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딸은 무엇을 꿈꾸는가

[배고프다! 영화] 지아장커의 <24시티>


<<글쓴이 고프 (Ghope)는 2006년 경향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최근 2년간 관악 공동체 라디오에 영화평을 연재했다. 앞으로 본지를 통해 영화에 대한 글을 써 나갈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영화 <스틸 라이프 Still Life, 지아장커, 2006>는 ‘정물’의 삶을 보여주었다. 정물화는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사물들을 가져와 일정한 구도를 만들고 그것을 화폭에 재현하는 그림이다. 정물화에서는 개별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 성질 못지않게 사물들의 배치, 즉 구도가 중요하다. 언젠가 세잔이 평생 마음에 들 정물화 한 점을 얻기 위해 고민했다는 일화를 들었을 때, 나는 이런 식으로 해석했다. 세잔은 개별 사물의 본래적 성질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사물들의 배치가 빚어놓은 질서를 상승시킬 수 있는 그림을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정지된 사물들이 추상으로 승화되기 직전의 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영화 <스틸 라이프>의 등장인물들은 화가가 재현하고자 하는 그림의 모델이 되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노동해야 하는 노동자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본질을 잊지 않으면서 또한 사회적 질서를 이룰 수 있는 형식은 곧 노동이다. 그러나 <스틸 라이프>의 노동은 아름다운 정물이 아니다. 자신들이 산 곳을 허물고 그 돈으로 삶을 연명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이기에, 어느 순간 자신들이 철거하고 있는 건물의 잔해들과 동일화되는 폐허들의 이야기이기에 영화 <스틸 라이프>의 삶은 그저 고요할 뿐, 아름답지 않다. 고요함에 가려 슬픔이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스틸 라이프>의 폐허와 노동자들은 사라지기 직전의 정물이다.

지아장커의 영화 <24시티 24Ctiy, 지아장커, 2008>를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지아장커가 청두에서 발견한 것은 고요한 정물이 아니다. <스틸라이프>에서 정물은 고요하였고, 외줄은 위태로웠으나 어쨌든 삶은 이끌리고 있었다. 비루한 삶이나마 한 무리의 노동자들은 담배를 나눠 피고 다음 일터를 향해 ‘무리지어’ 길을 나선다. 그러나 <24시티>에 이르러, 지아장커는 언뜻 보면 베이컨의 그림처럼 가죽 덩어리만 남겨두고 사라져버린 시대, 푸른 작업복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한 시대를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잔의 그림이 모든 것이 휘발되고 오직 본질만 남은 상태를 표현한다면 베이컨의 그림은 본질과 동일성이 해체되고 파괴되어 버려진 가죽 덩어리를 표현한다.) 현실 사회주의를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팩토리420’의 철거와 그 자리를 대신할 고급 아파트 ‘24시티’ 사이에는 환원 불가능한 무엇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부모님 세대의 중국 노동자들이 희망을 담아 불렀던 ‘인터내셔널가’와 ‘노동자의 딸’이 희망하는 고급 아파트 사이에 존재하기도 하며, <스틸 라이프>의 무리지은 노동자들과 <24시티>의 각자 삶을 개척해야 하는 개별화된 노동자들의 사이의 어떤 것이기도 하다.

사회주의의 약진 시대에, 약진의 발판이 되었던 군수공장은 하나의 완결된 세계였다. 그 안에서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삶이 해결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사회주의의 이상이 붕괴되면서 공장 안의 사람들은 푸른 작업복을 걸친 강철 덩어리와 동일시된다. 공장의 한쪽 구석에서 강철을 나르고 있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딸은 작업복을 입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작업복 속에서 전체화된 노동자들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아 보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회주의의 이상을 위해 작업복을 입고 쇳덩어리를 옮기던 어머니를 보고 딸은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장성한 딸은 부자들의 쇼핑을 대신해주며 돈을 모으고 있다. 그녀의 꿈은 그녀의 어머니를 고급 아파트 24시티에 안주시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이상이 한 세대를 거쳐 돈을 많이 버는 것으로 치환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시대는 무리지어 생활하고 노동하던 노동자의 삶이 개별화되며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사회주의의 이상과 돈을 많이 벌겠다는 꿈 사이, 그리고 팩토리420과 24시티 사이에는 거대한 격차가 존재하나 그것은 왠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 자연스러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혹자는 이 격차를 ‘역사의 종말’로 표현했었다. 자본주의의 승리와 사회주의의 패배, 현실 사회주의의 종식으로 그리고 역사의 종말이라는 문구를 통해 이러한 격차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설명되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이제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거짓 이상을 버리고 자본주의의 진짜 이상을 추구하기만 하면 된다. 노동자들의 연대는 각자의 임금을 올리고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한 개별 노동자간의 경쟁으로 치환된다. 그러나 지아장커는 이 격차의 자연스러움을 ‘역사의 종말’로 해석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팩토리420의 잔해와 24시티의 건설현장을 품은 청두를 비추며 자막을 올린다.

“청두,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지만 나에게 찬란한 삶을 주었다.”



‘청두’는 ‘사회주의’의 공간적 알레고리이니, 청두의 자리에 사회주의를 대신 집어넣어도 무리가 없다. 사회주의는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지만 찬란한 ‘삶’을 주었다. 지아장커가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이상이나 모순이 아니라 그 이상이나 모순을 겪으며 그 속에서 삶을 유지했던 인간의 모습이다. 군수물품을 만들기 위해 젊은 나이에 징집된 청년들에게도, 그 공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아이들에게도 청두는 사회주의의 상징이기 이전에 삶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삶은 찬란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혹은 팩토리420에서 24시티로의 ‘이행’은 곧 ‘앓음’이다. 한 시대의 이상과 모순을 견뎠던 사람들의 앓음, 그들의 통증을 이해하지 않고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영화의 형식이 ‘인터뷰’인 측면이 설명된다. 영화는 자체의 스토리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다만 팩토리420에서의 조업이 중단되고 철거가 시작되고 철거가 마무리되는 과정과 함께 팩토리420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던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담아낼 뿐이다. 팩토리420이 허물어지는 순간 그 공간을 공유했던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살 길을 찾아 떠나게 된다. 고향으로, 좀 더 경기가 좋은 곳으로, 팩토리420 자리에 들어서게 될 고급 아파트로 사람들은 저마다 떠나게 된다. 이러한 떠남은 팩토리420이라는 공간 내에서 존재했던 노동자들의 유대와 연대의 소진을 의미한다. 함께 밥을 먹고 출퇴근을 하며 같은 공장에서 일했던 그들은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인 관계로, 개별의 삶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과연 이것으로 끝일까? 아니, 이것이 끝이어야 할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떻게 끝나야 할까?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렸으나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몇몇 배우가 팩토리420의 노동자를 연기했거니와 더 중요하게는 지아장커의 설정과 연출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공장의 경비원이 철거 직전의 공장을 순찰한다. 그가 공장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는 동안 카메라도 그를 따라 공장의 구석구석을 관찰한다. 막 경비원이 프레임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어디에선가 날아온 돌에 의해 창문이 깨진다. 경비원을 따라 흐르던 서정적인 음악도 멈춘다. 이 순간에 지아장커의 의도, 아니 의지가 드러난다. 경비원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돌조각, 유리창의 파열음과 음악의 중단, 한 순간에 찾아온 연출된 공백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멈춰 세운다. 이 흐름은 팩토리420을 추억의 한 장으로 만들고자 하는 감상의 흐름이며 비루한 삶들의 식상한 연대기의 흐름이다. 외부에서 날아온 돌에 의해 이러한 흐름은 파괴된다. 마치 잔잔한 수면에 돌조각이 남긴 파문처럼 이제 생각이 퍼져나가야 할 순간이다.

지아장커는 <스틸 라이프>에서 ‘마지막 순간’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세잔이 그랬던 것처럼 구상과 추상이 자리를 맞바꾸기 직전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것은 ‘마지막’의 순간이 아니다. 본질이 그 형상을 맞바꾸는 순간을 우리는 간혹 본질의 마지막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교체되는 것은 형상일 뿐, 본질은 사라진 적이 없다. 비록 철거된 팩토리420이 베이컨의 그림에서 가죽덩어리가 그랬던 것처럼 본질이 파괴된 ‘덩어리’로만 여겨지지만, 팩토리420과 24시티는 낡은 가죽과 비싼 가죽을 각각 걸치고 있을 뿐 사람들의 삶이 재현되는 곳이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팩토리420과 24시티 사이에는 이곳이 삶의 터전이었다는 경험이 공유되어야 한다. 이러한 공유 없는 철거와 건축은 콘크리트 덩어리의 교환에 불과하다. 그곳에서 부자가 살건, 가난한 사람이 살건, 노동자의 딸이 살건 그곳엔 삶이 있어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는 ‘찬란한 삶’을 남기고 소진되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자본주의가 다시 ‘찬란한 삶’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팩토리420은 철거되고 철거작업과 동시에 24시티는 건축되고 있다. 그러니 지아장커는 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흐름을 잠시 멈추더라도 본질이 무엇이었는가는 생각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찬란한 삶’이 현재의 것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노동자의 딸이 꾸는 꿈은 무엇인가? 그녀의 부모님을 다시 24시티에 입주시키겠다는 자신감의 근원에는 “나는 노동자의 딸이니까요.”라는 선언이 존재한다. 노동의 긍지,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오는 노동하는 삶, 삶의 공유는 현실 사회주의와 현실 자본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강력한 본질을 형성한다. 그러나 작업복을 걸친 쇳덩어리의 딸은 정말로 귀환할 것인가? 24시티는 그녀의 가족을 반갑게 맞을 것인가? 개별화된 삶이 아무리 그 본질을 지속시키는 영속의 운동을 진행한다 하더라도 언젠가 그것은 경쟁으로 수렴되고 말 것이다. 연대와 유대의 경험은 창대하였으나 시간과 속도의 폭거는 그것을 과거의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지아장커는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는 기록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 것 같다.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으나, 오직 의지만을 확인한다. 낙관도 비관도 없는 의지의 반복과 축적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영화는 인터뷰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동시에 그 인터뷰는 인터뷰가 아니라 ‘모방’이다. 실제의 노동자들을 인터뷰 했으나, 그들 중 몇은 노동자들을 모방한 배우들이다. 나는 배우들이 연기했다고 하지 않고 모방했다고 했다. 모방이라는 형식은 지아장커가 당대의 현실에 대해 성취할 수 있는 최대한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시간의 포클레인이 짓이기고 지나간 자리에서 더 이상 부수어지지 않을 ‘결정’들을 발견했고 그 결정들의 원형질을 복제해냈다. 이를 위해 그는 적극적으로 현실을 구성하지는 않으나 현실들을 적극적으로 모방한다. 과연 그는 언제까지 이러한 모방에 만족을 할 수 있을까? 혹은 언제까지 이런 불만족스러운 모방을 지속할 수 있을까? 물론 그의 모방은 숭고하며 예민하다. 그것은 시대와 삶을 가로지른다. 하지만 모방과 연출의 융합은 형식적으로 완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그 목적지가 불투명하다. ‘위안’은 가능하나 ‘극복’은 불가능한 영화적 완결성 속에서 지아장커는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어쨌든 그는 당대의 사실에 카메라를 고정시켰다.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현장에서 그의 카메라는 가장 느린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당연히 그의 사투는 힘겹다. 힘겹지만, 그의 영화는 계속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 있다. 시지프스의 숭고한 자기 모방. 그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축복이며 버거운 짐이다.

by(e) G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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