집단이니 처벌해 달라"는 탄원서에 서명하게 했다. 경찰서 한번 안 가본 조합원들이 검찰 조사까지 받아야 했다.

설 명절 전날 도착한 해고 통지서, 감시카메라까지

어느새 11월, 직장 폐쇄 5개월 차가 되니 생계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파업 중에도 식당 이용 등 복지는 유지하도록 단협에 있는데 식당 출입마저 할 수가 없었다. 매 점심 때마다 구사대에게 짬밥을 뒤집어 쓸 수가 없어서 결국 조합사무실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해고자 생계문제에 현장에서 조합원들에 대한 노골적 차별 때문에 조합원들의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했다.

"2002년 비조합원만을 대상으로 일당을 2천원 씩 인상하고는 그 이후 해마다 비조합원만 일당을 인상했어요, 심지어는 회식이나 야유회도 배제하구요. 공격적 직장 폐쇄에 대해 노조가 부당노동행위로 문제제기 하자 중노위 판결 전에 직장 폐쇄를 풀더니 조합원 8명을 한 라인에 몰아버리더군요." 처음에 노조는 부당 전환배치로 싸우려 했다. 그런데 현장 조합원 입장에서는 찢어져 있어도 더 힘든 상황. 그래서 지금은 8명이 한 라인에서 일하고 있다.

회사에서는 또 02년 4월부터 노조 모르게 총무과와 교섭 장소 등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러더니 11월 징계위 전에는 현장곳곳과 집회 장소, 식당, 조합사무실, 출퇴근 카드기 위에도 감시카메라를 설치했다. 아침마다 조합원들은 카메라에 테잎을 부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고 조금 있으면 관리자가 와서 테잎 떼기를 반복했다.

2003년 11월 11일 중노위 심판 전에 회사는 현장 감시카메라를 몰래 떼고 지금은 현장 외부에만 카메라가 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도무지 어디에 자신들이 모르는 카메라가 있는지 늘상 불안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이다.

"조합원들의 상황이 말이 아니었죠. 누군가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서로 말조차 나누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전 조합원이 밖으로 나가서 터놓고 얘기했다. 평소 술들을 잘 안 마시는데 술까지 마시며 참 많이도 울었단다. 도무지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할 것인지 부터 속내 얘기들을 했다.

"회사는 구로 공단에서 문 닫을 생각으로 우리를 여기까지 몰아 부쳤는데 여기서 백기투항하면 다시는 못 일어선다", "언제고 문 닫을텐데 그 때는 눈뜨고 당하는 거밖에 없을 거다", "무너지든지 가든지, 이기면 이기는 거고 지면 다 지는 거다" 결국 그렇게 울면서 다시 의지를 모았다.

11월에 노조를 배제하고 노사협의회를 만들더니 12월부터 회사에서 징계를 운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징계위를 열려했다. 2차 징계위까지 조합원들이 저지시키자 회사는 마치 징계위를 연 것처럼 노사협의회 회의록을 꾸려서 회유된 3인을 제외한 움직이는 전 조합원을 대상으로 징계를 내렸다. 5명이 해고였고 나머지는 견책이었다.

"천지가 여름에 해고를 하고 9월에 부도가 나서 이사 해임에 법정관리 등으로 오히려 해고자가 복직 되었죠. 천지 조인식을 하고 왔는데 등기 우편이 왔드라구요. 대표로 위원장 앞으로 온 것을 보자고 해서 뜯었는데 해고 통지서였어요. 그게 설 명절 바로 전날이었어요. 집에 흩어져서 심란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죠." 어차피 해고가 예상되었던 위원장, 부위원장, 사무장이야 그렇다지만 전혀 예상 못한 대의원 1인과 조합원 1인은 당혹감에 휩싸였고, 당연히 해고될 것을 예상한 조직부장은 해고 안 된 것에 미안해했다.

명절이 지나고 두 명의 해고자가 출근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 "더 이상 험한 꼴 그만 보자"고 보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저씨가(남편) 생전 안 하던 수영까지 3개월 끊어주며 이제 그만하라 그랬다데요." 한 달이 지나서 그 조합원과 만났다. 결국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거니까. 아저씨(남편)하고도 만나서 술도 먹고 설득을 했다고 한다. "회사니 구사대들 앞에서는 당당한데 식구들을 만나면 이상하게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도 그렇게 추스리며 여기까지 온 거죠"

처음엔 산업공동화의 광풍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장투 비슷한 고리 같이 묶어서 사회적 쟁점으로 만들어야


하이텍 알씨디가 생산하는 무선 모형 조정기는 97%를 수출에 의존하는 고부가가치 생산품이다. IMF 때도 환차익까지 내며 호황을 누린 흑자 기업이다. 수출량의 60%는 미국, 40%는 유럽에서 소화하고 있다. 회사는 96년 필리핀에 생산공장을 세우고, 2002년에는 독일의 동종 브랜드인 멀티플렉스를 인수했다. 필리핀 공장 가동 이후 2000년에 국내 생산라인이 넘어가고 현재는 조정기에 부착하는 악세사리만 국내에서 생산한다. 한창 때 600여 명 3교대를 굴리던 공장에 지금은 생산직 45명만 남았다.

"당시 노조와 노동자들은 필리핀 공장 가동이 의미하는 것, 산업공동화의 광풍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죠. 결국 그 때 죽기살기로 막지 못하고 넋 놓았던 게 여기까지 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필리핀 공장이 자리 잡는데 3년이 걸렸다. 당시에는 모든 공장을 옮길 조건이 되지 않아 연구소를 중심으로 국내 공장을 유지했지만, 독일 멀티플렉스가 자리를 잡으면 자체 생산과 연구, 시장이 모두 갖춰지게 된다. 독일 동종 업체에서 준비된 노하우를 전수 받는데 길어야 3년은 넘기지 않을 거라는 것이 김혜진 위원장의 판단이다. 내년이면 그나마 이 공장도 문을 닫을지 모른다는 의미다.

"개별 단사 싸움은 이미 넘어선 거라고 봅니다. 물론 우리가 적극적으로 싸우는 게 중요하지만 산업공동화를 원칙적으로 막아내기 못한다면, 그 가닥을 전체 노동운동에서 잡지 못 한다면 우리 뿐만 아니라 전체 제조업에 전망은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더 힘든 거구요."

"대부분 장기투쟁 사업장은 소규모 사업장인 경우가 많죠. 그러다 보니 버티는 거 말고는 방법이 안 보이는 상황이구요. 장투 사업장이 생기면 어느 정도 붙어서 연대하다 정리되는 분위기죠. 하지만 어느 정도가 아니라 얼만큼 제대로 싸우느냐가 중요한 거 잖아요? 결국 비슷비슷한 고리들을 같이 묶어서 사회적 쟁점으로 만들어야만 하는데 그런 흐름들을 만들지 못하는 게 한계죠."

장기투쟁 사업장이 징계에 손배가압류의 수순을 밟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하이텍 노조에서도 그 경우까지 감내할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측이 손배가압류를 하려고 할 때 마다 배달호 열사와 김주익 열사 등의 투쟁이 있었고 손배가압류가 사회적 쟁점이 되는 바람에 아직까지 손배가압류는 하지 않은 상황. 결국 열사들의 죽음이 자신들의 투쟁을 지켜준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사회적 투쟁과의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런 아픈 경험에서 새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합원들은 전국의 어느 집회고 가능하면 찾아 연대했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였다.

"작년 손배가압류 투쟁을 밀어 부쳐서 끝장을 봤어야 했어요. 열사 정국을 개별 단사 타결의 문제로 마무리 지어서는 안되는데... 전 노동자의 절실한 투쟁을 그렇게 상층에서 무력화 시켰다고 봅니다."

"하지만 분명히 성과도 있죠."
"초반에 우리가 악으로 투쟁을 할 때 니네 꼴통아니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죠. 심지어는 민주노총 사업장에서도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3년 동안 천막농성에, 아침마다 출근투쟁에, 목요일 연대 집회에, 토요일마다 지역 선전전에, 지방 순회투쟁까지 정말 악에 받친 투쟁을 진행하면서 이제는 다른 사업장에서 부당노동행위 상담을 해올 정도로 하이텍 노조는 지역 투쟁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가끔은 스스로 운동을 접고 떠난 지역 활동가들이 잊을만 하면 노조를 찾아온다고 했다.

"댓가를 바라는 연대는 아니지만, 연대의 노력들이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적어도 니네가 있어서 우리 노동조건이 더는 악화되지 않는 거라는 인정을 하고 있는 거구요." 심지어는 지역 경영단 모임에서 하이텍 사측에 왜 빨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주변에 악영향을 끼치냐는 압력이 들어올 정도라고 한다.

현재 하이텍에서는 개악된 근기법대로 주 5일을 시행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평균 근속 연수가 7년에서 18년에 달하는 노동자들로서는 연월차와 생리휴가 등 수당문제가 당장 눈앞의 문제다. 노동자들은 차라리 주말에 일을 하겠다고 하고 있고, 주 5일제와 관련된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노조에서는 주 5일을 매개로 비조합원들을 설득하는 선전과정을 준비중이다.

"비조합원들이 표면상으로는 노조에 적대적이지만, 실리상으로라도 아직 노조가 싸우고 있어서 그나마 조건이 더 나빠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죠. 단지 본인들이 움직이지 않으려는 거구요."

김혜진 위원장은 공장의 완전 이전까지 점쳐지는 상황이지만, 외적 변수가 아직 있다고 보고 있다. 작년 9월 독일 금속노조의 도움으로 노조는 독일에 가서 기자회견을 하고 신문에 관련 기사를 냈다. 이 일로 회사는 독일 금속노조 위원장과 신문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만약 회사가 독일 재판에서 패소하고 행정심판에서 다시 전원 복직 판결이 난다면 해외 이전의 상황이 뒤짚어 질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그래서 현재 진행 중인 조합원들에 대한 형사재판에 공을 많이 들이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법이 뭘하겠어요." 하고 잘라 말한다. 법이 해결해 주기를 한치라도 기대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지난 2년의 투쟁으로 법이란 있는 자들의 시간 벌기 방패라는 걸 몸으로 배운 결과다.

"후회요? 나 뽑은 총무과장이 제 손 찍어야죠."

김혜진 위원장은 97년 생산직 채용 마지막 해에 하이텍에 입사했다. 그때가 28세. 바로 옆 전구 만드는 회사에 다니다 회사가 이전하는 바람에 퇴사했다. 노조는 힘 한 번 쓰지 않고 회사가 문닫는 걸 그냥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전에 있던 사업장들에서 싸우는 노조가 없어서 노동운동을 접할 기회는 없었지만, 새파랗게 젊은 30대 관리자들이 50대 아줌마들에게 반말하고 무시하는 걸 잘 못 보아 넘기는 성미라 관리자들과 개인적인 다툼이 잦았단다. 그리고 싸우지 않는 노조가 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번은 식당서 밥 먹으러 줄 섰는데 양복 말끔히 입고 작업잠바 걸친 사람이 수고한다고 어깨를 잡더라구요, 그러면서 앞줄로 새치기 하길래 저건 뭐냐 싶었는데, 알고 보니 노조 위원장이데요."

전 회사가 문을 닫고 휴가 중에 하이텍에 입사지원 했다가 자리가 없어서 다른 곳을 알아보던 중에 나중에 자리가 나서 입사한 지금 사무장이 총무과장에게 부탁을 해서 입사를 했단다. 사무장 원망은 안 했느냐는 질문에 "에휴, 우리 뽑은 총무과장이 제 손 찍어야죠"라며 호탕히 웃는다.

"운도 없지, 입사 1년 만에 회사에서 30% 정리해고를 하는데 입사 역순으로 하니 영순위더라구요. 멋모르고 사직서 썼던 사무장은 그때 위원장에게 무지 욕먹고 한겨울에 다시 복직투쟁하고 저는 정리해고 거부투쟁을 했어요." 결국 정리해고 대상자 중에서 김혜진 위원장과 사무장만이 회사에 남게 되었다. 김혜진 씨는 98년 12월 조인식 이후 정기총회에서 위원장으로 당선이 되었다. "위원장은 2년 임기에 연임만 가능해서 2002년 임기말이었는데. 2002년 투쟁이 안 끝나서 6년째 위원장을 하고 있네요"라며 연신 큰 소리로 웃었다.

"조합원들이 아줌마들이라 사소한 것에 삐지고 질투하고 그렇죠. 때로는 어째 이 정돈가 서로 실망하기도 하고 그러는데요, 그러다 되돌아보면 그런 과정을 같이 겪고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요. 큰 신뢰가 있는 거죠."

김혜진 위원장은 2002년 막바지에 조합원들과 술 마시며 얘기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활동가도 아니고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고 생활을 꾸려야 하는 사람들인데 이제 놓아줘야 하는 게 아닌지. 한 사람 한 사람 가정사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다른 회사를 간다해도 달라질 게 무언지, 여기서 넘어지면 다시는 인간답게 일어설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함에 대해 조합원들에게 솔직하게 말했고, 결국 조합원들이 동의해 주었을 때 정말 너무 고마웠다고 했다. "이제는 애써 얘기하지 않아도 같은 생각이라는 거 서로 알고 있어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짧지 않은 인터뷰가 끝나고 김치볶음밥까지 푸짐히 얻어먹은 기자는 김혜진 위원장과 부위원장의 사람 좋은 인사를 뒤로 하고 노조사무실을 나섰다. 그 좁은 노조 사무실을 집 삼아 버텨온 2년 생활. 아무리 당당하고 기운차게 지난 투쟁을 풀어주었어도 그 시간의 험난함과 애틋함을 뉘라서 모를까. 혹은 뉘라서 그 지난함을 마저 알까. 그러나 그녀들의 애틋한 투쟁이 애잔하지 않은 이유는 주저앉지 않고 기다리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자신들의 투쟁을 긍정하고야 마는 생명력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며 자꾸만 싸해지는 마음을 다잡아 가리봉 공단을 벗어 나왔다.

[장기투쟁사업장특별기획①]"비정규노조도 끝내 승리했다는 기록 남기고 싶습니다"
[특별기획] 장기투쟁 사업장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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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낮별지기

    투쟁 에 꼭 승리 하시길 바랍니다

  • 노동자

    이글을 읽고나서 다시한번 투쟁의 마음가짐을 가지게되는
    동기가 됐습니다.
    이젠 내가 무엇을해야할지도 또한 되새김을 했구요.
    초청 또는 방문하여 체험담을 듣고 싶은데 방법은 있는지요.

    승리의 그날까지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