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덤(freedom), 만세 만세 만만세!” 영어와 한국어가 섞인 낯선 말이 리듬을 타고 귀에 꽂힌다. ‘만세’라고? 내가 정확히 들었나 싶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M씨가 다시 그루브(groove, 리듬)를 타며 외쳤다. “프리덤(freedom), 만세 만세 만만세!” 단호하면서도 경쾌한 그의 독특한 구호는 함께 행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껏 끌어올리는 힘이 있었다. 그의 외침에 나도 힘을 보태 자유를 향한 소리를 울렸다. 아직도 갇혀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15년 전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억하며.
지난 2월 10일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15주기 추모 행동’에서 M씨를 처음 봤다. 아니 그를 처음 본 것은 지난해 9월 언론으로 드러난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화성 외국인보호소에 갇힌 M씨의 얼굴에는 머리보호대가 씌어 있었고, 손발을 묶어 등 뒤로 꺾는 이른바 ‘새우 꺾기’라는 가혹행위를 당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을 ‘화성 관타나모’라고 이름 붙였다. 그곳에서 M씨는 폭력에 맞서 “freedom and justice(자유와 정의)”를 외치며 342일을 견뎠다. 그의 용기에 응답하며 자유와 정의를 외치는 이들의 연대의 힘으로 나는 그를 거리에서 만나게 됐다. 그를 따라 구호를 외치며 ‘자유’와 ‘보호’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이틀 전 ‘보호일시 해제’가 허가돼 지금 우리와 함께 행진하고 있다. 법무부가 인권침해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지 정확히 100일 만에 겨우 이뤄진 조치였다. 법무부가 그를 ‘보호’에서 풀어주었기에 그는 자유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보호외국인’으로 만들어 자유를 박탈하고 억압했다. 그가 복종을 거부하고 저항하자 ‘보호소’는 그를 벌주었다. 대체 이 ‘보호’란 무엇인가?
‘보호’가 사라져야 자유로울 수 있다
M씨가 갇혀있던 화성 외국인보호소와 같은 외국인 보호시설은 명칭만 ‘보호’이지 사실상 집단수용이며 구금시설이다. 지급된 의복을 입고 정해진 규칙과 계획표에 따라 생활해야 하고 외출은 허락을 받아야 가능하다. 적절한 식사와 충분한 운동은 보장되지 않고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이용은 거의 불가능하다. CCTV가 24시간 작동하고 보호외국인이 생활하는 구역은 출입이 제한되며 담당공무원의 직무집행이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독방에 가두거나 보호장비(수갑, 포승, 머리 보호장비)도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자유를 박탈하고 통제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이유는 보호시설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M씨를 독방에 가둔 것은 ‘기타, 지시 불응 등’의 이유였다. M씨에게 가한 가혹행위는 그가 난동을 부려 피보호자의 생명과 안전, 보호시설 질서유지 및 직원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했다. 즉, M씨는 보호시설의 안전과 질서를 훼손하고 심지어 본인에게도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법무부의 말처럼 M씨가 문제적인 사람이라서 일어난 사건이라기엔 같은 인권침해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장기 보호외국인들은 독방 격리를 매우 빈번하게 경험했다고 한다. 2019년 4월에도 화성 외국인보호소에서 ‘새우 꺾기’ 사건이 발생했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침해라고 판단했다. 인권침해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일탈이나 개인적인 행위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공간을 운영하는 방식의 문제, 그 공간을 운영하는 집단의 조직적인 문제라고 봐야 한다. M씨가 원인이 아니라 화성 외국인보호소가 문제적인 공간이어서 발생한 사건이다. 인권위는 외국인보호소에서 인권침해 사건이 반복되는 것은 직원들의 업무 미숙 및 규정 미비 문제만이 아니라, 일시보호시설로 설계된 외국인보호소에 외국인들이 장기 구금되는 구조적 현실에서 기인한다고 봤다.
출입국관리법 제63조 1항은 강제퇴거명령을 받은 사람을 ‘대한민국 밖으로 송환할 수 있을 때까지’ 보호시설에 보호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장기간 구금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강제퇴거명령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잘못이라 할 수 없는 상황(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의미)에 몰려 출국명령을 따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부당하고 위험한 일터를 벗어났거나, 월급을 받지 못해 체류기한을 넘겼거나, 생존을 위한 탈출로 위조여권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거나, 체류기간 연장 신청 날짜를 하루라도 놓친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보호소로 끌려온다.
어떤 사람은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사람들과 이별을 나눌 새도 없이 쫓겨난다. 어떤 사람은 체불 임금을 받아야 하기에, 돌아갈 곳이 더 위험하기에 기약 없는 구금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곳은 갇힌 사람을 보호하는 곳이 아니기에, 자유를 박탈하고 권리를 제한하는 곳이기에 부정적인 감정을 끊임없이 마주하게 된다. 부당한 구금에 대한 의문과 인간에 대한 존중 없는 처우에 분노가 생긴다. 언제든지 강제로 쫓겨나거나 영원히 갇힐 수 있다는 불안과 고립의 공포가 감싼다. 보호소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이 피폐함으로 자신이 파괴돼가는 것을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M씨는 “freedom and justice”를 외치며 ‘보호’를 거부했다. 자유를 삭제하는 ‘보호’를 거부해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저항이야말로 자신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폐쇄된 공간에서 저항 행위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게 자신을 ‘보호’하려고 용기 낸 사람에게 보호소는 안전과 질서를 위해 징벌한다. 보호소를 ‘보호’하려면 위험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인 보호시설이 ‘보호’하려는 것
외국인 보호시설은 사람보다 시설의 ‘보호’를 우선한다. 시설보호는 시설의 효율적 관리와 기능 유지를 통해 시설 밖 사회를 ‘보호’하는 것으로 확장·연결된다. 수용된 사람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외국인 보호시설 내부와 외부는 같은 목적으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인 보호시설 밖 이주민들의 자유와 권리 역시 제한된다. 이주노동자는 열악한 노동조건에서도 사업장 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난민 신청자들은 동향조사라는 이유로 감시받는다. 정부는 ‘불법체류자’와 ‘가짜 난민’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시민에게 신고를 권유한다. 이주민은 한국 사회에 이웃으로, 동료로 자리를 만들지 못한 채 관리되고 솎아내야 할 존재가 된다.
지난해 말 헌법재판소는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 사유 제한을 합헌으로 결정했다.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의 자유가 사용자의 안정적 인력 확보와 사업장 운영을 어렵게 한다는 이유였다. 이어 “불법체류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에서 외국인 근로자의 효율적인 관리 차원에서도 사업장의 잦은 변경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라고 밝혔다. 헌재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적인 권리 제한보다 확보하고 관리해야 할 노동 자원으로 우선하는 관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8월 입국한 아프가니스탄 특별 기여자 29가구 157명이 울산 동구에서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학령기 청소년 64명의 학교 배정 발표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들의 종교를 이유로 자신의 자녀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에 불안함을 드러낸 것이다. 필요에 따라, 무해함을 증명함으로써 머무를 수 있는 존재는 언제나 (체류) 허가를 전제한다. 이들은 존엄한 존재로 각자 고유한 세계로 함께 머무를 수 없다. 보호소 안과 밖 모두 이주민에게 거대한 시설이 돼 자유와 권리를 저당 잡힌 채 살게 한다. 이주민의 불안한 삶은 국가가 내국인에 보증하는 안전과 질서로 선전된다. 국가는 추방 정책을 유지함으로써 비국민 또는 불법 이주민을 ‘자국 영토’에서 실제로 제거할 수 있다는 신화를 심화시킨다1). 이 신화를 유지하고 심화하는 경로의 마지막에 외국인 보호소가 있다.
[각주]
1) 고은지, “한국사회와 난민, 그리고 탈시설”, ≪시설사회: 시설화된 장소, 저항하는 몸들≫(2020), 장애여성공감 엮음, 와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