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중처법?…“법적용의 문제, 판례 통한 구체화가 일반적”

중처법으로 기소된 사건 11건, 처벌조항도 의무조항도 명확했다

지난달 27일 시행 1주년을 맞이한 중대재해처벌법을 두고 ‘모호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주로 기업과 정부의 주장이다. 앞서 16명의 노동자에게 급성 간 중독을 일으킨 두성산업은 자신들을 기소한 중대재해처벌법 조항이 모호하고 불명확하다며 지난달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하고, 노동부 또한 경영책임자 처벌조항과 의무규정이 모호하다며 지난해 11월 말 기습적으로 TF를 만들어 법 적용 완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중대재해처벌법으로 기소된 11건의 사건은 경영책임자의 처벌조항도, 이들의 9가지 의무규정도 모호하지 않고 명확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에 노동계에선 “관련 판결이 하나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1년도 안 된 중대재해 통계로 실효성 논란을 지피는 것은 경영계와 로펌의 법 흔들기”라며 “중대재해처벌법의 실질적 성과를 높이기 위해 산업안전보건법의 개정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출처: 민주노총]

중대재해없는세상만들기운동본부 등은 지난 3일 오전 국회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중대재해처벌법 과연 위헌인가> 토론회를 열고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1년을 맞이한 평가와 과제를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법원의 위헌심판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기에 관련 토론회는 위헌성 여부와 법개정 방향에 대한 발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됐다.

첫번째 발제를 맡은 권오성 성신여대 교수는 “중대재해처벌법의 입법 배경과 조문 구조, 다른 법령과의 정합성 등을 꼼꼼히 살펴보면 ‘경영책임자 등’과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의 개념이 그렇게 모호한 것도 아니”라며 “학설과 판례를 통해 그 적용범위를 구체화해 나가는 것이 형법 규정의 일반적 경로”라고 밝혔다.

경영계 등은 중대재해처벌법 제4조 제1항에 규정된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 ‘재해예방에 필요한 인력 및 예산 등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및 그 이행에 관한 조치’ 등이 모호하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구성 요건에 정의 규정을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통상의 해석 방법에 의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면 명확성 원칙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지적됐다.

권 교수는 “개별 사업 또는 사업장마다 취해야 할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및 그 이행에 관한 조치의무의 구체적 내용이 상이해 발생하는 모호성은 개별 사안에서 경영책임자 등이 실제로 취한 조치가 중대재해처벌법 제4조 제1항 제1호 및 동법 시행령 제4조 각호를 위반한 것인가를 법관이 어떠한 기준과 방법으로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 즉 법률의 적용에 관한 문제이지, 각 규정 자체의 명확성 여부에 관한 문제는 아니”라며 “헌법 재판소도 법률의 적용의 문제에 관해서는 헌법재판소의 심판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박다혜 민주사회를위한번호사모임 변호사는 중대재해처벌법으로 기소된 사건 11건의 공소사실을 분석해 구체적 의무위반 사실들을 열거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위헌이라고 주장한 두성산업의 경우, 유해화학물질인 트리클로로메탄이 10% 이상 함유된 세척제를 사용해 노동자들에게 에어컨 부품 탈지 작업(세척 작업)을 하도록 했는데, 이 과정에서 16명이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돼 독성 간염의 상해를 입게 했다. 해당 기업엔 사업장의 유해·위험요인을 확인해 개선하는 업무 절차가 없었고, 국소배기장치 등의 설비를 설치하지도 않았으며, 노동자들에게 세척제 성분 및 그 유해성과 취급시 주의사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사업장의 특성과 규모 등을 고려한 안전보건관리체계도 구축되지 않은 채였다.

박 변호사는 “현재 제기된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 사건에서 명확성의 원칙 위반으로 다투고 있는 개념들은 대부분 산업안전보건법 등 기존의 안전보건법령이 동일하게 담고 있는 개념들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주장은 법을 기꺼이 무시해왔거나 위험을 방치해 왔다는 것이며, 그와 같은 기업의 이윤추구까지 우리법과 사회가 보호하고 허용하는 것인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캐나다, 호주, 영국 등 외국의 유사입법과 비교, 한국의 중대재해처벌법의 의무 위반 사항은 매우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다고 주장했다. 최 실장은 “기업살인법을 시행하는 영국의 경우에도, 경영책임자의 의무 위반 규정을 ‘사회적 상식 차원에서 반하지 않는 정도로 의무를 다해야 하는 수준’으로 규정하고 있다”라며 “경영계는 국제적으로 가 장 높은 처벌 규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중대재해처벌법과 유사한 법이 있는 외국 대비 형량이 높지도 않고, 처벌의 대상이 되는 기준도 모호하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더불어 최 실장은 중대재해처벌법의 존립여부를 법원의 판단에만 맡겨둘 수 없다고 강조했다. 중대재해처벌법 및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한국제강에 대한 선고가 당초 2월 3일에서 단순행정문제로 연기된 것을 보더라도 법원이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을 중차대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최 실장은 “위헌 논란이 중대재해법 개정 방향에도 지속 영향을 주고 있고, 6월을 목표로 발족한 노동부 중대재해처벌법 TF 방향과도 연동돼 있다”라며 “법원은 위헌심판 제청신청을 기각하고, 경영계와 로펌 또한 법 흔들기를 중단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토론회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박범계, 진성준, 박주민, 이수진(비), 이탄희, 최강욱 의원실과 정의당 국회의원 심상정, 강은미, 류효정, 배진교, 이은주, 장혜영 의원실이 함께 주최했다. 장혜영 정의당 국회의원은 “사측의 ‘위헌’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두성산업뿐만 아니라 해당 법 규정이 적용된 다른 산업재해 재판들까지 멈춰서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도 “이제 막 시행 1년을 맞은 지금은 실효성을 따지기에는 시기상조”라며 “오히려 엄정한 법집행을 위한 보완책을 마련하고, 중 대재해 감축을 위한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예방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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