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유전학과 잔혹한 코미디

[배고프다! 영화] 양익준의 <똥파리, 2008>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인간과 파리의 유전자는 상당히 비슷한 DNA 배열을 이루고 있다. 정규 교육 과정의 지루했던 생물시간에 배웠던 이 사실이 요즘 들어서는 남다른 감흥을 준다. 다른 몇몇 현대 과학의 성과들처럼, 고도화된 과학이 발설하는 우주의 신비라는 것이 결국 인간의 가치를 우주에 떠돌아다니는 먼지 같은 수준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우주의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물질과 에너지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것도 결국 오랜 역사를 거치며 유전자가 자기를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일종의 기제에 불과하다. 몇몇 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이룩한 학문과 생각과 생활은 ‘진화’라는 거대한 메커니즘을 통해 거의 다 이해해버릴 수 있다. 현대의 과학이 ‘인간’을 정교한 메스로 분해하려 든다면 정말이지 인간과 파리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지만) 이런 현대과학에 반박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생각해보자면 어떤 의미에서 과학은 폭력적이다.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결정들은 ‘과학적’이라는 수식어와 성공적으로 조우해야만 적절한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과학적’이라는 명예를 얻지 못한 이론과 주장, 방식은 과학의 십자포화를 맞곤 비틀거리며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런 설득력을 폭력적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는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전통 사회의 대부분의 것들, 낭만을 포함한 신비들은 이렇게 사라져갔다. 양익준 감독의 2008년 작, <똥파리 Breathless, 2008>를 보고, 생뚱맞게도 현대의 과학이 생각났다. 현대 과학 못지않은 비정함, 극단적인 과학이 지니고 있는 시(詩)적 폭력성은 마치 인간과 파리의 관계에서처럼 세상과 영화 <똥파리>가 공유하는 유전학적 유사성을 설명해낸다. 그래서 영화 <똥파리>는 지독하게 과학적이고 동시에 가학적이다.

저마다의 투쟁이 있는 사회

영화 <똥파리>가 발 딛고 선 것은 정밀하게 파악된 현실이다. 이 현실을 개념화할 수 있도록 모종의 질서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88만원 세대’로 통칭되는 사회 현상들이다. 88만원 세대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관적이지만 과학적인 설명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젊은이들을 있게 한 배경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가난은 대물림되고, 가난의 순환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거의 보이지 않으며 이러한 서글픈 순환 속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연약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회와 가정의 흉포한 ‘힘’에 의해 삶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시달리고도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사회가 흉포화 될수록 개인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힘이고, 정글처럼 변한 세상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개인은 야수가 되어야 한다. 야수들 간에도 먹이 사슬이 형성되므로 먹이 사슬의 우위 관계를 바탕으로 먹이 사슬 관계 속의 누구나 폭력의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극단적으로 약한 자는 일방적인 피해자가 되고 극단적인 강자는 일방적인 가해자가 되겠지만 극단적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는 한시적일 뿐 영구적이지 않다. 한 때 강자로 군림했던 아버지들은 세월이 지나 노쇠해지면서 자신이 두들겨 패던 아들에게 얻어맞을 정도로 약해지고 조직에서 가장 약했던 막내는 어느새 조직의 큰 형님을 깔 수 있는 강자가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먹이 사슬에 포함되게 된 이유를 알 수 없고, 오직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투쟁을 펼친다.

가정은 폭력의 방패 혹은 진앙지

영화 <똥파리>는 이러한 현실에 가정 폭력의 일상성을 덧붙여 폭력의 설득력을 높인다. 상훈이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외견상 그가 먹이 사슬에 포함되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내면적으로는 가정 폭력에 의해 입은 상처가 만든 어찌할 수 없는 결핍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사회가 일정 수준 이상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을 때 ‘가정’은 개인의 안전을 돌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울타리가 되어야 하지만, 기실 가정은 폭력의 내적 진앙이기도 한 것이다. 어느 가정에나 크고 작은 형태의 폭력은 은밀히 진행되고 영화는 이러한 은밀함을 괴로운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드러냄을 통해 가정은 마지막 울타리로서의 기능을 상실당하고 오히려 극단적인 사회논리가 관통하는 철저히 사적인 공간이 되어버린다. ‘사회’논리가 지배하는 ‘사적’ 공간의 모순, 강자와 약자의 관계가 노골적으로 지배논리가 되어버린 가정의 현실을 지켜보기란 힘든 일이다.

시종일관 가해자를 비추는 카메라

이렇게 지켜보기 힘든 영화를 더욱 괴롭게 만드는 것은 매우 노골적인 형식으로 예언 된 상훈과 영재의 순환이다. ‘순환’은 그 형식만으로도 답답하다. 상훈은 영재의 미래이며 영재는 상훈의 과거이다. 상훈과 영재는 각각 역할의 파트너로서 친구와 누나를 공유한다. 친구는 우정을, 누나는 가족을 그리고 언젠가 만나게 될 사랑은 지독한 사슬로부터의 탈출을 꿈꾸게 하는 마지막 동아줄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들은 결국 상훈과 영재를 더 깊은 나락으로 내동댕이치는 함정이기도 하다. 친구와 누나와 연인의 ‘시선’은 상훈과 영재에 대한 관객의 동정심을 유발하지만 동시에 상훈과 영재를 이들 인간다움의 고리에서 분리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관객은 때때로 친구의 입장에서, 때론 가족의 입장에서 때론 연인의 입장에서 상훈과 영재를 바라보게 된다. 어느새 관객과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한 패가 되어 상훈과 영재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 관찰의 경험은 순환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묘한 입장을 만들어낸다. 친구나 가족이나 연인이 그랬던 것처럼 관객이 따뜻한 손길로 보듬어 주려하면 상훈과 영재는 저만치 멀어져버린다. 길들여지지 않았다기보다는 길들여질 수 없는 짐승과 같은 삶의 반복은 그것을 살아가는 존재만큼 그것을 지켜보는 존재들도 힘겹게 만든다. 영화는 이러한 감정 선에서 관객에게 다가온다. 관객은 설득적이지 않은 상훈의 폭력에 연민을 느끼게 되고 기이하게도 폭력을 휘두르는 악한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맞는 사람이 아니라 때리는 사람을 보여주고 ‘그만하라’는 외침은 답답하게 마음속에서 맴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가 반복되는 폭력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가정 폭력이라는 사회문제를 보여주고 있지만 가정 폭력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제시하거나 가정 폭력의 해결을 위한 조치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빈곤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해결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이 영화는 이러한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 혹은 이미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해결을 기대할 수 없는 문제들의 향연을 마치고 나온 관객은 머쓱한 나머지 “잘 만든 영화네요.”라고 한 마디 하곤 답답한 마음을 안은 채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애매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다 실패하고 마는 영화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은 똑똑한 영화 앞에서 영화는 영화적 체험으로 끝나고 만다.

순환의 잔혹성, 관객의 무기력

그래서 이 영화는 앞서 말했던 현대 과학에 대한 두툼한 책을 한 권 읽고 나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도대체 인간이란 게 어떤 가치가 있느냐는 물음, 시스템과 구조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자세에 대한 회의, 파악할 수 있으되 결국은 관찰로 끝날 수밖에 없는 무기력. 이것이 이 영화의 가학성이다. 시(詩)적이라고 포착되는 폭력, 입구는 있으되 출구는 없는 순환의 잔혹성. 관객의 무기력. 이 모든 아픔의 해결 없는 종결을 유도하는 ‘죽음’이라는 장치. 영화는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끝을 낸다. 영화는 이렇게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이 지점에서 끝날 수만은 없다.

앞서의 현대과학이 제기했던 인간의 무의미성에 대해 오래 전에 예견했던 이가 있다. 칸트가 이런 얘길 했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저 광활한 우주를 알면 알수록 인간이 심히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서술 뒤에 이어서 나오는 문장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를 알면 알수록 인간이 지닌 숭고함에 매료당하게 된다.” 사실은 그렇다. 우주를 바라보며 인간의 미미함을 느끼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바라보며 인간의 숭고함을 느끼게 된다.

칸트에게 참으로 선한 것은 오직 선의지였다. 선‘의지’. ‘의지’는 무엇보다 능동적이다. 칸트는 자신보다 앞선 시대의 윤리학을 모두 검토하며 참으로 선한 것으로 행복, 이성, 쾌락, 신, 동정심 등을 거론하는 이들을 비판했다. 그런 그가 얻어낸 결론은 참으로 선한 것은 오직 선의지라는 것이었다. 선을 향한 ‘의지’, 인간이 갖게 되는 주관적인 의지를 초월하는 이 의지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고 숭고하게 만든다. 영화 <똥파리>는 시지프스의 언덕을 오르는 한 인간의 심미적 탈진을 보여주었지만, 우리가 가야할 길은 비틀거리고 내동댕이쳐져도 다시 이 언덕을 오르고 마는 의지의 길이다. 이를 테면 인생 따위, 상처 따위 마음대로 할퀴고 지나가라고 내버려 두는 것 말이다. 상처와 상처들이 만나고 쌓이는 지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살이 돋아난다. 한 편의 영화가 우울함을 안겨주었으니 한 편의 시를 읽어보는 게 공평하다. 79년에 태어나 2005년 겨울에 운명한 신기섭 시인의 등단작, <나무도마>의 전문이다. 칼날을 부러뜨리는 나무도마처럼 살아갈 결의(!)가 있는 자들만 이 시를 볼 일이다. 상처에 지지 말자. by(e) Ghope


나무도마
신 기 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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