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돌봄사회화공동행동(공동행동)은 8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는 경쟁과 이윤이 아닌 연대와 평등에 기초한 돌봄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네 자녀를 둔 여성이 공부를 시작하면서 어려움을 겪은 사연이 전해졌고, 20, 30대 여성이 나서 비혼 여성이 ‘예비 돌봄 책임자’로 여겨지는 현실을 비판했다.
공동행동은 △모두를 위한 공적 가사·돌봄체계 구축 △모든 가사·돌봄 노동자에게 노동법 전면 적용 △가사·돌봄 기관 정부·지자체가 직접 운영, 직접 고용 △가사·돌봄 노동의 가치 인정 △여성에게 전담된 가사·돌봄 이제 모두의 노동으로 등 요구를 담은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정부의 돌봄에 대한 재정 지출이 GDP의 1%에 달하지만, 사람보다 이윤이 우선되면서 공공의 가치는 약화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것이 사회서비스의 질 하락은 물론, 돌봄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악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행동이 말하는 ‘가사·돌봄사회화’는 보편적인 가사·돌봄을 필요한 누구에게나 제공돼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시장화된 돌봄,
서비스 소외 확대와 열악한 노동 처우로 이어져
돌봄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은 서울시 운영의 서울시사회서비스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울시사회서비스원의 장애인활동지원사인 김정남 공공운수노조 서울시사회서비스원지부 사무국장은 “지난해 12월 서울시사회서비스원 돌봄 노동자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일터에서의 차별 처우에 대해 시정해줄 것을 진정하기도 했다”라며 “이것은 여성이 하는 일로 평가 절하된 돌봄 노동이 노동시장에서도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낮은 임금의 노동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영미 한국가사노동자협회 대표는 돌봄 서비스가 시장화되면서 돌봄에 소외가 확대하고, 노동자들은 열악한 처우에 놓였다고 꼬집었다. 그는 “간병비가 없어 끝없는 장애 자녀 돌봄의 고민으로 목숨을 끊고, 직장에서 일하고 집에서는 살림에 치여 가족 간 싸움이 일어나는 등 얼마나 많은 사회문제가 일어나고 있는가”라며 “어떤 일을 하건 돌봄노동자들은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라고 했다. 최 대표에 따르면 돌봄 노동자들은 100만 명이 넘고, 민간에 40만 명, 공공에 60만 명이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수 가사돌봄사회화공동행동 활동가는 정부가 돌봄 서비스를 직접 제공해야 하는 이유를 강조했다. 그는 “2020년 요양 서비스 시장 10조3백억 원 중 공적 재정이 70% 이상을 차지하고, 아동 돌봄도 정부 재정지원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부는 공공부문에서 가사·돌봄 서비스를 직접 공급하는 대신, 재정 지원과 민간시설에 대한 관리·감독 업무만 담당하고 있다. 그 결과 사회서비스 부문 노동자의 임금은 전체 노동자 평균임금 대비 53.1%에 불과하고, 요양보호사의 경우 40.4%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라며 “공적 돌봄체계는 사회적 권리로서 돌봄권을 보장받고, 이용자의 존엄과 자기 결정권을 존중받으며, 돌봄 노동자들에 대한 ‘가치’가 제대로 인정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K장녀’ ‘네 아이 엄마’의 무급 돌봄 노동…
여성 전담 돌봄 구조를 바꾸기 위한 방법은?
기자회견에는 무급 가사·돌봄 노동에 고통받는 여성들도 나섰다. 20, 30대 비혼 여성인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의 안나 활동가는 “가족 중 누군가 돌봄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혼 여성, ‘비혼인 딸’은 돌봄을 맡을 수 있는 적임자”로 뽑히는 현실을 비판했다. ‘K-장녀(한국(Korea)의 앞글자 ‘K’와 ‘장녀’의 합성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최근 백신 접종을 한 엄마의 미열과 두통 증상으로 가사노동이 내 책임이 됐다. 엄마에게 약을 챙겨주고, 빨래를 개고, 밥상을 차렸다”라며 “그날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던 엄마는 ‘이래서 딸이 좋아’라고 했다”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안나 활동가는 만약 아픈 가족이 있다면, 이날 기자회견은 물론 일도 그만두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했더라도 죄책감이 가득했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실제 그의 친구 중에는 할머니 간병을 위해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안나 활동가는 “가족 중심의 돌봄 체계는 여성에게 ‘좋은 딸’이 되라고 강요한다”라며 “그중 비혼 여성은 아주 만만한 예비된 돌봄 책임자”라고 지적했다.
네 아이를 키우다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는 여성의 사연도 전해졌다. 익명으로 주최 측에 이야기를 건넨 그는 “하루에 한두 시간, 일주일에 단 몇 시간만이라도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있는 것”이 간절한 바람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커가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됐는데,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학업을 마치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집에서는 엄마가 학생일 수가 없으니 살림에 육아로 너무 힘이 든다. 비대면 수업 날은 행여나 아이들이 화면에 나오기라도 할까 봐 온 신경이 곤두선다”라고 전했다.
이렇듯 일상에서도 여성들은 가사·돌봄을 수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기자회견에서는 “모든 사람이 누군가를 돌본다는 전제로 사회가 변화”해야 돌봄을 여성이 전담하는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조한진희 다른몸들 활동가는 “맞벌이 부부와 외벌이 부부의 남편 가사노동 차이는 여전히 5분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이 안의 워킹맘들은 과로사하고 있다. 은유로서 과로사가 아니”라고 강조하며 “모든 인간은 취약하고 의존적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 돌봄이 모든 인간이 수행해야 할 덕목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돌봄의 고통뿐 아니라 기쁨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라고 밝혔다.
끝으로 이들은 여성에게 주어진 돌봄의 역할을 정부·지자체에 넘기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한편 공동행동은 지난해 11월 가사‧돌봄사회화 공동선언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가사·돌봄의 사회화를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는 조직이다. 이들은 공적 가사·돌봄 체계 구축과 성별 분업 철폐, 가사·돌봄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을 중심으로 가사·돌봄 노동의 사회화 방안을 담론화하고 실천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