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넷플릭스] |
영화 <돈룩업>(Don’t Look Up)은 코미디의 형식을 빌려 절멸의 위기를 맞은 인류가 어떻게 이 위기에 대응하는지를 풍자적으로 그린다. 메시지의 핵심은 당장 눈앞의 이해에 사로잡혀 위기를 위기로 보지 못하는 사회체제의 현실이다. 공룡을 멸종시켰던 크기의 혜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에도 정치권력은 ‘위를 올려다보지 마라’는 메시지를 내보내고, 기업은 위기의 상황을 이윤의 계기로 삼으려 한다. 언론도 당장의 시청률이나 조회수에 사로잡혀 위기를 위기처럼 보도하지 않는다. 반면 위기의 심각성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이들의 간절한 호소는 주변화된다. 그리고 인류는 망한다. 슬프지만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영화를 본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누구는 많이 웃었다 하고 누구는 너무 무서워 눈물을 흘렸다 한다. 기후 활동가들은 하나 같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절절한 공감, 공분, 절망을 이야기한다. 영화는 그만큼 기후위기를 대면하고 있는 인류의 무대책과 무책임을 무섭도록 정확하게 묘사해낸다. 처음 혜성 소식을 듣고 무시하다가 지지율이 떨어지니 위기를 반등의 기회로 삼고자 과학자의 조언에 귀 기울여 보려는 정치권력. 그러다가도 혜성이 돈이 될 수 있다는 소리에 그들은 대자본과 결탁해버린다. 기업은 검증되지 못한 기술을 해법이라 선전하며 주가 상승으로 막대한 이윤을 챙기고, 상업화된 언론은 공공적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모습이다. 문제는 이들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사회의 ‘어른’들이란 점이다. 그리고 영화 속 대통령은 걱정 가득한 과학자에게 “이제 어른들과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라며 인화성 물질이 있다는 경고문을 뒤로하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영화는 정치권, 기업, 언론의 위선과 무책임에 무자비한 풍자와 비판을 던진다. 동시에 제도화된 권력이 주조해내는 사회문화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댄다. 영화는 특히 일상적 사회관계와 대중문화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작동하는 감정에 큰 무게를 두는데,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을 불편한 것으로 여기고 피해야 할 것으로 삼는 현대인의 문화는 중요한 테마를 이룬다.
배시(Bash)사가 곧 출시할 휴대폰에는 체온과 맥박 등을 감지해 소유자가 슬픈 감정이 들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알고리즘이 장착돼 있다. 슬픔이 감지되면 휴대폰은 알아서 닭에 업힌 강아지 같은 기분 좋아지게 만드는 사진을 보여주거나 주변의 테라피스트를 소개해주는 식이다. 사회가 불편한 것으로 규정한 감정을 피하는 문화는 두 과학자가 백악관을 방문한 자리나 처음 출연하게 된 TV 토크쇼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긴장해 숨을 몰아쉬며 혜성이 가져올 재앙에 대해 말하는 과학자 앞에서 비서실장은 그의 호흡을 지적하며 듣기 싫다고 짜증을 낸다. 토크쇼 호스트들은 거대한 혜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애써 농담으로 받는다. 보다 못한 과학자는 지금 지구 전체가 파괴될 문제를 이야기하는 거라고, 이건 무섭고 불편해야 할 문제라고 또박또박 말하더니 급기야 감정에 북받쳐 우리는 다 죽을 거라고 울부짖으며 뛰쳐나간다. “나쁜 뉴스도 가볍게 다루는” 것이 자신들의 일이라 말하는 호스트는 어색한 농담으로 상황을 수습하고 울부짖던 과학자의 얼굴은 밈이 되어 인터넷을 떠돈다.
서로 기분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 타인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해선 안 되는 것으로 여기는 문화는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타인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꺼내면 사회생활을 못 한다고 비난받기 일쑤고, SNS는 남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콘텐츠로 ‘좋아요’를 많이 받는 경쟁장이 돼버린 지 오래다.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래서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면 선을 넘는 것으로 이해되는 사회 분위기, 서로 불편하게 만들지 않겠다며 반대의 목소리가 필요할 때조차 입 다물고 웃으며 넘겨야 하는 상황에 우리는 익숙하다. 그러면서 익명의 공간에서는 더없이 심한 혐오 발언을 발견한다. 이런 문화는 개인 간 소통에 걸림돌이 될 뿐 아니라 불편함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사회 이슈들이 공공의 장에서 활발하게 토론되는 것을 방해한다. 기후위기라는 불편한 진실이 그 무게에 걸맞게 공론화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불편함을 피하는 문화는 기업과 상업 언론의 마케팅으로 더욱 강화된다. 그리고 정치권력의 조작에 힘입어 듣기 싫은 소리에는 아예 귀를 막는 방식으로 정치 영역에서도 확대 재생산된다. 혜성은 점점 가까워지는데 정치 엘리트는 이를 다른 편의 음모로 치부한다. 정부와 기업은 자신들의 계획대로만 가면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고 각종 매체를 통해 선전한다. 사람들은 정치집회에서 ‘돈룩업’을 따라 외치고 평범한 주부는 혜성이 창출해낼 일자리에 기대감을 갖는다. 영화는 이처럼 권력과 자본을 가진 이들(이들에 저항하는 과학자도 문화 자본의 소유자다)을 세상을 움직이는 주체로 설정한다. 일반 시민은 대체로 이들 권력자에 의해 조작되는 수동적 존재로 묘사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일정한 편향 혹은 한계를 보인다.
이런 한계는 영화가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 맥락에서 트럼프 공화당에만 풍자와 비판의 초점을 맞추는 것과 연결된다. 혜성이 돌진하고 있는데 위를 올려다보지 말라는 영화 속 대통령이나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무슨 지구 온난화냐’라고 묻는 트럼프식 기후 부정론이야 당연히 비난의 대상이 돼야 한다. 하지만 버니 샌더스와 AOC가 급진적 그린뉴딜을 들고나왔을 때 가장 먼저 반대했던 것은 민주당 주류였고, 기후위기 해결을 깃발 삼은 바이든 대통령은 얼마 전 멕시코만에 사상 최대의 화석연료 채굴을 허용했다. 미국의 양당은 형식적 대결 구도를 만들어 싸우지만, 실상은 적대적 의존관계를 통해 카르텔을 형성, 정치권력을 독식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미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런 현실에서 양당 구도의 어느 한쪽에만 손가락질한다면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기후위기가 악화하는 데에는 위기 자체를 부정하는 자들 탓도 있지만, 입으로는 위기를 말하면서 당장 필요한 행동에는 인색한 이들의 탓도 크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류 정당들은 똑같은 자본의 노예다. 아무리 녹색을 외쳐도 기업은 이윤 추구가 최우선의 과제다. 아무리 비판적인 언론도 광고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위를 올려다본들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나마 영화에서 위안을 얻는 것은 진실을 알고자 했던 일반인들이다. 이들은 진실을 알게 됐고 곧바로 행동에 나선다. 혜성이 지구를 덮치는 종말의 순간, 다들 당황스럽게 위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식탁에 모인 사람들은 위를 올려다보지 않는다. 손을 맞잡고 서로를 바라보며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곳은 위도 아래도 아닌 바로 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