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터뷰5] 참세상은 촛불의 해를 보내며 2008년을 달구었던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봤습니다. 더 큰 촛불의 2009년을 전망합니다.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와 네티즌 안단테, KTX열차승무지부 김영선 상황실장, GM대우차비정규직지회 이대우 지회장, 기륭공대위 소속 '함께 맞는 비'의 이상욱에 이어 1월 6일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 순으로 이어집니다. - 편집자
지난해 여름 서울시청 광장과 청계광장을 달구던 촛불이 공권력의 봉쇄로 그 숫자가 줄어들 무렵인 7월말 인터넷에 한 제안문이 올랐다. “촛불과 비정규직 투쟁이 떨어져 있지만 교집합을 이뤄져야 한다”며 기륭전자분회 단식자들과 놀아주기, 동조단식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얼마 후 갈 곳을 잃은 촛불은 기륭전자 앞마당에서 다시 피어났고 기륭투쟁은 촛불이란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다.
‘씨니 or 요사’로 알려진 이상욱 씨는 애니메이션 프로듀서다. 최근 진보신당 대외협력국장이란 직함도 달았다. 그는 기륭투쟁으로 “뱃살과 여자친구를 얻었다”고 한다. 기륭분회 투쟁에 함께하면서 기륭분회 조합원이 날라주는 음식에 몸무게가 늘었고 기륭전자 앞마당에서 만난 한 여성과 얼마 전 연애를 시작했다.
대학 때 날리던 운동권이던 그는 “어느 순간 사람을 공기돌로 보는 괴물이 돼서” 혹은 “지쳐서” 운동을 정리했다. 10대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준비하던 그는 직업적 호기심 때문에 10대가 주축인 촛불집회에 갔다가 “경찰에게 다구리 당하는 모습을 보고” 촛불로 빠져들었다. 우연한 기회에 접한 기륭분회의 투쟁은 "미행(美行):비정규직철폐를 위한-미디어행동네트워크"로 이어져 비정규직 문제를 고민하게 했다. 2008년 마지막 날 진보신당에서 이상욱 씨를 만났다.
아래는 이상욱 씨의 인터뷰 전문이다.
기륭투쟁에 대한 제안문을 어떤 계기로 올렸나.
마음 맞는 감독과 스텝하고 애니매이션 만들자고 해 시나리오를 쓰는데 등장인물이 10대였다. 촛불 때 10대들이 촛불을 켰다고 해 궁금했다. 직업적인 궁금증이었다. 10대 감성을 잡는 게 힘들었다. 반년을 시나리오에 매달렸다. 결과적으로 촛불집회 가고 한 달 만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간 첫 날이 거리행진 첫 날이었다. 몰랐으면 모를까 촛불을 안 뒤 촛불집회를 안 갈 수가 없었다.
기륭분회 제안문을 올린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진보신당에 가입했는데 처음엔 종이 당원만 하려 했다. 그래도 온라인에서 나름 놀았으니까 심심해서 ‘영화와 책’이라는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한 회원이 책을 냈다. 저자는 회원들에게 꽁짜로 준다고 했다. 싸게 팔고 수익은 좋은 데 쓰자고 했다. 그 때 누군가 기륭이야기를 했다. 그 때 처음 알았다.
단식 45일 쯤에 1박2일 투쟁을 한다고 해서 갔다. 거대한 천막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작은 골목구석에 있더라. 다음 날 집회를 하는 데 20명 정도 앉았다. ‘영화와 책’회원이 7명이었는데. 운동권들 ‘뭐하냐’ 그러면서 온라인에 제안문을 올렸다.
촛불이 결합하면서 비정규직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지만 정작 기륭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촛불과 기륭의 만남은 비정규직 문제 혹은 기륭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떠올렸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촛불 때문에 더 힘들어졌다. 사회적 의제가 되니까 정권 차원에서 대응했다. 기륭 사측이 시끄러워서 타협해주려고 해도 어려워졌다.
기륭사측 안에서도 매파와 비둘기파가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매파가 득세한 게 경총이나 안기부가 개입한 배경이 있다고 안다. 냉정히 얘기하면 개별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조용할수록 좋다. 교섭으로 기업과 타협해야 하는데. 사회적 의제가 되면 정치투쟁이 된다. 개별자본이 움직일 문제가 아니다. 초기에 나도 이 정도까지 생각 못했고, 촛불시민도, 기륭분회도, 기륭공대위도 그랬던 것 같다. 정권이 그렇게 빨리 움직일지도 몰랐고.
▲ 촛불시민들은 작년 여름부터 기륭농성장에서 놀기와 투쟁하기를 함께 해왔다. |
강원도에서 날리던 좌파 운동권이었다고 한다. 운동을 정리한 계기는.
성격상 모 아니면 도다. 운동하면서 사람을 공깃돌로 보면서 소진되는 게 많아졌다. 집회 때 ‘밀어부쳐’ 이런 식으로 하면서. 그릇이 큰 사람은 그 속에서도 사람에 대한 신뢰나 진정성을 유지하지만 나는 괴물이 되고 있었다. 지금은 동희오토 지역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권수정이 그 때 친구였다. 수정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못하겠다고 하자 ‘그냥 지친거야’ 그러더라. 어머니가 아직도 입원해 계신데 그 때 쓰러지셨다. 가정형편도 어려웠다. 수정이 말대로 지쳤다.
안 하기로 하기도 했고 사회에서 자리 잡는 것도 중요했다. 10년 동안 신문 사회면을 보지 않으면서 살았다. 진보정당은 종이당원정도는 할 수 있었다. 민주노동당이 창당할 때 가입하라는 전화도 많이 왔다. 하지만 우파(자주민주통일 운동세력)와 함께 당을 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전화가 오면 ‘꼴 보기 싫다’며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
촛불집회는 10년 만의 집회여서 느낌이 달랐다. 노조나 단체들이 준비하는 집회와 분위기가 다르기도 했고.
이게 집회다 싶었다. 이런 게 대중 집회고. 두 번째 길거리로 나가 던 날 신촌에서 경찰에게 다구리 당했다. 그 와중에 길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궁시렁 거리고 난상토론이 벌어지고. 원래 이래야 되는 거 아니냐. 이게 에너지고 축제의 판인데.
운동진영은 여전히 자기 기획을 중심으로 고민하고 있다. 한편으로 오랫동안 깨지고 패배하면서 겁도 많아지고 소극적으로 변했다. 자기한계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오른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노동자의 힘 같은 경우 개인적 기대가 있어서 정치세력화 토론회를 꼬박꼬박 가기도 했다. 사회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실제 정치계획은 사민주의다. 사민주의냐 사회주의냐 이런 논쟁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운동진영의 어떤 면이 대중들과 호흡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나.
언짢을 수 있지만 대중에 대한 고민을 안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거다. ‘예전 방식으로 안 된다’면서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발언이 정말 짜증난다.
다만 경제위기 국면을 고용문제로만 접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노동자의 문제로만 치부될 테고. 결과적으로 타협해 대기업 정규직문제 고용문제로 정리될 꺼다. 고용+빈곤으로 가자는 거다. 고용문제만의 접근을 동의하지 않는 게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이야기해도 최저임금도 못 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최저임금법 개악과 상관없이 임금이 하락되고 있다. 운동진영은 조직가치가 있는 곳만 조직한다. 미행(美行)도 농공단지 할아버지 할머니 만나러 가자면 부담스러워한다. 우리가 보지 않아도 그들의 삶과 무게는 사라지지 않는다. 누가 보듬을 것인가. 좌파가 야기하는 부르주아 운동인 시민사회운동 세력이? 이들을 보듬지 않는 건 좌파가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은 놀면서 하는 게 당신의 힘인 것 같다. 결과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는.
좌파 한쪽은 ‘대중을 꼬드겨서 우리를 찍게 만들어야 돼’ 이러면서 계급과 계층에 대한 논리는 날려버린다. 또 한쪽은 ‘대중이라는 거는 하나가 아니야. 1급2급...6급이 있고 여기부터 차근차근 해야 되’는 논리다. 모두 동의하기 힘들다. 애매모호한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몰라. 나 놀래’ 이렇게 된다. 딜레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