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플레이션 사태는 겨울을 지나면서 급박했던 국면이 차츰 해소되고 있다. 오히려 인플레이션의 급격한 하락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중국의 봉쇄 조치가 풀리면서 수요 촉발의 전망과 함께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장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견해도 제기된다. 여하튼 이제 세계는 사태의 커다란 한고비를 넘기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위기의 양극화, 위기 대응의 파편화
이번 위기 속에서 미국 중앙은행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미국의 전격적이고 큰 폭의 금리 인상으로 인해 달러화는 급등했고, 원자재 가격을 비롯한 미국의 수입 물가를 하락시켰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전략비축유를 대량 방출하면서 폭등했던 원유 가격을 석 달 만에 안정시켰다. 이로써 가파른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수 있는 범위로 조정했다. 한편,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명목으로 각종 보호무역주의 정책까지 추진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방지법’을 앞세워 미국 중심으로 첨단 산업을 재편하고자 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통제 불가능했었던 파생금융상품과 같은 위험요인은 지금 현저히 줄어든 상태다. 아마도 2008년 금융위기와 같은 중심부 국가들의 금융위기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진행 중인 인플레이션 사태의 발단은 미국에서 시작됐지만, 그 파급효과와 연쇄효과로 인한 피해는 미국을 비롯한 중심부 국가들보다 주변부 국가들에 전이돼 집중되고 있다. 달러시스템에 종속된 나라일수록, 대외 달러 부채가 많은 나라일수록, 미국발 인플레이션 사태의 후폭풍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0여 년 동안 저·중소득국가의 대외부채 규모는 빠르게 증가했는데, 이것은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펼쳐진 대대적인 금융완화적 환경과도 맞물렸다. 이 시기 동안 저소득국가의 대외부채 원리금 상환 부담은 10년 전 대비 4배 수준으로 증가하면서 수출 금액의 약 15%를 원리금 상환에 지불하고 있다(2011년 4.7% → 현재 16.8%).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고금리, 고환율의 직격탄을 맞은 저소득국가들의 채무 위기는 심화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단기부채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라 갑작스럽게 위기가 몰려오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채권자 구성에서 민간 부문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해 40%를 넘어섰는데, 채무불이행 시 부채 조정이 쉽지 않아 위험이 빠르게 전이될 가능성이 커졌다. 80년대 초 중남미 부채위기 당시에도 글로벌 상업은행에서 조달한 대규모 차입으로 인해 부채 조정이 차질을 빚어 주변국으로 위기가 전이된 사례가 있다(당시 외채위기는 `85년 베이커 플랜과 `89년 브래디 플랜에 이르러서야 부채 조정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 간 채무관계에서 저소득국가들이 중국과 사우디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저소득국의 국가 간 대외부채 중 중국 비율은 46%로 절대적이며, 2위는 사우디(10%)다. 자료의 누락 및 미발표를 고려하면 실제 의존도는 더 높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앞으로 예상되는 부채위기 국면에서 80년대 중남미 외채위기의 결말과 달리, 미국 중심의 달러시스템으로부터 원심력이 크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미 몇몇 나라들은 달러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과의 무역에서 위안화 사용을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가령 이라크는 지난 2월부터 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위안화 무역결제를 시작했다. 그 이유는 중동의 제재 대상 국가로 달러가 유입되는 것을 감시하겠다는 미국의 송금 절차 강화 조치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달러 고갈을 더욱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달러 부족 현상이 극심해지자 소요 사태가 일어나는 등 사회갈등이 심각해졌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달러체제로부터 탈출해 위안화로 무역결제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인플레이션 방지법’, ‘chip4 동맹’ 등으로 미·중간 대립이 격화한 정세 속에서, 이번 글로벌 인플레이션 사태는 위기에 대한 공동 대응과 협력이라는 기존의 문법을 해체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G20’ 체제를 통해 위기에 공조했던 전례와 비교하면 정반대 현상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이미 지난 2020년 코로나 위기 대응부터 해체됐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트럼프 집권부터 노골화한 미국 우선주의가 바이든 정부도 가릴 것 없이 미국 대외정책의 기본자세가 됐다. 인플레이션 사태의 한고비를 넘긴 지금, 마주할 두 번째 고비는 패권국이면서 패권국을 자세를 잃어버린 미국이 자신들만 살아남으려는 패권 갈등이 아닐지 심히 우려스럽다.
혼란한 글로벌 금융정책 방향…금융긴축인가, 금융완화인가?
이런 가운데 주요 4개국(미국, 유럽, 일본, 중국) 중앙은행의 총 자산규모가 올해 1월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나머지 국가들과 정책 공조가 적은 중국은 인플레이션 위기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중국은 코로나 사태로 봉쇄정책을 취하느라 침체된 내수를 부양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금융완화 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일본이 지난 1월 대규모 금융완화 조치로 재선회하면서 총 자산규모 증가에 한몫했다. 일본 중앙은행의 자산 증가 폭은 코로나 사태 때 증가했던 규모의 절반에 육박할 정도다. 올해 초 이렇게 증가한 유동성이 글로벌 금융시장으로 유입됐는데, 이것은 일본 중앙은행의 역할 때문이다. 과연 지금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고자 하는 금융정책의 글로벌 공조 방향이 금융긴축인지 금융완화인지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 중앙은행과 반대의 기조를 보이는 일본 중앙은행의 속내를 정확히 알 순 없다. 긴축 중단으로 돌아서고 싶은 미국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대신 유동성 공급에 나선 것인지, 아니면 일본의 상황이 긴축을 지속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실물 경제의 침체를 예상하는 것인지 추측은 어렵다. 하지만 일본 중앙은행의 완화조치로 풍부한 유동성을 공급받은 금융시장은 부양 효과를 톡톡히 봤다. 금융시장이 바라던 대로 자기실현적 기대를 충족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잠시 증시를 부양하고 글로벌 금융시장을 안정시킬지는 몰라도, 인플레이션 하락 속도를 더디게 만든다면 미국 중앙은행의 금리정책은 금융시장이 바라는 대로 완화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다시 금융시장의 위축으로 드러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2월 인플레이션 하락 속도가 예상보다 더딘 통계치가 나오자 다시 전 세계 금융시장은 긴축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다.
이렇게 작은 사건에도 일희일비하는 것이 글로벌 금융시장의 현주소다. 현실에 대한 면밀한 판단보다 중앙은행이 시장의 기대를 충족할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자기실현적 기대로 충만해 있다. 아마도 올해는 이렇게 돌출하는 인플레이션 이슈처럼 기대에 못 미치는 경제통계를 두고 방향성 없는 해석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변동성 심한 금융시장의 동요가 주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 보인다. 그 이유는 실물과 금융의 괴리가 너무 커져, 무엇이 적정 수준인지 기존 데이터와 관례로 판단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도끼자루가 썩고 있다
한국에선 지난 1월 무역수지 적자 규모가 월간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고 난리다. 연간 기준 역대 최대 무역적자를 기록한 지난해 한 해 적자 규모(474억 6700만 달러)의 26.7% 수준이다. 특히 반도체 등의 수출 종목의 하락이 매우 커지자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경제교과서는 수출과 수입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수출지상주의로 수십 년을 살아온 우리다. 그리고 수출에 너무 편중된 한국경제의 위험성은 언제나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지난 십여 년간 중국으로의 수출이 크게 확대되면서 이익을 톡톡히 봤다. 하지만 이제 이 흐름에 커다란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고, 이것이 무역적자 확대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 급격히 고조된 미·중 갈등뿐만 아니라 중국과 기술격차가 좁혀지면서 중국이 우리나라로부터 중간재를 수입할 유인이 점점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수출 하락 국면은 대통령이 세일즈맨이 되겠다고 다짐한 무기 수출과 원전 수출로 수습 가능하지 않다.
▲ 지난해 7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화상회의에서 대미투자 계획 및 일자리창출 내용을 밝히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 회장의 설명을 들은 뒤 회의 말미에 ‘땡큐'를 세차례 연발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출처: 조 바이든 대통령 트위터] |
자유무역의 혜택을 오랫동안 누렸던 우리나라가 국제적 패권 경쟁과 더불어 첨단 산업에 대한 질서 재편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들고 있다. 이 소용돌이는 패권국들의 자국 우선주의의 성격을 띠면서 군사안보적 논리가 경제논리를 압도하는 형국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자국의 회사 사장이 타국의 대통령 집무실로 불려 가 투자하라고 겁박당하는 모습에 박수치는 세상을 마주하고 있다.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대통령은 지지율 정치에 갇혀 ‘노조 때려잡기’에 몰두하고, 제1야당은 방탄프레임에 갇혀서, 다들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다. 도대체 이런 비정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