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초 커뮤니티에서는 1인 가구가 지켜야 할 안전 수칙들이 공유된다. 소형 파쇄기와 송장 지우개, CCTV, 호신용품 등의 상품 후기도 넘쳐난다. 10년 간 여성 1인 가구로 살아온 이나리 후보도 남들 하는 건 다 해봤다. 하지만 어떤 것도 불안을 지우진 못했다. 언제부턴가 이 모든 노력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도 있고, 높은 월세를 꼬박꼬박 받아 가는 집주인도 있는데, 왜 모든 불안과 책임을 여성 개인이 떠안아야 하는 걸까.
그래서 여성 1인 가구의 안전을 위한 조례를 제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역 단체들과 조례제정 운동본부를 만들었다. 지난해에는 6개월간 건대입구역과 군자역 앞에서 매일 아침 1인 시위도 했다. 하지만 지자체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지자체 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여성에게, 1인 가구에게, 좋은 나리 올 거예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6·1 지방선거에 출마한 이나리 정의당 광진구의원 후보자를 《워커스》가 만났다.
▲ 이나리 정의당 광진구의원 후보자 [출처: 윤지연 기자] |
“여성에게, 1인 가구에게 좋은 나리 올 거예요”
“스무 살 이후 줄곧 여성 1인 가구로 살았어요. 첫 자취방은 신발장이 현관 바깥에 있었는데, 어느 날 신발 일곱 켤레가 한 짝씩 없어진 거예요. 너무 무서워서 집주인에게 얘기했더니 ‘예쁜 신발은 집에 들여놔야지’ 하더라고요. 제가 이사를 일곱 번 했는데, 매번 누군가가 도어락을 열려고 했어요. 착각이나 실수일 수 있죠. 그런데 한 번 경험하면 그때부터 굉장히 불안해져요. 1인 가구가 많은 동네는 대부분 집들이 밀집돼 있어요. 창문을 열면 맞은편 집이 훤히 들여다보여요. 창문도 못 열고, 옷도 편안하게 입지 못해요. 혼자 사는 여성에게 집은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이 아니에요.”
여성 1인 가구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주민 민원을 접수하면서부터다. 정의당 광진구위원회는 지역 민생 문제를 상담하고 지원하는 ‘민생센터’를 운영해 왔다. 이나리 후보가 센터장을 맡아 노동 문제부터 세입자 권리문제까지 다양한 고충을 접수했다. 그때 많은 여성 1인 가구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여성 안전 사업이 통합적으로 운영되지 않아 민원 처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방범창이나 여성안심키트, CCTV 등의 안전 서비스를 이용하려 해도, 집주인의 허락을 받지 못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이 후보는 지역 시민사회와 함께 ‘여성 1인 가구 안심 조례’ 제정 운동을 시작했다. 여기에는 국가와 지자체, 임대인 등의 사회적 책임을 명시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광진구는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 비율이 48%에요. 서울에서 두 번째로 높아요. 화양동은 80%가 1인 가구고요.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야기할 곳이 없어요. 지자체의 여성 안심 사업이 여러 부서로 분산돼 있기 때문이에요. 또 지자체, 경찰서, 서울시 등 사업 주체가 여러 곳이어서 통합적으로 운영되거나 관리되지 않아요. 뿐만 아니라 지자체가 제공하는 CCTV나 방범창 같은 안심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집주인의 허락을 구해야 해요. 특히 구청이 달아주는 CCTV는 6개월에서 1년 정도 사용할 수 있는데, 통신사 같은 업체를 끼고 사업을 해요. 회사가 제공하는 단기 무료 서비스를 구청이 홍보해 주는 식이죠. 현재의 정부 사업은 호신용품 보급이나 CCTV 설치 등 일시적이고 일차원적인 방식에 머물러 있어요.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기보다, 여성의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관점이 뚜렷한 거죠.
여성 1인 가구 안심 조례’는 여성 1인 가구의 안전에 대한 국가와 지자체, 임대인의 책임을 명시하고 있어요. 통합지원서비스를 구축해 상담부터 민원 처리까지 통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거죠. 또한 여성 안전 문제는 주거 문제와 연계돼 있어, 주거 시스템의 변화가 중요해요. 가령 여성 1인 가구의 주거비용은 남성보다 높아요. 반지하나 지층은 침입의 위험이 높아 거주가 어렵고, 공용현관 도어락 같은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설치된 건물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임대료가 계속 올라요. 제가 광진구에서 15년을 살았는데, 5~6평 원룸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요.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주거의 질은 계속 떨어지죠.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은 세입자가 져야 해요. 안전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구조인 거죠.”
광진구는 1인 가구 밀집 지역인 만큼, 관련한 지역 현안들도 다양하다. 1인 가구가 많다는 건 배달 노동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나리 후보가 눈여겨본 것도 ‘배달 노동자’였다. 지역에는 배달 애플리케이션의 주 고객이면서, 배달 노동자로 사는 청년들이 많았다. 이나리 후보도 야간에 자전거로 배달 노동을 하며 노동자들의 열악한 조건과 상황을 알게 됐다. 그중에는 지자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도 있었다.
“1인 가구는 배달 주문을 이용하는 고객이면서, 스스로 배달 노동자이기도 해요. 그런 면에서 배달 노동자의 노동권과 안전은 지자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예요. 광진구에는 배달 노동자들이 쉴 공간이 없어요. 배달 중간에 시간이 뜨면 갈 수 있는 곳이 없어서, 길가 군데군데에 그냥 모여 있어요. 그러다 보니 주민들이 시끄럽고 불편하다며 민원을 넣는 경우도 있고요. 서울시가 운영하는 노동자 쉼터가 몇 군데 있는데, 대부분 대리기사에 맞춰져 있어요. 광진구는 이런 쉼터조차 없고요. 라이더유니온을 만나 가장 필요한 게 뭐냐고 물으니, 프린터나 컴퓨터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배달하며 가장 힘들었던 건 화장실이었어요. 포장 전문 가게는 화장실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어려운 곳들이 있고, 공원 화장실은 밤에 무서우니 그냥 참아야 했거든요. 지자체가 나서서 배달 노동자가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쉼터와 화장실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출처: 정의당 광진구 지역위원회] |
대학 민주화 투쟁에서 노동자·세입자 운동까지
이나리 후보는 대학 시절부터 줄곧 광진구에 살았다. 그는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대표적 ‘비리 사학’인 세종대학교 졸업생이다. 그가 입학한 2006년은 설립자의 아들인 주명건 전 이사가 113억 회계 부정으로 학교에서 퇴출당한 시기였다. 오랫동안 ‘비리 재단’ 오명을 안고 있던 학교가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정상화돼 가던 때이기도 했다. 총장 선출 과정에 구성원의 의견이 반영됐고, 민주적 이사들이 선출됐다. 기숙사와 학생회관 등 학생 복지 시설도 확충됐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퇴출당했던 비리 재단들이 속속 복귀하기 시작했다. 주명건 전 이사도 학교로 돌아왔다. 학내 구성원들은 비리 재단 복귀를 막기 위한 싸움을 벌였다. 이나리 후보 역시 세종대 학보사 편집장을 거쳐 총학생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비리 재단 퇴출 투쟁을 벌였다.
“비리 재단이 복귀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어요. 가장 먼저 총학생회 건설이 어려워졌어요. 학교는 분란을 조장해 학생 사회를 와해시켰고, 교수와 직원 사회도 와해했어요. 오랫동안 학생 복지를 책임졌던 생활협동조합도 퇴출했고요. 학생 복지를 위해 건설된 학생회관도 많은 부분이 상업시설로 전환됐어요. 학생들은 총학생회를 세우기 위한 활동을 벌였고, 어렵게 총학생회가 구성됐어요. 저는 총학생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등록금 인상과 비리재단 복귀, 생협 퇴출 반대 농성 등을 벌였어요. 그 과정에서 학교로부터 건조물 침입과 업무방해 등으로 고소도 당했고요. 학교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겠죠. 결국 학교가 졸업 관련 학칙을 바꾸면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학교를 나왔어요.”
학교 구성원과 동문, 지역 시민사회까지 세종대 민주화 투쟁에 힘을 모았다. 이 같은 연대 활동은 이 후보가 지역 시민단체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학교를 나온 후에도 세종대와의 악연은 이어졌다. 세종대 법인 대양학원이 100%의 지분을 소유한 세종호텔에서 노조파괴와 해고, 외주화 등이 끊임없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10년 새에 세종호텔 정규직 노동자의 90%가 해고됐다. 지난해 12월에도 정리해고가 단행됐다. 이나리 후보는 ‘세종호텔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광진구 지역대책위’ 위원장을 맡아 노동자 투쟁에 연대했다. 이와 함께 주명건 전 이사의 복귀 반대 활동도 벌였다.
“대학은 지역사회와 긴밀한 관계일 수밖에 없어요. 지역 주민에게 대학은 자부심의 공간이면서,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곳이니까요. 그만큼 대학은 지역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해요. 세종대는 오랜 시간 분규를 겪어왔고, 주민들은 그 불편을 감내해 왔어요. 이제라도 학교가 지역사회에 기여해야 하는데, 학교는 변하지 않아요. 오히려 세종대 법인이 노동자를 해고하고 탄압하며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고 있어요. 지역 주민들로서는 분노할 수밖에 없죠.”
이 후보는 2년 전부터 정의당 광진구 지역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지역 시민사회단체, 노동단체 등과 연대체를 구성해 다양한 투쟁 현장에 결합하고 있다. 기성 정치권이 관심을 두지 않는 지역 주민들의 투쟁에도 함께하고 있다. 대기업의 개발 정책으로 피해를 본 동서울터미널 세입자 대책위에 결합해,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기도 한다.
“동서울터미널 부지가 30년 전에는 쓰레기 매립장이었어요. 상인들의 굉장한 헌신과 노력으로 지금의 교통 허브가 만들어진 거죠. 사람들은 동서울터미널 부지가 국가 소유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대기업인 한진이 소유하고 있어요. 그런데 한진이 이곳을 재개발하겠다며 30년간 장사해 왔던 상인들을 내쫓으려 하고 있어요. 이곳 상인들은 대부분 광진구 주민이에요. 그런데 서울시와 대기업 등이 얽혀 있으니 지역 정치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질 않아요.”
진보 정치 불모지에 배제된 이들의 정치를 만든다
그는 10년간 광진구에서 공동체 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부정 감시부터 노동, 교육 등 다양한 지역 현안에 대응했다. 지역 청년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강남역 여성혐오 살해 사건 이후에는 페미니즘 모임을 만들어 지역 여성들의 목소리를 모아냈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2019년부터는 정의당 중앙당에서 청년 사업을 전담했다. 청년 정의당 창당에 힘을 보탰고, 총선에서 청년 선대본 담당자를 맡았다. 이듬해에는 정의당 광진구 지역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지난해 중앙당 활동을 중단하고 지자체 선거에 뛰어들었다. 광진구는 거대양당이 아닌 제3의 후보가 한 번도 구의원에 선출된 적 없는 불모지였다.
“국회뿐 아니라 지역구에서도 거대 양당의 독점과 경쟁이 심각해요. 지자체 선거 또한 공천권이 있는 거대 야당의 국회의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고요. 그래서 구의원들 대부분이 국회의원의 사무국장을 겸임하고 있어요. 지역 민원을 지역구 국회의원에 알려주는 역할에 그치는 거죠. 지역 현안과 관련한 정치 활동을 펼치기보다는 국회의원을 위한 정치활동을 하는 거예요. 심지어 구의원 출마 선언을 하면서 자기 지역구 국회의원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를 홍보하기도 해요. 이런 구조 속에서는 사회적 약자, 노동자, 소수자 등을 위한 지역 차원의 정책이 생산되지 않아요. 그들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기도 힘들고요.”
물론 지자체 선거에 출마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민도 들었다. 지역 주민에게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비칠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가장 컸다. 나이와 경력 등 모든 면에서 전형적인 ‘정치인’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역 단체들과 촘촘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권력을 만들어왔던 양당 정치와 어떻게 경쟁할 것인지도 고민이었다. 그러다 문득, 정치의 다양성을 이야기해왔던 자신조차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마를 결심하고 선거 운동에 뛰어들었을 때, 예상대로 삼십 대 여성 후보자에 대한 여러 편견과 마주했다. 명함을 건네면 셋 중의 둘은 그의 남성 수행원을 후보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요즘 “제가 후보예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기성 정치의 이미지를 극복하고, 새로운 진보 정치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목표가 됐다.
“기성 정치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배제된 사람들을 모아내고, 그들의 사회적 관계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거대 양당이 공고하게 장악한 지방 정치에서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노동자와 세입자, 여성, 소수자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니까요. 이번 선거를 통해 그들을 모아낼 수 있는 구심점을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그러한 진보 정치의 가능성을 지역에서부터 증명해내고 싶고요.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날, ‘호신용품’이 검색어 1위였다고 하더라고요. 정치가 나를 지켜주지 못하니,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두려움과 절박함이 나타난 거라고 생각해요. 공고한 양당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 나와 우리를 함께 책임질 수 있는 정치를 지역에서부터 만들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