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삼성이 황우석에게 건네준 돈이 30억 원이고, 이건희 회장 아들 이재용 CCO가 에버랜드 전환사채로 벌어들인 돈이 2조2천억 원이고 이건희 회장의 시세차익은 2조2백억 원이다. 2005년 삼성은 자신의 이미지를 무마하기 위해 8천억 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매출액 141조, 작년 수출액 7백억 달러, 미국 시장 TV판매 1위 등 고질라 같은 삼성의 덩치를 생각해 보자. 삼성의 예의 사회공헌 활동 규모는 그야말로 껌값이요 생색내기용이다. 사람들은 작은 일에 감동을 받기 마련이다. 14억 인공와우수술, 143억 원 열린장학금, 얼마나 자그마한 감동 덩어리인가?
그러나 삼성은 자신들의 치부를 그 자그마한 감동으로 바꿔치기한다. 삼성이라는 브랜드 이미지에는 에스원 사태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듯이 무노조 황제경영이 은폐되어 있고 8천억 원 사회 환원은 이건희 부자의 시세차익을 바꿔치기하고 있으며 삼성은 대한민국을 대체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두고 우리는 환유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체, 바꿔치기, 은폐가 그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원리들인 셈이다. 우리는 지금 이 환유시스템이 생산해내는 환상 속에서, 삼성이라는 스펙타클 속에서 살아간다. 외국에서 삼성 간판을 보고 감격하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스펙타클에, 자그마한 감동에 기만당한 결과다. 프랑스의 기 드보르는 이런 것을 두고 스펙타클에 의한 세계의 날조화라고 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삼성 스펙타클에 의한 대한민국의 날조화다.
남북 전쟁 후 미국의 부와 권력을 싹쓸이한 떼강도귀족(robber barons)처럼 삼성은 한 편으로는 끈끈이주걱보다 훨씬 강력한 정관계-법조계-학계-언론-경제계 커넥션을 통해,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가벌(家閥)을 통해 사회적 공공성을 짓밟고 있다. 얼마 전 성대 교수사건에서 드러났듯이, 그리고 시사저널 직장폐쇄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삼성은 대한민국의 삶 전체를 총체적으로 점령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삼성 계열사 에스원 노동자 1700명이 대량해고 되어도 언론이 그 든든한 커넥션으로 보도하지 않으니 일반 시민들이 삼성이라는 스펙타클의 실체를 알 도리가 없다.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해 14억 원을 조성하는 동안 삼성은 금산법을 어겨가며 이제껏 에버랜드-생명-전자-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를 해왔고 이건희 부자는 그를 통해 삼성의 소유지배구조를 확고하게 다져왔다. 물론 작년 12월에 국회에서 통과된 금산법 자체가 외국투자자의 적대적인 M&A를 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등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우리 눈에 비치는 삼성이란 스펙타클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대량해고가 숨겨져 있다. 에스원 얘기만이 아니다. 1997년 IMF 직후 가장 먼저 노동자들을 자른 것이 바로 삼성 아닌가? 삼성이 경쟁력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렇게 선도적으로 나서서 대량해고의 메스를 노동자들에게 들이댔고 거기서 생긴 이익을 다른 부분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두고 신경영기법이라고 한다.
삼성은 기본적으로 기업이라기보다는 끈끈한 가족주의의 외연을 확장시킨 가벌 혹은 재벌이다. 다음과 같은 삼성의 또 다른 로고는 ‘가족주의’를 동원해 가벌에 바탕을 둔 재벌의 모습을 은폐하는, 재벌 혹은 가벌을 가족으로 둔갑시키는 전형적인 예이다.
삼성 이전에 대우재벌은 '대우가족'이라는 신문까지 만들었다. 김우중 회장은 대우의 노동자들을 가족구성원으로 대체 치환하고 노동자들을 가족처럼 ‘대우’한다고 하면서도 정작엔 대우 계열사 자금을 횡령하여 감옥으로 갔다. 삼성은 대우보다 한 술 더 떠 노동자들을 가족으로 대체 치환하기는커녕, 공격적으로 무노조경영을 내걸고 노동자 자체를 무시하는 오만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삼성은 철저한 서비스정신을 내세우며 소비자를 가족구성원으로 승격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삼성가족에게 있어서 소비자나 노동자는 비-가족일 뿐이다.
이와 달리 삼성 일가의 안을 들여다보면 재벌 혹은 가벌의 토대가 끈끈이주걱보다 더 강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이 도표에서 드러난 삼성 일가의 모습은 일부일 뿐이다. 이러한 삼성 일가의 모습은 가벌로 확장되는데 이러한 가벌 관계는 들뢰즈의 어법을 빌리면 일종의 ‘사회적인’ 근친상간의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근친상간은 영화 '올드보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정-관-경-검-언의 인적 네트워크, 유착관계라고 부드럽게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들이 국가권력, 경제권력 등 온갖 것들을 지배하는 권력과 자본의 근친상간 구조인 것이다. 근친‘상간’이 도덕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다면 이러한 ‘사회적’ 근친상간에도 부패의 온갖 형태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로고를 통해 보았지만 소비자를 부드러운 가족이미지로 호출하는 재벌이 사실은 이렇게 추악한 사회적 근친상간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 이것이 삼성의 처음이자 끝이라 할 것이다.
얼마 전 한 때는 삼성맨이었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재벌의 사회적 근친상간 구조에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김 변호사의 양심 고백을 받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한 사제로부터 “다 해 먹고 이제 와서 뭐 하는거냐”고 된통 혼난 김 변호사가 스스로 공범이었음을 고백하고 구속될 각오로 양심선언을 한 것은 우리 사회의 근친상간 구조가 얼마나 철벽 상태에 있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은행 차명계좌를 통한 비자금 조성을 폭로한 김 변호사의 내부고발로 다시 한 번 삼성재벌의 사회적 근친상간 구조가 밝혀졌다. 2004년에 삼성증권 사장이 우리은행장을 맡았고 현재 삼성화재보험사장이 우리은행장을 맡고 있으며 이학수 부회장이 X파일 관련 보고서를 청와대에 보내는 등 재벌-은행-청와대 등의 사회적 근친상간 구조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조의 폭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벌이라는 가족적 근친상간의 구조도 재벌-은행-청와대의 사회적 근친상간의 구조도 아니다. 떡값 검사 명단의 폭로는 더더군다나 아니다. 삼성 에버랜드 사건 때 재판장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라고 김 변호사를 종용한 사실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은행 차명계좌를 통해 암시되듯이 삼성이 금융실명제법을 위반한 것만이 아니라 금산분리 해체를 기도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보험업에 진출한 삼성이 은행 소유를 통해 금융까지 완벽하게 지배하게 되면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삼성‘공화국’이 되는 셈이다.
매출액이 국가예산 규모를 넘보고 김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 얘기를 하겠다고 하니까 검찰과 청와대가 더 설치고 나서며 '한겨레'를 제외하고는 언론들이 일사분란하게 쌩까기 전략을 구사하는 대한민국은 더 이상 대한민국이 아니다. 나라의 주권이 국민이 아니라 삼성, 그것도 이건희-이학수-이재용이라는 별 세 개에 넘어간 듯한 상황이니 말이다.
▲ 이정원 기자 |
이 정도면 대한민국은 파시즘 국가다. 폭주족이 거리를 오토바이로 폭주하듯이 별 세 개로 조직화되고 집단적인 폭력이 기존 제도의 틀을 무너뜨리며 분자적으로 폭주하는 것은 바로 파시즘이다. 국가 기관들을 능멸하고 무노조를 일삼으며 금융실명제를 위반하고 금산분리 해체를 기도하며 뇌물 준 사실을 미리 불지 않는다는 삼성의 그 ‘빛나는 전통’은 세 개의 별로 조직화되고 집단화된 경제폭력의 별 빛일 뿐이다. 별이 한 개도 아니고 세 개나 되니 그 별이 오죽 빛나겠는가?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고발로 단순한 재벌개혁, 재벌해체를 넘어서서 자본에 대한 민중통제, 파시즘 국가로 전락한 국가권력에 대한 견제가 절실히 요구된다.
언제까지 삼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관계, 언론계, 금융계, 정치계 등 사이를 돌아다니며 뇌물을 뿌리고 협박을 하며 폭주하게 놔둘 것인가? 삼성 안에서 대한민국의 헌법을 뺨치는 이건희 어록을 만들어 천황 노릇을 하고 이학수, 김인주, 이재용 등과 더불어 황실을 거느리며 스펙타클을 동원해 국민을 삼성맨으로 둔갑시키는 이 날조의 현장은 민중에 의한 삼성권력 해체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든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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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재 님은 대구카톨릭대 교수로, 본 지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