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데이,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석가탄신일, 518광주민중항쟁, 사람들이 잘 모르는 바다의 날까지 5월은 무슨 무슨 날이 왜 이리 많은지 복잡한 달력에 또 하나 기억해야할 날짜를 추가해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럽다. 그래서 5월 15일, 우리에게는 스승의 날로 익숙한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은 기억에 새겨지는 날이기보다는 바로 지금 평화를 위한 직접행동을 펼치는 날이기를 바란다. 마치 평화가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언어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삶의 양식인 것처럼.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 International)에 정한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은 전쟁을 거부하고 총을 들기를 거부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날이다. 병역거부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의 네트워크인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매년 병역거부자의 날에 핵심이슈 국가를 선정하여 국제적인 연대활동을 펼쳐왔다. 또한, 각국의 병역거부운동 그룹들과 평화주의자들은 각각의 국가적인 상황에 맞는 집중행동들을 펼쳐왔다.
▲ 2007년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행사 |
한국에서의 병역거부자의 날
오태양의 병역거부 선언과 2002년 병역거부 연대회의가 결성된 이후 한국에서는 시민사회에서 병역거부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군대와 평화의 문제는 개별국가 단위의 사고와 정치를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의 병역거부운동도 다른 나라의 병역거부 운동들과 활발한 연대활동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2003년 병역거부자의 날에는 병역거부자들의 모임인 ‘전쟁없는세상’이 결성되었고 그 당시 초점국가인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항의서한을 전달하였다. 그 후엔 해마다 초점이 맞춰진 국가에 항의 하고 해당 국가에 대한 내용과 한국의 상황에 맞는 세미나, 강연회, 캠페인을 비롯한 다양한 직접행동을 펼쳐왔다.
올해의 핵심 이슈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올해에는 특정국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대신 직업군인의 병역거부권을 이슈로 삼았다. 국민개병제인 한국에서는 직업군인의 병역거부권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미 많은 나라에서 징병제가 사라지거나 징병제 하의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는 유럽연합에서는 직업군인의 병역거부권이 병역거부운동의 새로운 영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미 역사적인 실효성을 잃어가는 유럽의 징병제도는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이 큰 셈이다. 광범위한 징병제도하에서 병역거부권을 요구하며 싸웠던 반군사주의 운동 그룹들은 이제 모병제의 신병모집이라는 새로운 조건하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고 있다. 주로 가난한 사람들, 이민자들, 무직자들을 타겟으로 삼는 신병모집의 거짓 신화를 깨뜨리고 이미 입대한 사람들의 병역거부를 지원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아직은 징병제가 절대 진리처럼 사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한국에서는 직업군인의 병역거부권은 먼 미래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현역군인들의 병역거부권 등과 맞물려 생각해볼 때,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 2007년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행사 |
한국의 병역거부 상황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건 이미 옛말이고 자고나면 천지가 개벽하는 한국사회에서 어느덧 병역거부가 사회이슈가 된지도 10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병역거부권을 위해 노력했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 기간에 감옥에 다녀왔다. 노력과 희생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개선들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2007년 9월 정부는 사회복무제의 일환으로서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를 2009년 1월부터 도입하기로 발표했다. 물론 예비군훈련거부나 현역병의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면이라던지, 대체복무기간을 너무 길게(유엔에서 권고한 적당한 대체복무기간은 현역병의 1.5배 이하이다. 한국정부의 발표안에서는 현역병의 2배이다.) 제시한 것 등 부족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시기상조만을 외쳐왔던 한국정부의 태도변화는 분명 커다란 성과이다. 하지만 그리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후보시절 병역거부에 대해서 분명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던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다수가 된 18대 국회는 앞날을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
2008년 병역거부자의 날에는 어떤 일들이?
2008년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이 집중하는 이슈인 직업군인의 병역거부권은 한국에서는 아직은 생소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푸르른 5월, 서울하늘 아래에서 병역거부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의 직접행동은 이어진다. 올해에는 5월 17일 토요일에 인사동 북인사마당에서 ‘병역거부권을 위한 평화놀이’라는 이름으로 평화난장이 벌어진다. 그동안 병역거부운동을 함께 해온 사람들이 공연을 하고 이야기마당을 펼치면서 병역거부자의 날과 병역거부권을 알려내고 수병역거부 수감자들의 소식을 전하고 전쟁으로 이득을 얻는 전쟁수혜자들을 폭로하고 감시하는 일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들처럼 평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타고 흘러넘쳐 우리 삶에 스며들기를, 2008년 5월의 병역거부자의 날 나지막이 온몸으로 되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