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파업 1년, “어떻게 일상으로 돌아오나요”

[쌍용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 파괴된 일상, 변화한 삶

날은 작년과 다름없이 무더웠다. 그러나 공장은 변해 있었다. 정문은 출입카드를 찍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으며, 관리자가 들어갈 때면 경비용역 직원이 경례 자세를 취했다. 공장 앞은 콘크리트를 새로 깔았다. 쌍용차 가족대책위(이하 가대위) 이자영 대표가 잿빛 바닥을 보며 무심히 말한다.

“작년에 이렇게 콘크리트를 깔아놨으면 열 때문에 어떻게 살았을까.”

6월8일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는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서 생존자 증언대회와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는 많지 않았다. 대여섯 명이 부지런히 사진을 찍을 뿐이었다. 조합원 한 명을 붙잡고 1년이 지난 감회를 물으니 씁쓸하게 대답한다.

“저는 연예인으로 따지면 잠깐 떴다가 죽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TV에도 안 나오고. 옛날에 이 사람이 이거 했다더라, 이 정도. 우리가 그 정도가 된 거 같아요. 일 년밖에 안 됐는데, 지금 와서 보면 그 정도예요. 참 소외감도 많이 느끼구요. 어떻게 보면 무시죠.”

  금속노조 쌍용차지부는 지난 6월8일 쌍용차 정문 앞에서 생존자 증언대회와 기자회견을 열었다 [출처: 미디어충청]


잠깐 떴다가 죽었어요

상하이쌍차는 파산 신청을 하고 사라졌다. 노동자들에게 대규모 해고가 통보됐다. 노동조합은 1056명의 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공장 점거 파업에 들었다. 경찰과 회사 구사대가 공장을 둘러쌌다. 유독 무덥고 비가 내리지 않던, 긴 여름이었다.

그렇게 77일이 흘렀다. 파업은 끝났다.

파업에 참가한 600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부상자만 290명이었다. 파업 과정에서 5명, 그 후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중 자살자는 3명이었다. 파업 참가자 중 8명은 현재 구속 상태이며 회사와 경찰은 조합원 103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소송 금액이 각기 100억과 25억이다.

파업 참가자 중 반 이상은 퇴직금을 가압류 당했다.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물으니 젊은 조합원들이 허허 웃는다.

“생활은 어떻게 하세요?”라고 하니 또 웃는다. 파업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징계해고가 된 김남섭 조합원이 말한다.

“해고자들은 금속노조에서 신분보장기금이 1년 동안은 나와요. 통상근무로 해서. 물론 그 돈으로 생활을 다 할 수는 없는데. 그래도 또 뭐 나름대로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사는 거죠. 다들 일용직이라도 알아보기도 하고. 무급휴직인 분들은 그런 것도 없죠.”

해고자들 중 대부분은 마흔을 넘어섰다. 이들이 기술을 배워 새로운 직장에 들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쌍용’ 두 글자가 들어간 이력서는 평택시 어느 곳에도 받아주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건설 일용직, 대리운전기사와 같은 임시직 밖에 없었다.

뒤틀린 것은 경제적인 생활만이 아니었다. 쌍용자동차에 입사를 한 이래 유지해왔던 공동체도 산 자와 죽은 자의 갈림 속에 사라졌다.

“당시 얼마나 심했냐면,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형이 연락이 와서 미안하다 술 한 잔 사 줄게 그래요. 술 몇 번 얻어먹어요. 그러면 나중에 검찰 조사를 받을 때 그 형하고 술자리에서 한 이야기가 다 나오는 거야. 교활한 누구 머리인진 몰라도 회사 측에서 친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거 물어 봐라, 하는 거예요. 파업 때 누구누구랑 같이 있었으며 뭘 했는지 회사 측 애들이 하나하나 캐내더라고요. 그런 상황까지 벌어졌기 때문에 거짓말 안 하고 마음 하나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었어요.”(쌍용차지부 신동기 조합원)

그러나 무엇보다 상처로 남은 건 그날의 기억이었다. 그것은 소외감, 배신감, 패배감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나타났다. 정체가 불명확한 그것은 조합원들과 그 가족들을 괴롭혔다.

“저 같은 경우는 자식들한테 항상 그런 이야기를 해요. 잘못한 놈이 혼나는 거고, 잘하는 사람이 상 받는 거다. 우리는 평생 그런 교육 받고 살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말하는 제가 몰매를 맞은 상황이 됐잖아요.”(신동기 씨)

“문득 내 안에서 화가 나는 거예요. 서러운 느낌, 막연한 느낌이 들면서 눈물이 확 쏟아지는 거예요. 남편이 해고돼서? 아니에요. 파업에 져서? 그것도 아니에요. 다 아닌데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돼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지독한 느낌이 드는 거죠. 정말 개미처럼 밟히는구나, 삶이 한순간 파탄 나는구나.”(가대위 권지영 회원)

이자영 대표는 작년 서울광장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삼보일배를 했던 일을 떠올렸다. 후끈거리는 아스팔트 냄새가 코로 들어오고, 무릎과 팔이 다 까지도록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빌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 앞에 절망스러워 ‘도대체 어떻게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 싶었다고 했다.

내일을 떠올리면 두려웠던 그날이 77일 동안 계속 됐다. 그날을 기억하는 일은 고통이었다. 공장 앞 기자회견에 참석한 조합원 수가 많지 않았다. 조합원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조합원 분들이 많이 안 오셨네요. 다들 벌이 때문에 오기가 힘드시나 봐요.”

“공장 앞에 오는 거 자체를 꺼리는 분들이 많아요. 지역 멀리서 하면 가겠는데, 공장은 못 가겠다 하는 조합원들이 있죠.”

그러나 파업이 끝난 지 이미 300여일이 흘렀다. 나는 물었다.

“이제는 좀 일상으로 돌아왔나요?”

한 조합원의 아내가 힘 빠지는 웃음을 짓는다.

“어떻게 일상으로 돌아오나요.”

어떻게 일상으로 돌아오나요

6월9일은 쌍용자동차 파업 1년을 맞아 문화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 날도 역시 땡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 무더위 속을 어린 아이들 몇이 내달리는 게 보였다. 투쟁 쪼기를 입고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벌컥벌컥 생수를 들이키는 대다수의 ‘아저씨’ 조합원들 틈에서 아이들이 까르르거리며 돌아다닌다.

잠시 후 그 아이들은 무대로 올라와 ‘아빠 힘내세요’ 노래를 부른다. 가족대책위 자녀들이다.

저 아이들은 작년 여름 이 곳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로 천막 안에서 울다 지쳐 자고, 저희끼리 놀았다. 그 아이들이 색깔 옷 곱게 차려입고 낭랑하게 노래를 부른다. 박수 소리가 커진다. 한결같이 귀엽다.

그러나 한편으로 막막하다.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랫말 속 아빠들은 어떻게 힘을 내야 하나.

여전히 어둡고 푸석한 얼굴을 한 조합원들을 본다.

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그들의 아내들이 일을 구해야 했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육아와 가사 노동에만 몸담고 있던 그녀들이 사회로 나가 직장을 구해야 했다. 오랜 파업기간 동안 홀로 집안을 감당하느라 지친 그녀들은 저임금 여성 노동자가 되기 위해 전단지를 뒤졌다. 그러나 벌이가 줄어들었다는 사실보다 그녀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가장’이 직장을 잃었다는 불안감이었다.

앞서 일상으로 돌아왔냐는 질문에 ‘어떻게 일상으로 돌아오나요’라고 말하던 조합원의 아내는 한마디 말을 덧붙인다.

“어떻게 일상으로 돌아오나요. 애 아빠가 여전히 일이 없는데.”

애 아빠가 여전히 일이 없는데

쌍용에 가서 조합원들이 경제난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처음 든 생각은 ‘이렇게 벌어둔 것이 없다니’ 였다. 보수 언론은 귀족 노동자의 파업이라며 그들에게 몰매를 때렸다. 밥그릇 지키기 싸움을 한다는 비판을 했다. 그런데 무슨 귀족이 몇 달 일자리를 잃었다고 이렇게 몰락한단 말인가.

쌍용 직원들이 많이 산다는 아파트를 돌아다녔다. 부동산에 들려 집값을 확인했다. 아파트는 대체로 평수가 넓지 않았고 초등학교 자녀가 있는 젊은 직원들이 사는 곳은 복도식 아파트가 주를 이뤘다.

귀족 노조, 고임금 노동자가 언론에 의해 부풀려진 말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직접 대공장 노동자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니, 그래도 의외였다.

젊은 조합원들은 자신이 입사한 이래 10년 동안 계속된 쌍용자동차의 경영난을 이야기했다. 합병과 매각을 겪은 쌍용자동차는 현대나 지엠대우와 같은 타사업장에 비해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노동강도를 강화해서라도 임금을 높이고 싶었으나 기술개발 지원 없이 낙후한 시스템은 그것조차 막았다고 조합원들은 항변했다.

그것으로 답이 충분하지 않았다. 실제 생활을 꾸려가는 권지영 씨에게 답을 들었다.

“근속이 오래된 분은 급여가 많아요. 25년, 30년 되신 분들은. 돈을 쓰는 걸 겁내지 않은 거죠. 큰 돈을 써도 성과급으로 메꿔 놓으면 되니까. 그게 파탄으로 이어지지 않게끔 하는 구조를 만든 거예요. 습관이 된 거죠. 아파트를 대출 받은 사람들도 많고. 월급 나오는 게 있으니까 대출 받아서 이자 갚으면서 살면 되겠다 했는데 회사가 갑자기 어려워지면서 그게 빚이 되어 휘청대는 거고,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자사 차 타야 한다는 압박도 있었고. 쌍용에서 나오는 차는 중형차라 서민이 탈 수 있는 게 아닌데……. 그게 유지비가 엄청나고.”

또 하나의 이유는 대공장 노동자의 임금이 철저하게 ‘가족 임금’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야 맞교대를 했기 때문에 부인들이 직장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죠. 아빠가 낮에 들어와 잘 때는 애들을 데리고 공원에 다 나가거든요. 엄마가 맞벌이하려 해도 아빠가 주야 맞교대하니까 감당이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애기 출산하고 육아하고 하는 동안 직장을 못 다니고. 그러고 나면 경력이 단절되니까 나중에는 할 만한 일이 없고 남편 벌이에 기대가니까. 이렇게 일이 생겼을 때 가족 경제가 급속히 떨어지는 거예요.”

쌍용차 정규직 노동자의 시급은 아르바이트 수준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대공장 노동자들의 고임금은 주야 교대 근무와 특근으로 이루어진 강도 높은 노동으로 인해 가능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남편의 고된 노동의 반대편에는 육아와 가사를 홀로 도맡는 아내가 있다. 전날 야간 근무로 컨베어벨트를 타고 온 남편에게 아이를 놀이방에서 데려오는 일을 시킬 수 있는 아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아내는 경제 활동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생계 부양자로서의 남편과 전업 주부로의 아내의 역할 구분, 쌍용차 노동자들은 자신의 가족 생계를 철저하게 홀로 책임지는 존재였다. 대규모 해고는 이러한 생활체계를 뒤흔들었다.

성별 분업의 엄격한 구분은 투쟁 이후에도 계속 됐다. 공장에 점거 파업을 들어간 남편을 보며 그녀들은 가족을 위해 싸우는 남편이 집안 문제는 신경 쓰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회사 측이 공장 견학을 통해 공장일의 고됨을 부인들에게 인식시키고, ‘내조’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땐 행복했었죠. 우리 신랑 라인도 봤고. 남편이 여기서 이렇게 일한다, 이게 선선히 지나가요. 필름 같이 지나가잖아요. 우리 신랑이 이렇게 땀 흘리고 에어컨도 있는 상태도 아니고 큰 선풍기 돌아가고……. 파업하고 공장 거기서 밥, 찌개 끓여 먹고 양말 빨아서 걸어놓기도 하고 이런 장면 봤을 때는 집에서 손 하나 까닥도 안 하시는 남편들이 여기 와서 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기도 하고. 그래서 나오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어요. 수술 이야기도 안 하고. 나야 얼마든지 병원 가서 수술을 할 수 있지만, 이건 가족들 생계가 달려 있는 문제니까 나오라 하고 싶지 않았어요.”

나팔관에 생긴 혹 때문에 수술을 앞두고 한숙희(가명) 씨는 파업에 들어간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이후에는 수술 자체를 미뤘다. 파업에 들어간 남편이 자신이나 집안 문제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녀의 내조 방식이었다. 반면에 집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가대위 활동에 참여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조합원들도 꽤 존재했다.

“우리 아빠가 애들을 끔찍이 여겨요. 그래서 나보고 애들 돌보지, 나오지 말라고. 그래서 공장 앞에 몰래 갔어요. 그럼 아빠가 ‘니 왔지?’ 그래요. 아니야, 그러면 ‘다 봤다’ 그래요. 카메라에 다 찍힌 거예요.”(가대위 최은경 회원/가명)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파업이 길어졌다. 남편을 응원하던 보조 역할에 머물던 가대위의 활동도 점차 커져갔다. 점거 파업이라는 상황 때문이었다. 공장에 몸이 묶인 조합원을 대신해 가대위가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쌍용자동차 문제를 촉구하는 서명도 받았고, 금속노조 회의에도 참관을 했다. 국회의원들을 만났으며 길거리에서 선전전도 했다. 가대위는 조로 나눠 하루에도 몇 군데를 돌아다녔다. 그런 경험들은 그녀들을 사회와 만나게 했다. 사람들의 냉대도 연대도 그녀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진짜 심하게 이야기하면 남의 일이잖아요. 우리 신랑이나 누가 관련되어 있지 않다면 저는 참석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대학생들은 무슨 죄가 있어요. 거기 부모,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대학생들이 와서 연대를 하면서 새벽에 전경들 하고 싸워가면서 붙잡혀 가면서 얻어 터져 가면서. 그렇게 해준다는 자체가 너무 고마운 거예요. 알고 지냈던 학생이 있었는데, 매일 와서 같이 이야기도 들어주고 싸워주고 한 동생이었는데, 그 애가 사측에 의해서 많이 맞았어요. 제가 그걸 알고 제 가족 같이 많이 울기도 했고 병원에 찾아가기도 했고. 지금도 가끔 가다 통화도 하고 그러거든요. 잘 지내냐 안부를 묻기도 하고.”(한숙희 씨)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은 아내들만이 아니었다. 아내의 변화를 보는 것이 남편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내를 대하는 남편들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졌다.

“부인을 보는 눈이 달라졌을 거예요. 내 부인이 저런 힘이 있구나, 이런 감탄이 많았을 거 같아요. 아는 언니가 있어요. 현모양처예요. 파업 한 달 쯤 지나고 나서 결합을 하게 돼서 그 뒤로 왕성한 활동을 한 언니거든요. 그 언니가 이번에 식당을 열게 됐는데 사장을 남편이 아닌 언니가 하게 된 거예요. 언니가 그 전에 어땠냐면요, 애들이 중학생 고등학생인데도 아이들하고 남편 밥 차려준다고 모임 중간에 일어나서 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어떤 관계 변화가 있었는지 언니가 사장을 하게 된 거죠.”(이자영 대표)

“전에는 회사 동료랑 가족들이랑 밥을 먹으면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회사 이야기를 하고, 아줌마들은 아줌마들끼리 모여 애들 이야기를 해요. 지금은 가대위나 조합원들이 같이 앉아서 형수님 힘드시죠, 이러면서 파업 당시 이야기를 하고 앞으로 노동조합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같이 의논해요. 실제 그 자리에서 논의가 안 되더라도 예전처럼 그렇게 따로 나뉘어서 이야기하지는 않는 거죠. 저는 그게 유지된다고 보고요.”(권지영 씨)

보는 눈이 달라졌을 거예요

파업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기회였다. 가대위 회원 중 일부는 이러한 변화를 보면서 구체적인 운동을 꿈꿔보기도 했다.

“일상의 소소한 부분이지만 남편의 조합 활동을 이해하는 문제,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노동조합이랑 가대위를 잘 유지해서 이렇게 성장한 의식들을 지역 내에서 풀어낼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어야지. 해고 싸움뿐만 아니라 교육, 환경, 지역 사회 문제라든지 이렇게 고리를 만들어서 풀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너무 경쟁에 쫓기고 세상에 살다보면 묻히잖아요. 그렇게 되면 너무 아까울 것 같다, 그랬어요. 복직 승리하고 축배 들고 그러면서 이런 문제도 고민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싸움이 끝난 자리는 예상보다 더 황폐했다. 일상은 파괴됐고 파업 기간에 이루었던 성과들은 장막 뒤로 사라졌다. 파업 기간에 보이던 유대와 자신감을 다시 발견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가대위 이자영 대표는 서로가 서로를 보살필 수 없이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제가 애를 키우다 보니까 내 안에 보살핌이 꽉 찼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이 보이기 마련인데, 국가도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하고 직장도 나를 내치고 한 가정이 속절없이 깨지는 거예요. 아무도 서로 기둥이 돼줄 수가 없게 약해져 있기 때문에 다만 생계줄이 끊겼다가 아니라 이 차원이 아니라 모든 면이 다 파괴되는 거예요. 내가 약한데, 내가 지쳐 있는데 누굴 돌보고 뒤돌아볼 수 있겠어요.”

상처를 치유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해 보였다. 그렇다면 일상으로의 복귀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앞서 ‘어떻게 일상으로 돌아오나요’라고 하던 조합원의 아내는 잠시 시간을 두더니 내게 물어왔다.

“좀 있으면 해고자가 또 생긴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파업도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동의서를 썼기 때문에. 회사에서 나가라고 해도 할 말 없이 나가야 한다고. 그 사람들이 나오면 우리가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복직 가능성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구조조정을 겪고 자신들의 처지와 똑같이 해고가 된 그 자리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내가 어찌 알 수 있을까. 그렇다고 그녀의 말에 끄덕일 수도 없었다. 산 자들마저도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싸우며 바란 것은 이런 결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쌍용자동차 매각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매각은 쌍용자동차의 재생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구조조정의 예고이기도 하다. 이 구조조정 앞에서 공장 안팎 어디에도 움직이는 이는 없다. 매각 앞에서 노동자들은 더욱 움츠리고 있다. 때마침 쌍용차 파업은 1년을 맞이하고 있다.

기자회견을 마치며 사회자를 맡은 이창근 정책실장은 달라진 공장 앞, 공터를 막아 쳐둔 울타리를 가리켰다. 철조망 사이로 고개를 내민 꽃들이 있었다. ‘저렇게 막더라도 피어나는 꽃처럼 피어나는 게 노동자의 투쟁’이라며 이창근 정책실장은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공장은 높고, 정

문은 번쩍였으며, 사람들은 무표정했다.

어떻게 이들은 일상을 다시 복원시켜 나갈 것인가. 어떤 일상을 만들어갈 것인가. 의문을 풀지 못한 채 나는 기자회견을 끝내고 노동조합 사무실로 돌아가는 조합원들의 뒤를 따라갔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은 [울산노동뉴스]에 연재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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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 가대위 , 쌍용차 , 7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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