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희망버스의 시동을 거는 이유

[기고] 최장기 고공농성에도 간판만 바꿔 되살아난 택시 사납금제

주머니 사정이 빤한 박봉의 직장인들이나 학생들에게 싼값에 푸짐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 ‘기사식당’만한 곳이 없다. 이곳을 자주 찾는 단골손님은 단연 택시기사들이다. 도심 어디를 가더라도 기사식당이 성행하게 된 유래가 무엇일지 문득 궁금했다. 인터넷 백과사전을 뒤적여 보니 이런 설명이 눈에 띄었다. “외식의 비중이 높은 데 비해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고 영업을 많이 뛰어야 하는 택시기사의 형편상” 빠르게 제공될 수 있는 음식으로 차림표를 구성한 게 기사식당의 주된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내 구석구석 가보지 않은 곳이 없는 택시기사들이 애용하는 기사식당은 그럭저럭 괜찮은 맛과 저렴한 가격을 동시에 충족한다.

곱씹어 생각해 보면 기사식당의 성업은 사실 돈과 시간의 결핍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고된 일상이 만들어낸 풍경이기도 하다. 결국 다수의 택시기사들이 위장약을 달고 살 수밖에 없는 까닭도 매일같이 벌어지는 이 속도전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시시각각 옥죄는 사납금이라는 굴레

택시 노동자들의 속도전은 밥상 앞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루 15만 원에 달하는 ‘사납금’을 맞추려면 긴 시간 운전대를 잡아야 할뿐더러 수시로 가속페달을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법인택시 소속 택시 노동자들은 이렇게 매일 거둬들이는 운송수입금의 일부를 꼬박꼬박 회사에 의무 납입해야 한다. 이 사납금을 제외한 당일 운송수입금이 택시 노동자의 몫으로 돌아온다. 매일 고정된 액수의 사납금을 채우고 나서야 나머지 시간에 거둔 추가 운송수입을 비로소 호주머니에 챙겨갈 수 있는 것이다. 승객이 없어 공치는 날도, 택시 노동자가 아파서 쉬는 날도 사납금은 예외 없이 징수된다. 심지어 지난 2년간 코로나19 확산으로 음식점 등 영업제한이 계속되면서 택시 이용 승객이 대폭 감소했지만 사납금 부담은 경감되지 않았다.

택시 노동자들이 사납금을 ‘현대판 노예제’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점심시간 때마다 기사식당 앞 도로변에 즐비한 택시 행렬이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걸 보면 사납금의 위력을 어느 정도 실감하게 된다. 끼니는 거를지언정 사납금은 거를 수 없는 택시 노동자들에게 잠시라도 운전대를 놓고 있을 여유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장시간 운전은 물론이고, 졸음운전, 과속/난폭운전, (장거리 손님만 골라 태우는) 승차거부가 관행처럼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간판만 바꿔 되살아난 사납금제

그런데 참 이상한 노릇이다. 2년 전 법 개정을 통해 사납금제가 폐지되었다는 소식을 언뜻 접한 것 같은데, 코로나 시국에도 사납금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다니 무슨 영문일까.

2020년 1월부터 여객자동차운수법 개정으로 택시 전액관리제(월급제)가 시행된 가운데 사납금이 법적으로 폐지되었다는 소식을 많은 사람들이 뉴스 보도를 통해 알고 있다.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으로 회자됐던 김재주 택시 노동자의 전주시청 앞 510일 고공농성 투쟁으로 사납금제의 폐단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거니와, 마침 플랫폼 대기업의 모빌리티 사업 진출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던 차였다. 당시 정부는 관련 법령을 정비하면서 기존 택시업계와 플랫폼 대기업의 상생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한편, 안전하고 친절한 택시 서비스를 위해 택시 월급제를 조속히 정착시키겠다는 목표를 천명한 바 있다.

그렇게 택시 월급제가 법제화되었고 조기정착을 위해 정부가 힘쓰겠다고 공언도 했지만, 현실은 꿈쩍하지 않았다. 국토교통부 발표에 따르면, 전국 법인택시회사 중 10%만이 전액관리제를 시행 중이고 나머지 회사는 사실상 사납금제가 존속하고 있었다.

택시 월급제의 법제화는 곧 사납금제의 완전한 폐지를 뜻한다. 사실 택시 월급제는 1997년 9월 1일 시행된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에서 ‘운송 사업자는 운송 수입금 전액을 운수 종사자에게 받아야 하며, 운수 종사자는 운송 수입금의 전액을 운송 사업자에게 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소관 부처인 국토교통부 역시 2000년 ‘택시운송수입금 전액관리제 시행요령’을 발표해 이미 법적 근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법인택시 사업주들은 사납금 징수 구간을 일 단위에서 월 단위로 확대하고 ‘운송수입 기준금’으로 기존 사납금제의 이름만 바꾸는 식으로 택시 현장에서 변형 사납금제를 존치해 왔다.

2017년 9월 4일 김재주 택시 노동자가 전주시청 앞 고공농성을 했던 이유도 장기간 근절되지 않는 사납금제를 강력하게 단속하고 택시 월급제의 실질적 이행을 위한 제도적 근거의 마련을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제도의 허점과 정부의 행정공백

정부여당은 사납금제의 폐단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자 2019년 8월 여객자동차운수법과 (주 40시간 월급제를 보장하는) 택시발전법 개정을 통해 택시 월급제를 강행하는 규정을 명문화했다. 불법 사납금제 대신 택시 월급제를 전면 시행하는 법률이 애초 없던 것도 아닌데, 사납금이 근절되지 않으니 관련 법령을 더욱 철저히 보완하기로 한 것이다. 김재주 택시 노동자가 510일 만에 땅을 밟게 된 계기도 정부여당의 이 같은 약속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이 물러나면서 스스로 몇 안 되는 성과 가운데 하나로 꼽았던 택시 월급제는 끝내 정착에 실패했다.

2019년 12월, 김현미 전 장관은 퇴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집 걱정을 덜어드리겠다는 약속을 매듭짓지 못하고 떠나게 돼 무척 마음이 무겁고 송구”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택시 완전월급제는 30년 만에 실현됐다”며 재임 중 자신의 치적으로 택시 월급제를 자랑스레 언급했다.

역대 국토교통부 장관 중 최장수 재임 기록을 남긴 장관의 자화자찬이 있었지만, 택시 월급제는 여전히 불법 사납금이 기승을 떨치면서 오리무중에 빠졌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불법을 규제할 수 있는 근거 법령(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과 국토교통부 훈령)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택시업계의 오랜 관행이라는 이유로 막지 못한 세월이 무려 25년이었다.

적어도 택시 월급제 시행에 있어서는 법제도의 미비가 아니라 행정당국의 집행 책임과 의지가 부재했던 게 문제의 핵심 이유였다.

400리길 희망뚜벅이-뛰뛰빵빵 4.2 택시 희망버스

2017년 9월 김재주 택시 노동자의 510일 고공농성이 마지막이길 바랐건만, 2021년 6월 또 한 명의 택시 노동자가 다시 망루 위에 올랐다. 택시 월급제를 시행하는 강행규정이 신설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30년 적폐’ 사납금제의 근절과 주 40시간 택시 월급제의 즉각 시행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법령의 존부 자체가 아니다.

[출처: 공공운수노조]

주 40시간 택시 월급제를 보장하는 택시발전법은 단서조항을 통해 사납금제가 건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택시발전법 제11조의 2항에 따르면, 서울시에 한해 2020년 1월부터 주 40시간 노동시간을 적용하되 나머지 지역은 ‘공포 후 5년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서울시의 성과, 사업구역별 매출액 및 근로시간의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날’로 시행일을 정하도록 했다. 택시발전법 제11조의 2항은 택시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1주 40시간 이상이 되도록 보장해 완전월급제의 시행근거를 마련하고 있는데, 이를 서울시에 우선 적용하고 나머지 지역은 최대 5년 유예함으로써 정부가 앞장서 전면 시행을 가로막은 셈이다. 물론 해당 조항은 대통령령으로 전면 시행이 언제든지 가능함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결단하기만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택시월급제의 전국 시행이 가능한 것이다.

명재형 택시 노동자의 세종시 국토교통부 앞 고공농성이 시작된 지 어느덧 300일을 바라보고 있다. 승객을 실어 날라야 할 택시 노동자가 망루 위에 위태롭게 몸을 실은 채 ‘법 준수’를 외치는 일이 도대체 언제까지 반복되어야 할까.

300일째 하늘 감옥에 자신을 가둔 명재형 택시 노동자가 바라는 것이나, 오늘도 기사식당에서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는 택시 노동자들이 바라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게 없고 그리 거창할 것도 없다. 택시 노동자들이 돈과 시간의 결핍에 만성적으로 시달리게 만드는 근원인 법인택시 사업주의 불법경영을 바로잡는 것, 그로써 택시 노동자들과 이용 시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땀 흘려 일한 만큼 노동의 대가를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택시 노동자들은 정부가 수수방관하는 가운데 사업주에게 도둑맞은 돈과 시간을 더 이상 빼앗길 수 없다고 온몸으로 절규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가 이제 50일도 채 남지 않았다. 대통령 직권으로 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일들 가운데 지금 운위되는 사안이 고작 전직 대통령의 사면이라니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임기 내 실현하기로 한 수많은 약속들이 빛을 잃은 채 서서히 꺼져가고 있다. 대통령은 이제라도 국민 앞에 한 약속들을 지키길 바란다.

4월 2일, 고공농성 300일 사태 해결, 주 40시간 택시 월급제 당장 시행을 촉구하는 <뛰뛰빵빵 4.2 택시 희망버스>가 전국에서 시동을 건다. 그에 앞서 3월 23일~3월 31일에는 택시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함께 세종시 국토교통부에서 서울까지 <400리길 희망뚜벅이> 도보행진에 나서기로 했다.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시행일을 정해서 공포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거기에 복잡하고 자질구레한 행정절차 따위는 하나도 필요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전근대적인 사납금제의 폐단을 바로잡는 마지막 기회를 과연 제 발로 걷어찰지 택시 노동자들과 연대 시민들은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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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택시발전법 제11조의 2항은 택시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1주 40시간 이상이 되도록 보장해 완전월급제의 시행근거를 마련하고 있는데, 이를 서울시에 우선 적용하고 나머지 지역은 최대 5년 유예함으로써 정부가 앞장서 전면 시행을 가로막은 셈이다. 물론 해당 조항은 대통령령으로 전면 시행이 언제든지 가능함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결단하기만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택시월급제의 전국 시행이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