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십년 굶고 나니 ‘따끔한 한 잔’이 먹고 싶어”

[인터뷰]‘이야기 소설 창작 발표회’ 앞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다음달 6일 ‘이야기 소설 창작 발표회’를 앞두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과의 만남에 적잖이 주저했던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집회 등 열린 공간에서 마주했거나 확인되었던 바, 온몸으로 말한다는 비유가 증명하는 백기완 소장의 역동적 자기표현을 ‘인터뷰’를 매개로 글로 옮길 수 없어서가 한가지(물론 어떤 인터뷰이나 그렇지만). 더 까놓고 말하자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뭔가’를 글로 담을 수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 부족 탓이다.

또 열 마디 중 다섯 마디가 ‘되먹잖은’ 영어로 자리 잡은 언어습관이 원인이었다. 간격을 두고 만난 지인들이 한음절도 틀리지 않고 주의했던 그 말 “절대 영어는 사용하지마!마!마!마!”, 가 여전히 귓가를 맴돌지만 주책 맞게 튀어나올 ‘인터뷰..읍’, ‘카메라 기자가..읍’ 등을 목구멍 뒤로 넘기면서 ‘배부를’ 부담감이 작용했던 까닭이다.

결과적으로 백기완 소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그 사연은 그다지 극적(?)이지 않다. 최근 독파한 백기완 소장의 소설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전개되는 투가 실마리가 되었고, 며칠 간격으로 백기완 소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한 ‘연합뉴스’, ‘프레시안’에 비한다면 매 한 대는 벌었다는 위로가 또 한몫했다.

  /김용욱기자

지금 이 순간까지도 A4 몇 장에 그를 꾸겨 넣고 있지만, 두 번의 시도가 좌초된 후 처음으로 진행되는 온몸으로 빚는 이야기 소설 ‘말림’은 그동안 글이라는 형식에 제한되었던 그의 역동성, “말로 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던” 그의 열정이 분출되는 어찌보면 유일한 공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뒤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 하겠지만 그는 “무슨 이야기할 때는 글을 모르니깐 말로 할 수밖에 없지. 글을 모른다고 해도 말로 하지 않고서 배길 수 없는 거야. 말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청기와색 기억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통일문제연구소’ 밑에 손바닥 크기만 하게 써 있던 ‘노나메기’라는 빨간 글씨였다. 백기완 소장의 소설에 등장하는 숱한 ‘우리말’ 가운데서도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사는 삶터. 뺏는 놈도 빼앗기는 놈도 없이 올바로 잘 사는 삶터’를 의미하는 ‘노나메기’가 유독 마음에 들었다는 까닭 없는 반가움이었다. 그리고 ‘노나메기’와 ‘참세상’과의 유사점에 목매는 일종의 ‘직업의식’이기도 했다.

파란대문, 개조한 한옥집 앞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사람은 역시 통일문제연구소 채원희 씨였다. 채원희 씨의 안내를 받아 대면한 백기완 소장은 단청색 겨울 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목소리는 쨍쨍했다. 옷 색깔 때문인지, “‘우리말에 대한 고집’이라고 볼 수도 있는...”이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대체 어떤 놈이 그런 소리를 해!!”라며 호통을 치던 그가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전히 그는 ‘청기와색’으로 기억된다.

최근 ‘우리말’ 사용에 적극적인 칼럼리스트도 있지만, 백기완 소설에서 접하는 ‘우리말’은 저항언어라는 냄새가 강하다. ‘배알튀(저항심)’, ‘아리아리(없는 길을 찾아서 가다)’ 등 구체적인 우리말들을 언급하자 백기완 소장은 자세를 고쳐 앉고 ‘우리말’에 대한 애정(?) 혹은 열정을 발하는데, 그의 또 다른 ‘무엇’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김용욱 기자

지난 53년 달동네로 한번, 그 이듬해 터널의 우리말인 ‘맞뚜래’로 또 한번, ‘우리말’을 생활에서 이어갔던 그의 일상에 대하여 군사독재는 거꾸로 매달고, 때리는 것으로 화답했다. 백기완 소장은 “민족문화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인류문명, 인류문화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지켜간다”고 전했다.

“말림이 있음으로서 이야기의 역동성과 생명력이 살아나는 거야”

그러나 무엇보다 70세 백발이 성성한 백기완 소장의 역동적인 활동의 절정은 바로 이번 이야기 소설 창작마당이라고 볼 수 있다.

“말림이 어떤 건가요?”
“말림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이야기투야. 요새말로 하면 이야기 소설의 원조지 뭐. 글을 모른다고 해도 말로 하지 않고서 배길 수 없는 거야. 말하고 싶어서. 글을 모르더라도 그 말을 남에게 이야기 하고 싶어서 하는 이야기를 말림이라고 해. 말림은 어떤 모양새냐! 말림은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말해. 눈으로도 말하고 손짓으로도 말하고 몸짓으로도 말하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을 말림이라고 해. 소설의 원조가 이야기라고 하면 이야기의 형식은 말림이라는 소리가 되니깐.

  /김용욱 기자
말림이 있음으로서 이야기의 역동성과 생명력이 살아나는 거야. 그런데 근대로 접어들면서 소설 형식으로 이야기가 바뀌어 가는데, 글로 바뀌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 갖는 의식의 한계가 이야기의 내용을 규제했단 말이야. 그리고는 소설 형식의 그 꾸밈새가 글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품새는 어느 정도 높아졌지만, 그 역동성과 박력은 다 잃어버리게 되었어. 꼭 해야 될 이야기의 형식이 말림이라고 하면 그 말림을 되살려야 한다는 이야기야. 말림 형식이 죽었다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과 형식이 의도적으로 변질되지 않으면 죽었다는 얘기도 되거든. 그래서 이 시점에서 우리 이야기 소설의 정통성을 살려보는 것이 어떠냐는 이런 생각에서 이번에 이야기 소설을 창작 하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려 하려는 거야”

“수십 년 굶어보면 기름이 찰찰 흐르는 쌀밥에다 따끈한 미역국이 먹고 싶기보다도 따끔한 한잔이 먹고 싶어”

지난 69년과 70년 두 차례에 걸쳐 ‘말림’이라는 틀로 이야기 소설을 꾸려보려는 시도가 좌초된 후 37년, 2006년 12월 6일 대학로에서 늦은 7시부터 진행될 첫 이야기 소설이 진행된다.

“말림 두 번의 시도가 있었는데 좌초된 것으로 압니다”
“1969년도에 장산곶매라는 우리의 전통적 서사시를 가지고 말림을 꾸밀려고 했어. 1969년 가을이었지. 그때 박정희라고 못된 짓을 하던 군사양아치가 대통령을 오래 하려고 헌법을 고치는 범죄적인 음모를 자행하고 있었어. 3선개헌이야. 3선개헌 음모를 때려 부수는 운동이 벌여졌거든. 내가 그 운동에 앞장을 섰었어. 그 바람에 이야기 소설을 창작하려던 의도가 일단 뒤로 좀 밀렸어. 그 다음해 1970년도에는 전태일이 박정희 군사독재가 강행하는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모순, 사회적 모순에다가 불을 지르는 사태가 벌어졌어. 그때는 전태일 동지의 뜻을 받들자 라는 싸움에 가담했거든. 그 바람에 이야기 소설 창작은 또 뒤로 밀리고 말았어. 그러다 보니 세월이 40년 흘렀거든. 이제 다시 못해보면 말림이라는 이야기 소설의 뿌리가 아주 없어질 것 같아. 조건도 형성이 안 되었지만 너무 늦으면 힘들 것 같아서 이번에 무리하게 이야기 소설 발표회를 갖는 거야”

이번에 시도되는 이야기 소설은 ‘따끔한 한잔’이다. 이쯤 되면 ‘따끔한 한 잔’이 생각난다는 것인데, 자본주의 속에서 수십 년간 굶주린 한 주체적 인간이 쭉쟁이로 남는 온 과정을 담은 이야기라고 한다.

  /김용욱기자
““죄송합니다. 따끔한 한잔,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번 이야기 소설은 어떤 것인가요?”
“야 임마 아직 출판되지 않았는데, 당연히 못 봤겠지”
“따끔한 한잔 뜻부터 알아야 돼. 따끔한 한잔이랑 따끈한 한잔이랑 똑같애. 마시면 목이나 속이 따끔할 수도 있고, 따끈할 수도 있거든. 이번에는 따끔한 한잔이 좋을 것 같아서 따끔한 한잔으로 했어. 사람이 배가 고프면 말이야. 근데 젊은이 배고파본 적 있어?”
“예 배고파본 적 있지요”
“왜 부모님이 밥 안해줬어?”
“꼭 그렇다기 보다 아빠가 학교 해직되시면서 몇 해 배고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거 같고 안돼. 1달 내내 굶고, 1년 내내 굶어도 그것도 배고픈 거라고 할 수 없어. 10년, 20년 내내 굶주려보면 말이야 사람 몸에 이상현상이 일어나. 감기 기운이 들지도 않았는데 열이나. 춥고 떨려. 그리고 맞았던 자리가 다 쑤셔. 근데 그때는 딱 뭐가 먹고 싶으냐”
“돼지기름데이?”
“어떤 사람은 기름진 쌀밥에 따끈한 미역국이 먹고 싶다고 말해.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딱 1달 굶어보고, 1년 굶어본 사람이 그렇게 말해. 수십 년 굶어보면 기름이 찰찰 흐르는 쌀밥에다 따끈한 미역국이 먹고 싶기보다도 따끔한 한잔이 먹고 싶어. 그래야 열도 없어질 것 같고, 온 몸이 쑤시는 것이 없어질 것 같아. 자본주의 사회에 살다가 수십 년 굶어보니깐 몸에서 열이 나고 매 맞었던 데가 자꾸 아프거든. 그래서 다른 것이 먹고 싶지 않고 술이라는 것을 먹어보지 못하고 살아온 70노인네인데, ‘따끔한 한잔’이 먹고 싶어. 쭉쟁이가 되는데, 이 현대 문명이 한 주체적 인간을 쭉쟁이로 만드는가 하는 온 과정을 이야기 하는 거야. 그리니깐 아주 평범한 일상적인 이야기야. 극적인 이야기 없어. 극적인 이야기라고 기대하고 오면 안돼. 현대 문명에서 허우적대다보니깐 남는게 하나도 없어 피도 안남고, 살도 안남고, 체면도 안 남고. 배짱도 안 남고. 단 하나 남은 것은 따끔한 한잔이 먹고 싶은 목마름만 남은 거야”

“듣는 사람들이 맥 빠지게 의무적으로 들으면 신이 안나가지고 하기가 싫어. 그럴 때는 난 그냥 안하는 사람이야”

너른 마당에서 대중과 만나던 백기완 소장을 대학로에서 만나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거기다 깜깜한 소극장이라는 것은 더욱 이색적이다. “나무 그늘 밑에서 하고 싶었어”라고 백기완 소장도 밝혔지만, 핸드폰 등 현대문명의 요소들은 “이야기 소설을 창작할 공간이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이쯤에서 따끔한 한잔이 먹고 싶은 일반 대중이 와서 들으면 좋겠네요?”
“그렇지. 너른 마당에서 하고 싶었거든. 그런데 자동차는 찍찍하고 당기지. 이 나라에 들고다니는 전화가 4천만대가 넘었어. 이야기 하다보면 전화받으러 나가요. 그럼 분위기가 깨지잖어. 그래서 할 수 없이 돈을 주고 조그마한 소극장을 빌렸어. 내 맘에는 안들지만, 이야기 소설을 창작할 데가 없어. 자리가 한정되어 있거든. 그래서 답답한 사람들 먼저 들어라 했어”

그러나 여전히 변수는 작용한다. “듣는 사람들이 맥 빠지게 의무적으로 들으면 신이 안나가지고 하기가 싫어. 그럴 때는 난 그냥 안하는 사람이야. 야 이놈들아 듣는 태도가 맘에 안들어 가! 라고 하는 사람이거든. 그런 상황이 올까봐 걱정이지 뭐”

총 180석 좁은 공간, “늙은이 보러 누가 거기까지나 오겠어”라는 백기완 소장의 우려와 달리 전국노점상연합회, ‘빠른 기차 승무원’ 철도노조 KTX승무지부에서 이미 100석을 채웠고 소식을 듣고 미리 연락을 해온 지인들이 또 100명, 대학로 갈갈이홀 소극장은 벌써 입추의 여지가 없이 가득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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