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한편, 신용카드 이용이 확산되고 전자화폐 도입이 거론되면서 현금이 사라지고 있다. 당장 우리나라도 2020년까지 동전을 폐지하기로 했고, 현금 자체를 없애려는 국가도 늘고 있다. 또한 비트코인처럼 블록체인을 이용한 암호화폐(cryptocurrency)가 화폐시스템을 대체할 것이란 얘기도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의 돈이 지금보다 더 디지털화 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모두가 ‘디지털화’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의미는 매우 불분명하다. 디지털화가 전통적인 화폐와 신용을 어떻게 수정하는지 다음 네 가지 부분에서 주요한 쟁점이 존재한다.
1) 실물화폐의 전자화폐로 대체
2) 법정화폐의 암호화폐로 대체
3) 은행 예금의 중앙은행 예금으로 대체
4) 은행 대출의 P2P 대출로의 대체다.2)
전자화폐로의 대체
전자화폐로의 대체는 뒤에 나오는 민간에서 발행하는 암호화폐를 제외하고 (여기서는) 국가가 발행하는 법정 디지털화폐로의 대체를 말한다. 대표적으로 스웨덴 중앙은행은 법정 디지털화폐인 ‘e크로나’를 개발 중에 있다. e크로나는 두 가지 형태로 구성될 전망인데, 첫 번째는 ‘가치 기반 e크로나(value based e-krona)’로 현금을 지갑에 넣어 다니듯이 전자화폐를 카드나 스마트폰 앱에 저장한다. 다른 하나는 ‘등록 기반 e크로나(register based e-krona)’다. 시중은행이나 중앙은행에 계정을 두고 은행 예금에서 인출해 이체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된다. (개인이 중앙은행에 전자화폐를 소유할 계정을 둘 수 있는지 여부가 아래 세 번째 쟁점이다.)
현금 대신 전자화폐가 법정화폐로 된다면 은행시스템에 어떤 영향이 있을까? 첫째, 뱅크런이 사라진다. 모든 화폐가 전자화폐이고 전자 계정이 은행에 존재하기 때문에 은행 위기가 발생하면 (현금을 찾을 필요 없이) 손쉽게 계정을 다른 은행으로 이동하거나 전자화폐를 스마트폰 앱 또는 전자지갑으로 이동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에 개인계정을 만들 수 있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둘째, 중앙은행의 제로금리 하한이 사라질 수 있다. 특히 디플레이션 시기에 제로금리정책을 사용하거나 헬리콥터 머니 형태로 개인계정에 중앙은행이 직접 전자화폐를, 그야말로 전자적으로 지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3)
그러나 이런 일들은 현금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만 가능하다. 현금이 남아 있는 한 이자율이 떨어지거나 은행 시스템이 흔들릴 경우 사람들은 급격히 현금 보유를 선호할 것이다. 그런데 전자화폐가 실물 현금을 완전히 대체할 것인지도 회의적이다. 상당히 오랫동안 전자화폐는 실물화폐를 보완하는 기능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전자화폐는 당장 은행시스템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 않고, 시간이 지나 전자화폐 도입이 확산된다면 중앙은행의 역할과 정책기능은 오히려 확대할 것이다.
암호화폐로의 대체
비트코인은 기존의 은행(또는 중앙은행)의 중앙집권적인 통화발행에 반발해 등장했다. 하지만 지나친 투기로 화폐로서의 가치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지불수단과 가치저장수단으로서도 안정적이지 못하다.
그럼에도 투기 수요가 진정되고 나면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가 지불수단을 확대해 분산적인 화폐로서 기능할 것이라 전망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 이런 암호화폐의 등장은 하이에크가 주창한 화폐의 탈국가화(denationalization)를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민간의 암호화폐가 화폐가 된다는 것은 화폐발행의 국가독점을 폐지하고, 나아가 통화량 조절을 시장 자율에 맡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과 같은 암호화폐가 화폐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상당한 논란이 있다. 불태환(금과 교환이 되지 않는)이라는 점에서 법정화폐와 동일하지만, 법정화폐의 가치는 국가가 보장하는 반면 화폐로서 암호화폐의 가치는 누구도 보장하지 않는다. 법정화폐는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고 국가에 의해 가치를 보장받지만, 암호화폐의 실질 가치는 채굴비용과 관련될 뿐이다.4) 또한 애초의 의도와 다르게 다양한 형태의 알트코인으로 변조도 가능해 발행액이 사실상 무제한이다. 따라서 법정화폐를 위협할 정도의 시장지배력을 가질 가능성은 없다.
때문에 민간의 암호화폐가 화폐로서 역할을 할 것인가 또는 법정화폐를 대체할 것인가의 문제는 현재로서는 전망이 없다. 자산 가치를 갖고, 외환거래에서 거래비용 축소로 부분적인 유통수단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화폐로서 기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중앙은행이 암호화폐와 같은 전자화폐를 발행할 수 있지만 꼭 블록체인과 같은 분산원장기술을 이용할 필요도 없다. 말 그대로 중앙은행이 신뢰성을 보장하면 되기 때문이다.5)
중앙은행 계정
현재 중앙은행에 계정을 만들어 돈을 맡길 수 있는 주체는 (국가 외에) 시중은행으로 제한되어 있다. 중앙은행은 은행의 은행으로 상업은행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고 주로 통화량을 관리 감독한다. 그런데, 현재 화폐제도의 변화 한 가운데에 중앙은행의 비은행 계정 설정 문제가 등장하고 있다.
이런 중앙은행의 개인 계정 설치 문제는 전자화폐 및 중앙은행 시스템과 관련이 있다. 우선 전자는 스웨덴의 e크로나와 같이 동록기반 전자화폐의 계정을 시중은행뿐 아니라 화폐의 안정성을 위해 중앙은행에도 설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뱅크런 등 은행 실패 위험을 줄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두 번째 문제는 앞서 스위스의 법안과 같이 완전지급준비제도(vollgeld)라는 주권통화(sovereign money)의 형태로 시중은행의 신용창조 기능을 제한하는 것과 관련이 된다. 완전지급준비제도를 도입해도 되며, 중앙은행의 비은행 계정 설치가 가능해지면 시중은행의 대출 여력은 중앙은행에 예치한 준비금 수준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때 중앙은행과 시중은행의 계정은 이자율의 차이와 금융안정성 등으로 결정되며, 어떤 형태로든 예금 축소로 인해 은행의 영업 리스크가 확대할 수 있다. 정책적으로 중앙은행의 비은행 계정 설치를 불가능하게 할 수 있지만 전자화폐가 확산하고 은행위기가 발생할수록 중앙은행 계정의 필요성은 더욱 강하게 대두할 것으로 보인다.
은행 대출에서 P2P대출로
핀테크의 발달로 대출 방식도 다양해지고 은행을 경유하지 않는 P2P대출도 형성되고 있다. P2P대출은 신용점수, 동료평가, 소셜네트워크 등을 통한 정보를 사용하여 비대칭 정보가 있는 환경에서 은행의 핵심기능인 차입자에 대한 심사와 모니터링을 진행할 수 있다. 또한 다수의 거대한 차입자 그룹으로 투자를 분산시켜 은행이 제공하는 전통적인 위험 분산 기능도 제공할 수 있다.
현재 P2P대출은 초기단계라 사기, 부실대출 등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정보 부족으로 많은 부분 은행의 심사 평가 기능에 의존해 있다. 하지만 동료평가 등이 쌓이면 대출자와 차입자 간 직접 소통이 가능해져 거래비용이 축소되고, 이에 따른 이자율도 은행과 달리 설정할 수 있어 상황에 따라 은행의 대출 기능을 축소시킬 수 있다. 물론 대규모 자금 동원은 주로 은행을 통하겠지만 소규모 대출은 P2P 형태로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P2P대출은 소규모 자본시장을 형성하는 것으로 은행의 일정 부분과 직접 금융시장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지금의 자본시장과 마찬가지로 P2P대출 역시 중앙은행의 정책수단 범위 내에 존재하고 이를 넘어서는 규모나 형태는 상당 기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화폐의 디지털화와 금융의 사회화
화폐의 디지털화는 전통적인 금융시스템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은행과 중앙은행의 역할, 중앙은행의 정책수단, 대출 등 금융관행과 주체들을 변화시켜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화폐제도의 변화는 단순한 기술 변동요인의 문제가 아닌, 기존 은행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강하게 연결돼 있다.
스위스 주권통화 법안도 2008년 금융위기 확산에 대한 은행의 책임을 묻는 것에서 시작됐고, 비트코인도 금융위기의 주범을 은행의 대출과 신용창조에서 찾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개발됐다. 살펴보았듯이 화폐의 디지털화는 은행의 기능을 대폭 낮출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럼에도 위기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과 방안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권통화의 형태도 시중은행을 폐지하고 중앙은행으로 집중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가 있지만 경제구조와 메커니즘을 그대로 둔 채 은행을 국유화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가령 개별 은행 수준에서 막을 수 있는 은행의 위기가 곧바로 중앙은행의 위기 즉, 국가의 위기로 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2008년 금융위기는 시중은행의 신용창조가 문제가 아니라 고객의 예금 없이도 파생금융 상품에 투기할 수 있었던 투자은행에서부터 문제가 됐다. 이러한 점에서 단순히 신용대출의 총량을 규제하는 것으로는 위기를 피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생산적 자본에 투자하는 것 이상의 가공자본이 지구적 규모로 엄청나게 부풀어 있기 때문에 가공자본을 축소시키지 않고 은행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풍선효과처럼 대출을 규제하면 가공자본은 다른 곳에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한편, 화폐의 디지털화가 필연적인 경향이라면 이것이 금융의 사회화라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일환인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트코인의 존재가 애초의 이상과는 다르게 중앙은행의 역할을 일층 강화시키는 것도 그러하며, 하이에크가 말한 화폐의 탈국가화와 달리 디지털화 양상은 사회적, 국가적 통화 관리의 필요성을 더 확대시킨다. 필요한 것은 통화량보다 자본량에 대한 사회적 통제이며, 통화운용의 계획된 배치를 필요로 하는 경제구조다.
1) https://www.vollgeld-initiative.ch/english
2) 자세한 논의는 아래 글 참조. “Digitalisation of money and the future of monetary policy”, Peter Bofinger, 2018.6.12.
3) “The future of central bank money”, Cœuré, B, Speech at the International Center for Monetary and Banking Studies, Geneva, 2018.5.14.
4)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2911
5) “Central bank cryptocurrencies”, Bech, M L and R Garratt, BIS Quarterly Review,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