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뉴트로’라는 것이 있다. 복고(레트로)인데 그게 또 새롭다(뉴)는 것이다. 패션이나 대중문화에서 복고는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스타일에 정해진 사이클이 있어 그 사이클이 한 바퀴 돌면 다시 예전의 스타일이 되돌아온다고 생각한다. 스타일의 반복이다. 그러나 모든 스타일은 사실 반복하면서 동일하게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반복되는 스타일에는 늘 변화나 차이가 새로운 요소로 포함된다. 이런 식의 가설을 따르면, 어떠한 스타일도 늘 뉴트로일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타일은 나선형의 모양을 그리면서 반복되고 또 새로움을 자신의 궤도에 집어넣는다.
대중문화나 일상생활에서 낡은 스타일이 반복되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그 낡은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때로는 다시 돌아갈 수조차 없다. 그러나 최근 많은 이들은 레코드판, 즉 엘피(LP)의 귀환이 디지털 문화에 식상한 대중들이 불러일으킨 아날로그적 반격이라고 설명한다. 카세트테이프와 시디(CD), 나아가 디지털 스트리밍까지 점점 더 비물질적인 디지털 음원으로 음악의 매체가 변화하면서, 음악은 손에 잡히고 공간을 차지하는 물리적 특성을 점점 잃어왔다. 그런데 이 디지털, 비물질적 음악의 감상과 소비가 극대화된 이 시기에 그러한 소비적 일상에 익숙해진 (혹은 그것밖에 경험해보지 못한)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오히려 음악의 물질성이 어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열렬한 팬으로서 여러 장의 시디와 엘피를 구매하는 것이 반드시 음악을 듣기 위한 목적은 아니다. 게다가 듣고 싶지만 듣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요즘에는 가정에 오디오/비디오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거나 개인용 컴퓨터에 플레이어가 장착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CD나 디브이디(DVD)를 재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나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등장해 3-40대의 감성을 재확인하고 1-20대의 흥미를 불러일으킨 소형 카세트 플레이어는 아무리 쿨해 보여도 그것을 가지고 다닐 만큼 가볍지 않다. 카세트 플레이어는 이제 웬만한 구형 자동차가 아니면 시골 할머니 댁 창고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니, 차라리 유튜브에서 그 음악들을 찾아 듣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다. 아무리 뉴트로라고 해도 좋아하는 데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영화와 같은 시각 대중예술은 어떤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새로움이 있다면, 그건 캐릭터가 아닌 이야기의 방식이다. 오래된 캐릭터들을 새로운 내러티브 혹은 세계관 속에서 부활시키고 더욱 더 새로운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 낸다. 이것도 말하자면 뉴트로다. 나아가 이용자의 취향에 맞춘 볼거리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넷플릭스에서도 뉴트로는 핵심 요소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는 음악이나 패션만큼 복고나 스타일의 순환에 민감하다. 한 세대의 사이클이 지나면 과거의 콘텐츠를 리메이크하고 속편을 제작한다. 이제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과거의 콘텐츠와 캐릭터들과 장르를 복잡하게 혼합해 오리지널 스토리의 앞이나 뒤에 존재할 법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확장함으로써 계속 새로움을 제공하는 것처럼 위장한다.
아무래도 뉴트로라면 대중문화의 영역을 넘어 일상의 공간에서 더욱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을지로, 성수동, 망원동 같은 힙한 동네에는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낡은 벽이 있는 맛집과 옛 공장 건물을 변형해 녹슨 기계가 남아있는 인더스트리얼 룩의 카페가 뉴트로를 외치고 있다. 낡은 것을 버릴 게 아니라 오늘의 감성으로 되살려내는 것이라면 얼마나 멋있는 일이겠는가 마는, 뉴트로 스타일을 위해 가끔은 처음부터 낡고 오래된 ‘장식’으로 폐허 흉내 내기가 유행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서글픈 일이다.
주로 감성의 측면에 기대는 대중문화에서라면 뉴트로가 전혀 특이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기술의 영역이라면 어떨까? 기술에서도 스타일의 차이나는 반복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매체의 기술은 시대가 변하면 다시 되돌아오기가 어렵다. 새로운 매체는 이전 매체의 역량을 포괄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변하기 때문에, 즉 새로운 플랫폼을 형성하기 때문에 다시 과거의 매체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가 거쳐 온 매체들은 그 자체로 일종의 고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땅속에 파묻히거나 어두운 창고 속에 버려지거나 희귀한 물건이 돼 전시되고 비싼 값에 팔린다. 이렇게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난 기술적 매체들은 앞서 본 카세트테이프나 엘피처럼 아주 가끔 뉴트로 대중문화를 통해 얼굴을 잠시 내밀 뿐이다.
조금 더 엄밀한 기술의 측면에서라면 다른 이야기가 가능할까? 최신의 항해 인터페이스로 화면상에서 손가락으로 여러 미세한 조작을 행하는 터치스크린을 사용해온 미 해군 함정들은 최근 다시 손잡이를 돌려서 작동시키고 조절하는 장치로 모두 바꾸었다고 한다. 이 시대의 사람이라면 너무나 손쉽게 손가락 끝으로 화면상에서 밀어 올리거나 쓸어내어 조작할 수 있는 디지털화된 터치스크린 조정장치가 사실은 오류나 사고를 일으키기 쉬워서 고전적인 조절 손잡이, 놉(knob)을 다시 적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뉴트로가 아니다. 레트로도 아니다. 인간에 의해 엄밀한 조종이나 제어가 요구되는 기술 분야에서는 어쩌면 아날로그적 정밀함이 디지털적 정확함보다 더 적합할 수 있다.
핵무기를 통제, 관리하던 미 국방부의 시스템이 1976년형 컴퓨터와 8인치 크기의 낡은 플로피디스크를 최근까지 사용하고 있다가 적발돼 마침내 최신형 디지털 저장장치로 업그레이드됐다는 소식은 또 다른 생각을 낳는다. 40년 넘게 위험한 무기들을 이렇게 낡은 기술 장치에 의존해왔다는 점에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핵무기를 그만큼 안정적으로 별 탈 없이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낡은 시스템 덕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아 보안성을 높여 주기도 했다니, 레트로 기술이 나름 장점도 있는 셈이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 말아야할 기술도 있고, 시대와 더불어 변화해나가야 할 기술도 있다. 대중문화가 오로지 노스탤지어의 감성으로 흘러간 스타일을 소환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재확인할 수밖에 없다면, 특정한 기술적 유산들은 본성상 인간과의 상호작용의 방식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터치스크린 상의 게임보다 컨트롤러를 손에 쥐고 온 신체로 경험하는 게임, 무인자동차보다 핸들과 조종장치로 체험하는 운전이 지금은 최고라 할지라도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기술과 문화는 반복하면서 다른 것으로 진화하고 우리를 계속 변화된 상황에 놓을 것이다. 어떤 스타일이 유행한다고 말할 때 그 유행은 이미 끝났다. 우리는 그것이 이미 끝난 폐허 위에 있는 것이다. 뉴트로는 그런 역사적 한계 안에서만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