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개월, 해방 이후 해고 관련 최장기 대법원 계류

[인터뷰] 김석진 씨, 조속한 판결 요구 대법원 앞 무기한 1인시위 돌입

한 사람의 인생에서 8년이란 시간의 무게는 얼마 만큼일까? 더구나 그 시간이 자신에게 가해진 부당함에 대해 홀로 맞서야 하는 시간이라면... 두 아이의 아버지인 가장에게 기약없이 늦춰지는 35개월이라는 시간은 어떤 기다림일까? 뇌사 상태에 빠진 노모를 병원에도 모시지 못하던 시간, 아침바람에 나가 저녁 늦게 까지 발품 팔아 5~60만 원을 받아 돌아오는 아내를 바라보며 지내야 하는 시간이라면...

여기 서른 일곱에 노조활동을 이유로 해고되어 마흔 다섯의 새해를 맞는 한 노동자가 있다. 그는 지방법원, 고등법원에서 승소를 하고도 무려 35개월 대법원의 판결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개인의 해고무효확인소송으로는 해방이후 최장의 기록이라는 대기 시간. 그 긴 기다림에 지친 그가 서울 대법원 앞 1인 시위를 시작했다.

1인 시위를 시작한 5일 오후 12시, 오가는 행인 드문 대법원 앞에서 울산현대미포조선 해고자 김석진 씨를 만났다.

더 이상 무너지는 가족 생계 바라볼 수 없는 절박한 심정

80년 입사해 대의원 등 활발한 노조활동을 벌여오던 김석진 씨는 지난 97년 해고됐다. 회사 쪽이 내세운 해고 사유는 ‘상사명령불복종과 홍보물에 의한 회사명예훼손’이었다. 그러나 조합원을 대표하는 대의원으로서 담당과장과 회사 쪽의 작업시간 통제에 항의하며 언쟁을 벌이고 정기적인 홍보물을 발간한 것은 정당한 조합활동의 연장선상이라는 게 김씨의 주장이다.

해고 후 회사 정문에서 180여 일간 철야노숙과 43일간의 단식농성까지 벌이며 해고의 부당함을 끊임없이 알려나갔고, 2000년 울산지방법원과 2002년 부산고등법원에서 복직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회사는 김석진 씨의 복직을 거부하고 대법원에 상고, 대법관출신 변호사까지 고용해 1, 2심과 대동소이한 내용의 자료들을 거듭 제출하며 재판 일정을 끌고 있다.

개인의 생존권이 달린 해고무효확인소송이니 길어야 1년이면 결과가 나오려니, 부당한 이유로 해고되어 고등법원까지 승소했으니 좋은 소식이 있으려니...

하루를 한 달같이 기다려온 대법원 판결은 35개월간이나 미루어지고 있고, 하다못해 재판이 이렇게까지 길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도 대법원은 침묵하고 있다. 지난해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 과정에서도 김석진 씨 관련 대법원 장기계류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돌아온 것은 “의도된 장기화가 아니다”라는 김석진 씨로서는 들으나마나한 답변이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기에 김석진 씨는 단신으로 서울로 상경했다. 우선은 대법원 1인시위를 시작하지만, 그는 이번 참에 확실한 결과를 얻을 때까지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제사회단체들을 만나가며 대법원을 압박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생각이다.

해고 싸움에서 단 1원 금전적 이유로 원칙을 타협해서는 안 된다

김석진 씨가 버티는 이유는 간명했다. “부당하게 해고되었으니, 정당하게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

힘든 해고 싸움을 진행하다보니, 누구보다 강인하게 해고싸움에 앞장서 만나왔던 동지들이 어느 순간 회사의 금전적 회유에 복직을 포기하고 타협을 하는 모습도 보곤 했다. 그 결정까지의 삶의 고단함을 왜 모를까마는 김석진 씨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부터 우리 동지들 해고의 이유가 무엇이었나, 노동자로서 굴종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해고 생활을 지속하는 이유는 원칙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힘들면 쉬어갈 수도 있다. 생계투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해고 싸움에서 단 1원으로라도 금전적 이유로 원칙을 타협해서는 안 된다”

“평범하고 순수하게 가면 된다. 부당하게 해고 되었으니 복직을 요구하고, 복직이 결정되면 복직하면 된다. 복직 안 시키면 머리 허열 때 까지 싸워야 한다”고 김석진씨는 말한다.

“복직을 포기하고 다른 활동을 한다면 그건 사기다. 자격이 없는 거다”

처음에 해고싸움을 시작할 때야 주변의 관심과 연대가 있지만, 어느새 주변을 둘러보면 혼자만 덩그러니 남게 되는 해고 투쟁. 주변의 해고자들은 술이라도 한잔 하면 민주노조운동 전반에서 쇠락한 연대의 기풍, 그로 인한 사법부와 자본의 노동자에 대한 무시를 한탄한다. 그러나 어쩌랴, “해고 투쟁이 원칙이라면 나 혼자 남더라도 나 혼자 나자빠져 넝마가 되어도 가는 거다. 내 자신 하나 보고 올바르다 생각하면 가는 거다. 필요하면 찾아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만 연대하면 고맙고 안 해주면 할 수 없는 거다. 그걸 핑계로 접을 수는 없는 거다”

또 하나, 해방 이후 최장기 대법원계류 해고무효소송이라는 상징성도 있지만, 김석진 씨는 자신의 복직투쟁이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미포조선에는 현재 불거진 해고 싸움만 두건이다. 둘 다 학력허위미기재가 사유다. 98년 IMF 이후 대졸자 취업이 안 되자 직업훈련소에서 자격증을 따 미포조선에 입사해 일해 온 노동자에 대한 회사 측의 해고에 대해,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까지 복직결정을 내렸다. 중노위결정이 내려질 경우 복직을 시킬 것을 명기한 단협까지 무시하며 역시 회사는 대법원까지 밀어 부친다고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수치 확인은 안 되었지만 미포에는 이런 노동자가 꽤 많다는 것이 김석진씨의 설명이다. 이런 선례들 앞에 노동자들은 조합원이지만 노동운동의 노자도 못 꺼내는 위축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해고를 무기로, 그리고 해고문제에서 철저히 약자인 노동자들의 처지를 이용해 무작정 시간을 끌며 해고자들이 나가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회사들. 그러다 대법원 확정 판결이라도 나면 복직이 아닌 임금보전만을 하며 현장으로부터 끝까지 노동자들을 격리 시키는 자본의 행태는 결국 노동자들이 현장에서의 움직일 수 있는 건강함을 수족부터 잘라내는 파렴치함이기에 기필코 현장으로 돌아가는 결과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조합원들의 분노는 살아있다

지난해 8월 현대미포조선노조 대의원 66명(총 대의원 72명)과 회계감사 1인은 “김석진 해고자가 복직된다면 8년 무분규의 전통을 이어온 우리 회사의 산업평화를 파업 등 파행의 노사관계로 몰고 갈 것”이라는 내용 등의 진정서를 대법원에 제출했다.

김석진 씨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이후 현대미포조선 노조에서 그 같은 서명이 조합원들의 뜻이 아님을 밝히는 선전물을 내보내며 사태 진정에 나서기도 했다. 언론을 통한 기사화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해당 대의원들로부터는 어떠한 연락도 없었고, 김석진씨 역시 더 이상 대의원들과의 대화가 의미 없다고 생각해 별도의 연락을 취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8년 연대를 얘기하는 현장에서 그런 진정서가 나올 수가 있냐?”는 조합원들의 분노도 있었지만, 그것이 집단적인 활동으로 모아진 바는 없다.

그러나 김석진 씨는 전반적으로 얼어붙은 현장을 이야기하며 연대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노조 간부, 활동가들의 말을 단호하게 비판한다.

“나라가 막 가면 그것이 국민의 잘못인거냐, 하늘같은 대중이다. 현장에, 미포에 물어보라. 열이면 열, 조합원들의 분노는 살아있다. 활동가들이 제대로 못해서 대중이 활동가들을 신뢰하고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87년 이전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죽임을 당한 수많은 분들을 기억한다면,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말아먹은 책임을 소위 선진 활동가들은 조합원 앞에 석고대죄하고 반성해야 한다”

60만 원 벌러 화장품 외판 나가는 아내

서른일곱에 해고되어 마흔다섯. 그 사이 뇌사상태에 빠진 모친은 중환자실에도 입원하지 못하고 집 안에서 부인과 김석진 씨의 간호를 받다가 2002년 사망했다. 고무호스로 30분 단위로 가래를 뽑아내야 하는 간호를 24시간 맞교대로 해야 했다. 4년간 집 밖을 출입을 못하던 아내(한미선)는 모친상을 치루고 바깥세상으로 나갔다. 가족의 생계를 위한 화장품 외판을 위해서다. 남들이야 차를 타고 다니며 기 백만 원도 번다지만, 다리품을 팔아가며 워낙에 없는 말솜씨로 외판을 하자니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 넘게까지 다녀도 수입은 5~60만 원.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도 아픈데, 입술 터져가며 고생하는 아내는 싫은 소리 한 번이 없다. 운동을 해 온 사람도 아닌데, 아내는 부당하게 해고된 남편이 복직되는 것이 당연한 순리라 힘을 주고 있다.

“다니다 보면 어찌어찌 미포조선 조합원 집에도 가게 되는데, 그 아저씨 부인이냐고 수금도 잘해주고 소개도 해 준다”며 소소한 재미를 얘기하기도 한단다.

중기회사, 샷시 공장 보조, 기계수리, 용접, 배달, 양말판매 등 시간이 나는 대로 일하면서 생활비와 변호사비, 병원비를 마련해야 했던 시간. 아이들 학원 공부시켜주는 것이며, 명절이면 쌀가마니로, 간간히 생활비 보태는 것까지 울산에서 동료들의 도움이 있지만 그래도 생활고에서 오는 부침이 있을 법도 한데, 가족을 말하는 김석진 씨의 얼굴에는 그늘 없는 미소만이 보인다.

“활동가들 만나면 항상 얘기하는 것이 있다. 활동가들이 목소리가 쎈 데, 그 쎈 목소리는 정권과 자본과 싸울 때 만이면 된다. 집 문만 열고 들어서면 가장 약한 사람이 되면 가정 지키는 거다. 아침 6시면 밥을 차리고 아이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고, 아내를 깨워 같이 나간다. 그리고 각자 일을 찾아 간다”

어디 행사장에서 고기라도 남으면 싸달라고 해서 집으로 가져와 식구들에게 먹이지만, 부끄러움은 없다. 한다고 해도 쌓이는 것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지만, 아빠 서울 올라간다고 열심히 투쟁하고 오라는 소연이(중학교 1년), 승연이(초등학교 4년)를 생각하면 가슴은 한가득 희망이 차온다.

대법원의 ‘자유, 평등, 평화’

인터뷰를 마치며 김석진 씨는 “2월 28일이면 담당 대법관 퇴임인데, 그전에야 결과가 나오지 않겠나. 잘되면 소주 한잔 사겠다”며 활짝 웃었다.

김석진 씨가 원했던 것은 노동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며 노조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였다. 그가 원했던 법 앞의 평등은 물질적 절대적 우위를 가진 이유로 법원의 판결마저 거부하는 사용자의 실질적 폭력에 대해, 노동자의 생존권이 무너지지 않을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상식적인 판결의 진행이었다. 그가 원하는 평화는 사용자의 입맛대로 길들여져 자신을 버림으로 나오는 평화가 아니었다.

김석진 씨가 1인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대법원 건물 뒤로 선명한 ‘자유, 평등, 평화’라는 문구의 의미가 새삼 궁금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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