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총선에서 자민당이 압승하자 일본의 우경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번 일본 총선에서 중국과의 외교관계, 센카쿠 열도 문제 등 군사외교 분야도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였지만 무엇보다도 소비세 인상과 고용 문제 등 일본의 경기 회복문제가 최대 화두였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들도 “자민당의 압승은 당 자체의 인기가 아니라 민주당 정권이 중국의 부상에 맞서 일본 경제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실패한 결과”라고 분석하고 “군사적인 목표는 뒤로 미루고 당분간 경제에 집중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윤전기 아베’와 인플레이션 정책
아베 자민당 총재는 선거 기간 내내 강한 일본을 내세우고 통화-조세 등 경제정책에 대한 대폭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며, 현재 1%인 일본은행의 소비자물가(인플레이션) 인상 목표치를 2~3%로 높이고, 이를 위해 10년간 200조 엔의 토목공사, 마이너스 금리, 일본중앙은행의 건설 국채 무제한 매입 등의 수단을 총동원해 시중 유동성을 살려 내수를 확대하고 수출기업에 대한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겠다 약속했다.
그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도 “건설 국채는 일본 은행에 전부 환매하게 하고”, “윤전기를 빙빙 돌려 무제한 지폐를 찍자”는 발언을 하며 “윤전기 아베”라는 별명도 얻었다. 인플레이션의 도래를 환기시키는 ‘아베 경제학’에 대해 엔 환율은 하락하고 닛케이 평균 주가가 상승하는 등 시장은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아베 경제학은 매년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을 기록하며 장기 불황의 늪에 빠진 일본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대책으로 제시됐다. 아베 총재는 이를 위해 내년 4월에 임기를 마치는 일본 중앙은행 총재를 인플레이션 상승 입장을 기준으로 인선할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이같은 아베 정책에 대해 일본 내부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는 작지 않다. 아사히 신문은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가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일본은행에 국채를 직접 매입하도록 했다. 그 결과 통화 증가로 물가가 90배 상승했다”면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우려했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인플레이션 정책은 실패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12월14일자 인민일보(일본어판) 주말판에서 “교통 요금, 수도 전기 요금, 학비가 하락하지 않고, 공업 제품이나 수입 식품의 가격이 하락하면 디플레이션이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것일까”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인플레이션 정책은 “국민의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민일보는 현재 일본 경제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은 것은 국민 소비와 기업 투자의 감소가 핵심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키면 엔의 구매력이 크게 손상되고 필연적으로 엔화 약세가 생길 것이지만 일본은 수출 가능한 제품이 많지 않고, 엔 약세로 수입할 수 있는 상품도 줄어들어 일본 국민의 생활은 실제적인 혹한에 돌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중국 측의 전망이 설득력이 없지는 않으나, 일본 국민들이 아베의 손을 들어줬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20년 이상 지속된 일본의 장기침체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현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아무리 뭔가를 해도 일본경제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자조적인 상황, 때문에 ‘아베 경제학’은 일종의 도박이라고 볼 수 있다.
인플레이션, 일본 최후의 정책수단인가
일본은 그동안 양적완화를 통해 통화공급을 지속했고 GDP 대비 일본 정부 부채비율 220%가 말해 주듯이 엄청난 액수의 국채를 발행해 일본경제를 지탱해 왔다. 이렇게 확대된 재정지출은 생산, 고용 및 소득창출로 이어져야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2차례 재정지출 확대로 경제성장률이 일시적으로 상승했지만 재정지출을 줄이자 곧이어 다시 급격한 침체에 빠지기를 반복했다. 결국 국가부채의 증가만을 야기한 채 아직도 저성장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실질적인 고민은 여기에 있다. 그동안 양적완화든 경기부양이든 안해 본 것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베 총재가 무제한으로 돈을 푼다고 공언을 해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할지 아니면 계속해서 주저앉을지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이 더 큰 문제로 보인다.
일본 경제의 현재구조상 통화완화 정책을 편다 하더라도 투자나 소비로 이어지지 않고 제로금리 상태에서도 이 돈들이 다시 일본 은행으로 돌아오고 있다. 돈만 순환할 뿐, 원하는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마이너스 금리를 시행한다 하더라도 돈이 은행으로 돌아오지 않겠지만 그냥 금고에 쌓아 둘 가능성이 더 높다.
한편에서는 인플레이션 정책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과 같은 저성장 국면에서는 정부부채를 해소할 방법이 마땅히 없고 또 새로운 성장국면을 찾지 못하는 한 가계와 기업의 소득이 끊임없이 줄 수밖에 없어 정부의 이전지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재정정책과 결합된 ‘직접적인 인플레이션’ 정책은 이것저것 다 해본 일본 정부로서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윤전기 아베’ 총재가 표현한대로 돈을 찍어내는 ‘머니 프린팅’은 정부가 국채시장에서 돈을 빌려 국가부채를 늘리는 방식의 자금조달이 아니라 중앙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직접 공급받는 방식이다. 이 정책이 목표한 대로만 시행되면 정부는 이자를 부담할 필요도 없으며 인플레이션으로 어느 정도 부채를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과 같은 화폐가치의 하락은 금융자산가들의 이해와 대립되기에 금융질서를 쥐고 있는 세력들이 이 사태를 허용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총선이 끝나자마자 국제신용평가사들은 일본 정부가 재정확대정책을 취소하지 않는다면 신용등급을 낮출 것이라 위협하고 있다.
도박은 도박일 뿐
하지만 이 정책은 조절이 실패할 경우 중국의 우려대로 고도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가 있다. 만약 실패한다면 이제 일본에 남은 마땅한 정책 수단을 찾아보기가 어려워 일본 정부의 정책은 방향을 잃고 길을 헤매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 국민이 총선에서 선택한 아베 경제학은 일본의 최후의 도박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무엇이 되었든, 일본 경제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반복적인 침체 속에 계속 증가하는 국가부채에 있다. 일본의 경우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면 주로 일본 국내자본이 이를 매입하여 사실상 내국채의 성격을 가졌다. 그 때문에 일본 정부는 GDP의 200%가 넘는 채무 비율에도 불구하고 재정위기에 봉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일본 정부라 하더라도 국가부채를 무한정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한다. 한해 예산의 5분의 1을 국채이자 지급에 사용해야 할 만큼 일본의 차입경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2012년 현재, 예산 90조 엔 중에서 이자지급으로 22조 엔이 필요하며, 예산의 절반인 45조 엔은 신규국채 발행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문제는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아베도, 누구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점점 어두워지는 자본주의의 미래, 짓눌려왔던 20년 동안의 저성장,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지위를 중국에 빼앗긴 일본으로서는 이제 도박과도 같은 대책이 아니고서는 미래를 열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박은 도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