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교조 해직교사 조희주 선생 [출처: 윤지연 기자] |
전교조 해직 교사 조희주 선생의 1300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 겨울이 찾아왔다. 털모자와 털장갑, 방한복을 껴입어도 오래 서 있다 보면 금세 몸이 얼어붙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양손에 쥔 대형 피켓 두 장이 날아갈 듯 흔들린다. 오늘이 며칠 째더라. 지난 연말에 1290일 차를 맞았으니, 벌써 1300일이 넘었던가. 전교조 해직 교사 조희주 선생은 이곳에서 피켓을 들었던 지난 3년 7개월의 시간을 되짚어본다.
피켓에 적힌 문구는 매번 바뀌었다. 오늘은 ‘국가책임 일자리’와 ‘다주택 소유 금지’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그 옆에는 대학 서열 폐지와 무상화를 요구하는 피켓이 세워져 있다. 스텔라데이지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피켓도 자꾸 눈에 밟힌다. 이럴 땐 손이 모자라는 게 영 속상하다. 다 들고 있을 수 없어 눈에 띌 만 한 곳을 찾아 피켓을 세워놓는다. 그제야 마음이 한결 나아진다.
“나한테 1인 시위 중독이라고 농담하는 사람도 있어. 그런데 누가 하고 싶어서 하겠어. 떠날 수가 없으니 그러지.” 조희주 선생이 이곳에서 처음 피켓을 든 날은 2018년 6월 21일. 전교조가 법외노조 취소를 요구하며 청와대 앞 천막 농성에 돌입한 지 삼 일째 되던 날이었다. 전교조 해직 교사로 정년퇴임 한 조희주 선생은 자신도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교조 천막 농성장 옆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경춘선을 타고 홍천 집과 서울을 오갔다. 그때만 해도 이곳에서 까마득한 세월을 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명박 정권 시절 법외노조가 된 전교조는, 2020년 9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에 따라 7년 만에 합법노조 지위를 되찾았다. 청와대 앞에서 2년 넘게 이어온 농성도 끝이 났다. 조희주 선생도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를 요구하던 피켓을 접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네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 사람들, 그래서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이들을 두고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여기서 농성하고 시위하는 사람이 많았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이석기 의원의 누님도 동생 석방을 요구하면서 여기에 계속 같이 계셨어. 세월호 유족들도 여기서 노숙 농성을 했었고. 스텔라데이지호 유족도 있었지. 전교조 문제가 끝났다고 그냥 떠나기가 되게 그렇더라고. 그냥 마음이 그랬어. 그래서 계속 있게 된 거야.”
조희주 선생은 남아 있는 이들과 기약 없는 날들을 함께했다. 다시 네 번의 계절을 맞았고, 함께 해를 넘겼다. 그러는 동안 또 많은 이들이 이곳을 떠나갔다. 어느 것 하나 해결된 것이 없는데도 빈자리만 늘어갔다. 청와대에서 맞는 네 번째 겨울. 이곳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이는 이제 한 사람뿐이다. “이제 어머니 딱 혼자 남았지.” 올해로 일흔셋이 된 이영문 씨는 스텔라데이지호 실종 선원 허재용 씨의 어머니다. “너무 짠하고 슬퍼. 세월호 유족들은 여러 명이라도 같이 있었지. 어머니는 매일 혼자 나와 1인 시위를 해. 어떻게 내가 떠나겠어.”
▲ 스텔라데이지호 실종 선원 허재용 씨의 모친 이영문 씨 [출처: 윤지연 기자] |
아들의 생사도 모른 채 또 한해를 맞은 이영문 어머니
언제부터 청와대에 홀로 서 있었는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까마득하기만 하다. 어느 순간부터 날짜를 세는 것조차 거추장스러워졌다. “코로나 확산되고 나서 이리로 왔어요. 날짜는 잘 모르겠는데, 하루도 안 빠지고 나왔어.” 그전에는 2년 넘게 다른 유족들과 광화문 광장에서 서명을 받았다. 하지만 10만 명이 마음을 모은 스텔라데이지호 심해수색과 진상규명 요구는 여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영문 어머니는 아들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한 채 다시 새해를 맞았다. 그러고 보니, 사건이 발생한 지도 벌써 6년째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제 그만 잊고 살라는 사람이 늘어난다. 걱정돼서 하는 말인 건 알지만 못내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모르니 가슴에 묻고 싶어도 묻어지지 않는다. “죽어서 장례를 치렀으면 마음속에 묻고 살겠죠. 어쩌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생사를 모르잖아. 그 바다에 아들을 두고 온 것이 잊히지 않아. 너무 마음이 아파요.”
2017년 3월 31일, 브라질에서 철광석을 싣고 중국으로 향하던 스텔라데이지호가 우루과이 인근 남대서양에서 침몰했다. 화물선에는 이 씨의 아들 허재용 씨를 비롯해 한국인 선원 8명과, 필리핀 선원 16명이 타고 있었다. 구조된 이는 단 두 명뿐. 나머지 22명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았다. 사건 발생 보름이 지나자 수색 작업에 동원된 군함과 군용기 등이 모두 철수했다. 5월에는 선사인 폴라리스쉬핑의 선박들도 현장을 떠났다. 유족들은 허망한 수색‧구조작업 중단에 강하게 반발했다.
사건 발생 한 달여 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사회 대개혁을 열망하는 촛불 민심이 한창 타오르고 있었다. 이영문 어머니도 새로운 정부에 희망을 품었다. 후보 유세장을 쫓아다니며 수색 재개와 진상규명 등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문재인 후보는 유족들의 목소리에 화답했다. 눈물을 쏟아내는 이 씨와 유족들의 손을 붙잡고, 자신이 당선되면 조속히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조계사에 대선 후보들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날. 이영문 어머니는 또 한 번 후보들을 찾았다. 유족들에게 알은체하며 손수 선전물을 받아 가던 문재인 후보를 보면서, 이 씨는 꼭 그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투표할 정신이 어디 있었겠어. 그런데도 유족들이 다 같이 사전투표를 하러 갔어요. 문재인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면서.”
선거 개표가 한창이던 5월 9일 밤, 이영문 씨는 유족들과 함께 광화문 광장에 있었다. 새벽 두 시 경, 문재인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문재인 후보는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무대에 올라 만세를 불렀다. 이영문 어머니도 그날 무대에 올랐다. 스텔라데이지호, 세월호 유족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대통령 당선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간의 고통과 좌절, 그리고 안도감이 뒤섞인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 모든 것이 잘 될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는 문재인 대통령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1인 시위를 왜 하느냐 물으면
조희주 선생은 지난 3년 7개월간 청와대 앞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대부분 대통령을 향해 요구하거나, 호소하거나, 항의했다. 기자회견이나 1인 시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농성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랜 시간 이곳에 머물다 사라진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이곳을 떠난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해결돼서 떠난 사람은 거의 없어. 그냥 뭐 힘에 부쳐서 그만둘 수밖에 없는 거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떠나도, 나중에 보니 해결이 안 돼서 다시 오더라고. 그런 식이야. 박수 받으면서 떠난 사람은 못 봤어.”
▲ 청와대 전경 [출처: 윤지연 기자] |
일 년 전 겨울. 이곳에선 김진숙 한진중공업 해고자의 복직을 요구하는 단식 농성과 절 투쟁이 이어졌다. 부산에서부터 천 리 길을 걸어 온 김진숙 해고자는 청와대 앞에 도착해 “문재인 대통령님, 내가 보이십니까”라고 외쳤다. 이곳에서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 이들은 대통령을 향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대부분 전환 대상자에서 탈락하거나, 무기계약직 신분이 되거나, 또 다른 ‘용역회사’인 자회사로 편입된 노동자들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1호 공약이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이들에게 ‘차별’과 ‘배제’라는 상처만 남겼다.
“제일 안타까웠던 건 이석기 누님이 돌아가셨을 때지. 아무래도 여기서 농성 투쟁을 하면서 몸이 더 상하신 것 같아. 천막이나 차에서 자면서 투쟁했으니까.” 박근혜 정권의 정치 공작 희생자인 이석기 전 의원은 2013년 9월 내란음모 및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징역 9년 형을 받고 구속됐다. 이석기 전 의원의 누나 고 이경진 씨는 동생의 석방을 위해 싸우다 지난해 3월 19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6개월 뒤인 12월 24일, 이 전 의원은 구속 8년 3개월 만에 감옥에서 나왔다. 같은 날, 국정 농단의 주범인 박근혜 전 대통령도 출소했다. 이석기 전 의원은 가석방이었고, 박 전 대통령은 특별사면이었다.
문재인 정부 5년을 절망과 고통 속에서 보낸 이영문 어머니 또한 안타깝다. 피켓 하나 들기조차 힘든 날들을 버텼다. 조희주 선생은 코로나 거리 두기 4단계 시행 당시, 1인 시위조차 쉽지 않았다고 했다. 경찰은 같은 내용으로 1인 시위를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했다. 조 선생이 스텔라데이지호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으면, 이영문 어머니의 시위 내용과 겹친다며 트집을 잡았다. 피켓 문구가 코로나19 방역과 무슨 상관인 건지, 실제로 그런 방역지침이 있긴 한 건지 설명조차 듣지 못했다. “그때 많이 싸웠지. 내용이 비슷하다고 못 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어. 피켓 하나 세워놓지 못하게 했고. 얼마나 웃기고 황당했는데.”
매일 청와대 앞 1인 시위를 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우리의 목소리가 전해지는지도 알 길이 없다. 다만 우리의 싸움이 사라지거나 잊히지 않도록, 언젠가 찾아올 해결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도록 끈질기게 버티고 버틸 뿐이다. “효과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 효과가 있든 없든 끈질기게 싸운다는 게 중요한 거지. 싸우지 않으면 바뀌지도 않으니까.”
청와대 앞에도 봄이 올까
오전 열한 시, 조희주 선생이 청와대 분수대 앞에 피켓을 들고 선다. 이영문 어머니가 그와 인사를 나눈다. 이영문 어머니는 매일 같은 시간, 함께 피켓을 들고 선 조희주 선생이 늘 고맙다. 황량한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홀로 서 있을 생각을 하면 마음이 얼어붙는다. “기자회견이라도 없는 날에는 이 광장에 혼자 뻗치고 서 있어야 하는데….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저 혼자 있었겠죠. 너무 의지가 되고 고마워요. 이런 분이 또 어디 계실까 싶고.” 그는 지난해 4주기 때, 자신이 오열하는 모습을 본 뒤 조 선생이 매일 곁에서 피켓을 든다고 했다. “내가 처참하게 우는 걸 선생님이 봤어. 그때 마음이 안 좋으셨나 봐. 하루도 안 빠지고 나오셔요.”
▲ (왼쪽부터) 스텔라데이지호 실종 선원 허재용 씨의 모친 이영문 씨와 전교조 해직교사 조희주 선생 [출처: 윤지연 기자] |
지난 5년간, 그는 수십 번도 더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식 직후, 유족들은 청와대에 스텔라데이지호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민원을 접수했다. 청와대는 유족의 요구를 ‘1호 민원’으로 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해 7월, 정부는 별다른 성과 없이 실종자 수색 작업을 종료했다. 수색을 시작한 지 17일 만이었다. 수색 선박의 계약이 만료됐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실종된 가족의 생사는 또다시 알 길이 없어졌다. 어째서 초대형 광석운반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침몰한 것인지, 선원들은 왜 집에 돌아올 수 없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유족들은 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심해수색을 요구했다. 국회 역시 관련 예산을 책정했다. 하지만 그해 말, 기획재정부는 관련 예산 전액을 삭감했다. 민간 선사와 유족이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2019년이 돼서야 1차 심해수색이 이뤄졌다. 수색 과정에서 실종 선원의 유해로 추정되는 뼛조각 등이 발견됐지만, 수색 업체는 유해를 수습하지 않은 채 배를 돌렸다. 한국 정부가 의뢰한 과업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발견된 항해자료기록장치(VDR) 또한 수색 과정에서 훼손돼 복원되지 못했다. 유족들은 2차 심해조사를 요구했지만 매년 반복되는 기재부의 예산 삭감 앞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고의 책임이 있는 선사 경영진은 솜방망이 처벌을 받거나 법망을 빠져나갔다. 회사는 25년 된 노후 선박인 스텔라데이지호를 유조선에서 화물선으로 개조해 운항해 왔다. 그 과정에서 선체 결함 등의 문제가 발생했는데도 이를 방치했다. 사고 발생 후 늑장 대처로 참사를 키웠다는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1심 법원은 사건 발생 2년 뒤에야 폴라리스쉬핑 김완중 회장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법인에 1,500만 원 벌금을 선고했다. 지난해 5월에는 고등법원이 김 회장에게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으나, 코로나19에 따른 구치소 상황을 이유로 구속하지 않았다.
“왜 내 자식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이유는 알아야 하잖아요. 또 죄를 지은 놈은 죗값을 치러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무것도 해결되는 게 없어. 기재부가 반대해도 대통령이 의지가 있으면 할 수 있는 문제잖아요.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하잖아. 어떻게 5년을 나 몰라라 할 수 있느냐고.”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해도, 문재인 대통령 내외에게 손편지를 써서 보내도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5년이 지났고, 얼마 후면 대통령의 임기도 끝이 난다. 한 달여 뒤 취임할 새로운 대통령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될까. 왠지 봄이 멀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