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얼마 전 한 젊은 대중예술가이자 명민한 소셜 인플루언서(influencer)를 잃었다. 우선 그의 명복을 빌고, 이제는 그가 듣지 못하겠지만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대중예술가와 인플루언서 지망생들이 있고 또 그만큼 성공한 이들도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을 마음껏 대량으로 소비하는 것 외에 사회와 대중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적어 보인다. 우리는 그들을 단순한 소비의 대상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각각 한 명의 주체로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영향력과 의미를 되새겨 보고, 이면에 거대하게 가로놓인 문제들을 고쳐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인플루언서란 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우선 이들은 온라인상의 유명인, 즉 셀러브리티(celebrity) 혹은 셀럽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물론 텔레비전이나 다른 여러 미디어를 통해 이미 알려진 유명인과 소셜미디어나 플랫폼을 통해 새로이 유명세를 얻게 된 이들 모두를 포함해 인플루언서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꼭 셀럽이 아니어도 인플루언서가 되기는 한다. 예컨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책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도,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유명 스타트업 기업의 경영자도 인플루언서다. 유명 음식 및 요리 블로거나 패션 및 뷰티 유튜버도 인플루언서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런데 인플루언서라고 해서 굳이 수십만 명의 팬을 거느리거나 수백만 명의 온라인 팔로어를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는 이들은 단지 수백 혹은 수천 명에 대한 영향력을 지니는 것만으로 인정을 받기도 한다. 인플루언서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든 다수의 사람들에게든 일정 정도의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이들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 ‘영향’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대다수의 업계나 언론이 주목하는 것은 인플루언서들의 상업적 영향력이다. 그 개인이 가진 관계망과 유명세의 영향력에 기대 광고하거나 상품을 판매하는데 획기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기에 인플루언서들에 관심을 쏟는다. 전혀 유명세가 없는 개인도 창의적인 콘텐츠를 만들어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요즘 청년들이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것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인플루언서가 상업적 영향력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가진 영향력이 상업적으로 활용하기 쉽고 또 그러한 욕구에만 사로잡힌 인플루언서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가진 영향력을 함부로 사용하기를 원치 않거나, 보다 더 공(익)적인 목적, 예컨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발언이나 메시지를 통해 대중들에게 접근하는 인플루언서들도 많다. 그런 점에서 대중의 존경을 받는 인플루언서는 웬만한 정치인들보다 훨씬 큰 대중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인플루언서는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라기보다 대중으로부터 어떤 것을 혹은 어떠하라고 강요받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대중 혹은 안티팬들이 자신들의 잣대를 들이대며 인플루언서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말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방식이 다분히 폭력적일 뿐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과도한 혐오와 차별적 표현들이 여과 없이 배설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폭력은 인플루언서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그렇기에 특히 여성 연예인, 그 중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자유롭게 표현하고자하는 이들은 그런 폭력적 혐오 발언의 주요한 타깃이 된다.
여성 인플루언서들은 어떠해야 한다는, 예컨대 대중들에게 예의바르고 순종적이며 모든 면에서 과도하지 않아야 한다는, 모종의 이상적 인간형이 설정된다. 그리고 그 틀에서 벗어나거나 특히 남성 (안티)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고 여겨지면 광범위한 공격에 휘말린다. 이 공격은 취향과 관련된 미적 판단이나 인간성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이 가진 성적 대상화 기제에 손쉽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문화적 불만에 기인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런 대중들의 기제, 일종의 권력관계의 작동은 크게 두 가지 장치 혹은 제도의 연합에 의해 방임되고 강화된다. 하나는 언론(미디어)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산업(엔터테인먼트 기업)이다. 언론사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기사들에 달리는 악성 댓글 혹은 악플이라 불리는 것의 악영향은 꾸준히 문제 제기돼 왔다. 심지어 과거 대통령 선거와 같은 굵직한 정치 이벤트에서도 정보기관에 의한 여론개입의 의도로 악플 어뷰징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렇듯 뉴스 기사에 등장하는 연예인과 인플루언서의 일거수일투족은 악플러들의 손쉬운 언어적 배설의 대상이 된다.
악플러에 대한 처벌 강화나 인터넷 실명제와 같은 방법이 여전히 제시되지만, 문제의 핵심 고리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언론이 오로지 뷰와 클릭수에 매달려 선정적이고 무의미한 기사들을 생산해내고, 그 미디어 환경 내에서 악의적 팬들은 표피적이고 모멸적 반응, 마치 그 언론의 기사가 요구하는 듯한 반응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한 달 남짓 우리 사회를 뒤흔들어 놓은 전 법무부장관과 관련한 정국에서도 보았듯, 뉴스를 제공하는 언론과 그 뉴스를 소비하는 일부 대중들이 서로 되먹임하는 악순환은 모두에 해악을 끼치는 결과를 낳는다. 관심에 곤궁한 언론 미디어와 악성 팬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생관계가 적극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소신있는 인플루언서를 가질 자격은 없을 것이다. 그 첫걸음은 적어도 온라인 뉴스의 댓글을 없애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문화산업 내에서 엔터테인먼트 기업들, 즉 연예기획사나 방송사와 같이 연예인과 인플루언서들을 보호하고 돌보며 육성해야 하는 문화적 기관(?)들이 사실상 얼마나 이들을 착취하거나 대중들에 의해 착취, 유린, 대상화되는 것을 방임하는지에 대한 반성과 책임이 요구된다. 인플루언서들은 계약으로 소유하는 대상도 아니고 꾸며 판매하는 상품도 아니다. 인플루언서들이 대중예술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우리 사회에 멋지고 좋은 영향을 미치는 동료 시민이 되는 기반을 마련하도록 문화산업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만 한다.
어쩌면 궁극적인 인플루언서는 대중 자신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중이 스스로 가진 영향력을 올바로 행사하는 역량을 가진 뒤에야 자신들의 수준에 걸맞는 인플루언서를 가질 수 있다. 미디어와 문화산업을 경유하는 과정에서 훌륭한 인플루언서를 키워낼 수 있는 것은 바로 대중 자신이다. [워커스 60호]
* 이 글은 《워커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