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람이 있었다

[용산참사 범국민장 릴레이 기고](7)

1.
‘용산 범대위’와 재개발 조합 사이의 협상이 타결됐다고 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사인 간의 분쟁’을 정부가 결국 중재한 모양이다. “조합이 유족 위로금 및 세입자 보상금을 지급하고, 향후 서로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으며, 합의 내용이 이행되도록 추진위원회를 설치”한다는 내용이다. 협상 결과를 놓고 안도와 아쉬움과 여전한 울분이 교차하고 있지만, 냉동고에 누운 다섯 분을 간신히 떠나보낼 수 있게 된 것만큼은 이제 사실로 다가오는 것 같다. 너무 오래 지상의 어둠에 갇혔던 분들의 장례를 우선 치르고 다음 할 일을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참사의 원인 제공자나 책임 회피자들은 해결의 주역이나 된 듯 설치지 말았으면 한다. 그들은 그럴 이유도 자격도 없다. ‘용산’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족들과 범대위가 밝힌 대로, 사과는 미흡하고 진상은 규명되지 않았다. 책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망루를 내려온 이들은 영어의 몸이 되어 있으며, 용산에 힘을 보탠 이들은 수배 중이다. 무엇보다도 참사의 근본 원인이라 할 뉴타운·재개발 사업의 기조에 일말의 변화도 감지되지 않는다. 용산은 여전히 비극의 현장이고 통증의 덩어리다.

2.
유족들이 “반쪽짜리 타결”이라고 눈물 흘린 협상 결과에 대해 용산에서 먼 언론에서는 이런 말들이 들린다. “‘떼법’이 법과 원칙을 누른 용산참사 타결”, “시신을 인질로 법치주의를 무너뜨렸다” 등등. 온라인은 더 멀고 더 차디차다. ‘개념’이 없다. “나도 신나 뿌리고 화염병 던져 사고 치면 보상받을 수 있겠네”, “테러범들은 '열사' 탄생하니 즐겁겠고 불순세력은 돈 받아서 좋겠지” 등. 이 어둡고 무정한 소리들을 알아들을 도리가 없다. 이 발언들은 어떤 ‘불가능한 통역’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모든 규범이 다 지킬 만하거나 공평무사한 것만은 아니고 법 또한 그러하지만, 그럼에도 대체로는 그걸 지키며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이 보통 인생이다. 용산의 세입자들이 그러했다. 사람으로 태어났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람이 되었으며, 장사해서 세금 내고 자식 길러 군에 보내던 그냥 보통 사람들. 그러나 2009년 1월 20일 새벽, 용산 제4지구에 사람 자격을 얻어 가진 그냥 보통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정든 집과 밥 벌던 터전을 졸지에 잃게 된 ‘대지의 버림받은 자들’이 허공의 망루로 내몰렸을 뿐이다. 그리하여 용산의 양민들이 죽어 냉동고에 갇히고, 유족들의 절규가 거듭하여 경찰 폭력의 타깃이 되고, 살아서 망루를 내려온 이들의 인생에 법의 이름으로 5년씩 6년씩 저주의 낙인이 찍히던 1년여 동안, 정권의 한결같은 대응은 단 한 마디로 요약된다. “너희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법을 지키라고? ‘떼법’이 ‘법과 원칙’을 눌렀다고? 사람이란 것이 되었는데도 공동체를 지배하는 어두운 힘이 그 ‘사람 자격증’의 효력을 부인할 때, ‘법과 원칙’은 깡패의 가당찮은 수칙과 무엇이 다르고 국가는 백주의 도적떼와 어떻게 구별되는지 알 수 없다. 악법도 법으므로 오로지 지켜야 한다면 먼저 우리 모두가 성인(聖人)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철인(哲人) 왕국’에 막무가내의 재개발과 살인 진압이라니.

망루의 세입자들을 테러리스트로, 전철연을 ‘불순세력’, ‘전문 시위꾼’으로 몰고, 유족들을 보상금에 눈먼 전귀(錢鬼)쯤으로 매도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대한민국, 생각보다 훨씬 더 어둡고 훨씬 더 무섭다. 요즘 테러, 새총 가지고 하나. 그들이 테러범이라면 유족들 또한 그럴 것이다. 유족들과 전철연 회원들을 가서 보라. 그들의 아비, 자식, 남편들이 테러범이겠는가. 힘이 없으니 서로 도왔고 기댈 곳이 없으니 연대한 것이다. 그들은 ‘식구’이다. 이렇게 인간적인 테러리스트들을 본 적이 있는가. 도울 줄도 연대할 줄도 모르는 자들이 테러를 한다.

지난 30일의 기자회견장에 웃음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생존 이상의 것, 그것이 없이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명당 7억이네, 어쩌고 해서는 안 된다. 7억 가지고 목숨 같은 건 사고팔 것처럼 싸게 굴어선 안 된다. 돈 안 되는 것은 다 쓰레기고, 따라서 양심과 이성은 생존에 방해만 되므로 버려야 한다고 가련하게 떠들어대서는 안 된다. 유족들은 지금 생존의 아수라장을 넘어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도시 개발의 잔혹사를 적은 용산 헌정집의 표제는 “여기 사람이 있다”이다. ‘우리도 사람이다’라는 뜻일 것이다. 이 말밖에는 더 가진 것이 없어 망루에 올라야 했던 이들처럼, 그들은 지금 그 ‘사람이란 것’에 도달하고 싶어한다. 사람이 제가 사람임을 입증해야만 했던, 어처구니없는 과제와 싸우다 숨진 이들을 대신하여 유족들은 지금 자신들이 바로 그 ‘사람임’을 입증하고 싶어한다.

이 불가능한 과제를 풀기 위한 최소 조건으로서 최고 권력자의 사죄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필요하다. 용산의 고통에 비하면 그것은 지극히 작은 것이다. 그날 그곳에서 벌어진 일은 테러 진압이 아니라 양민 학살이었고, 참사의 원인은 보상금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건설자본과 비리 조합과 부패 관료들 간의 무한 욕망 카르텔이었으며, 이 모든 상황의 바탕에 제가 국민의 대리자임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병든 국가권력이 있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입을 가졌으니 다 할 말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 번을 양보해도 용산 남일당에서 어처구니없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 그 결정적인 국면에 공권력의 과잉 행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 목숨 가볍게 아는 것이 유행인지는 모르겠으나, 길 가다 부딪쳐도 다툼이 나는 세상에서 사람이 죽었으면 제대로 조사해야 하고, 사람을 죽였으면 똑똑히 사죄해야 한다는 상식 또한 바뀔 수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한사코 이 작고 당연한 것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한사코 이것을 하게 해야 한다. 나는 참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언젠가 나의 글에 달렸던 어느 누리꾼의 답글을 여기 옮긴다.

저들이 아무리 짐승이라 한들 사람들의 비탄과 분노에 찬 목소리를 느끼지 못할 리 없습니다. 아마 죽음의 수용소를 발아래 두고 바그너를 감상했던, 나치와 같은 부류의 악마들이 아닐까요.


3.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죽은 이들의 소리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너의 승리, 너의 영화, 너의 역사(役事)는 실로
저 들판의 마른 풀,
가을바람의 티끌
하물며 죽임 위에 쌓은 것이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리라*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산 자들이여, 죽은 자를 기억하라
여기 사람이 있었다
여기, 발버둥치던 사람들이 있었다

*마태복음 24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