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과 비리가 판치는 건설 현장, 우리가 바꾼다!”

[기획연재③] 경기중서부건설지부 조합원 인터뷰 上

정부와 자본은 건설업 부문에서 좀체 사라지지 않는 온갖 부조리와 폐단의 근원으로 건설노조를 지목했다. 대통령부터 관계부처 장관, 건설업계, 보수언론에 이르기까지 한목소리로 기득권, 조폭집단이라고 건설노조를 몰아세우며 연일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불법, 폭력을 일삼는 세력으로 낙인찍는 데 그치지 않고, 이참에 노동조합의 존립 기반을 완전히 허물 기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관련 소식에 어느덧 감정은 무뎌지고 피로감마저 느낀다는 이들까지 생겼다.

우리가 이렇게 무감각해지는 동안에도, 정부는 강경 일변도로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건설노조를 향한 저들의 비타협적 투쟁 의지는 아마도 진심일 테다. 대체 건설노조는 어떤 조직이길래 이 정부로 하여금 적개심으로 불타오르게 만든 걸까?

가공할 탄압에 직면한 건설노조 조합원들은 현재의 국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정부와 자본이 사무치게 싫어하는 건설노조는 어떤 조직인지 알고 싶었다. 이 정부의 진심을 헤아리기보다는 조합원들의 진심을 읽는 편이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데 더 유익하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지난 4월 15일, 경기중서부건설지부 사무실에서 네 명의 조합원을 만났다. 노동자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인 당사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각각 청년과 장년, 이주, 여성의 정체성으로 경험한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담기 위해 기사는 두 편으로 나뉘어 게재된다.


  지난 4월 15일, 경기중서부건설지부 사무실에 모여 인터뷰 중인 건설노조 조합원들 [출처: 건설노조 경기중서부지부 선전부장 엄재홍]

노가다에서 건설노동자로

경기중서부건설지부의 네 조합원들은 서로 다른 과정을 경유해 이곳에서 만났다. 각자의 생애 경험은 달랐지만, ‘지금, 여기’에서 함께 꿈꾸며 더 나은 내일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하나였다.

이명호 조합원은 노조 설립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산전수전 다 겪은 고참 활동가다. 건설노조 17년의 역사에서 굵직한 투쟁을 수도 없이 경험했었고 이 과정에서 갖은 탄압과 좌절, 때때로 승리를 맛보기도 했다.

이명호(이하 ‘이’) “1997년~98년도 이때는 참 엄혹했죠. 당시 IMF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난리였으니까요. 기업이 줄도산하고 거리에 실업자가 넘쳐나던 시절이었잖아요. 건설 경기도 덩달아 얼어붙었죠. 그래서 목수 일도 많이 없었어요. 이제 일당도 많이 줄어서 전에는 13만 원이었던 게 7만5천 원으로 뚝 떨어졌어요. 그나마도 일꺼리가 없는 상황이라서, 제가 아는 동료, 선배들을 알음알음 노조로 가입시켰죠. 그리고 시청으로부터 노조가 공공근로를 수주해서 이제 그 일을 하게 됐어요. 보도블럭 공사도 하고, 벌채도 했죠.”

공황기 한국 정부가 내놓은 단기 일자리 중심의 처방은 물량이 없어 실직 상태나 다름없는 건설노동자들에게 유일한 선택지였다. 아파트나 빌딩 같은 건물을 짓는 일, 길을 새로 내고 닦는 일, 다리(교량)를 놓는 일이야 원래 건설노동자들이 도맡아 하던 일이었다지만, 나무를 베는 일까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명호 조합원 [출처: 건설노조 경기중서부지부 선전부장 엄재홍]

“그러고 나서 공공근로마저 일이 끊겼어요. 그렇게 각자도생의 길을 걸을 때 건설 현장은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완전히 재편됐어요. 고용불안, 임금체불이 여러 현장에서 태반으로 일어났고요. 이걸 해결해 가면서 조합원들을 결집해 갔던 그런 시기를 거쳐 왔습니다.”

건물의 뼈대를 세우는 철근공으로 건설 현장에서 20년간 일해 온 백영식 조합원은 이주노동자다. 건설 이주노동자들의 상당수가 백 조합원처럼 중국 동포들이고, 특히 철근 작업에서는 이주노동자가 70%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백 조합원이 노동조합에 가입한 지는 채 1년이 안 되었다고 한다.

정주노동자들도 노조하기 힘든 나라가 여기 한국인데, 그는 어떻게 해서 노동조합의 문을 두드리게 된 걸까? 가입을 결정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도 궁금했다.

백영식(이하 ‘백’) “(가입하기까지) 별로 고민할 게 없었어요. 지인 권유로 들어왔어요. 노조 들어오면 돈 떼일 일도 없고 유급휴일도 준다고 해서요. 여기(경기도 건설 현장) 출근하기 전에는 서울에서 로터리 다녔어요.”

로터리?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원형교차로를 뜻하는가 싶어 재차 물었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건설 일용직 노동자들은 새벽녘 거리에 모여들어 ‘오야지’(하도급업자)로부터 하루하루 일을 배정받기를 기다리는데, 이렇게 형성된 인력시장을 로터리라고 부른단다. 로터리에 모여든 인부들은 오야지로부터 ‘간택’ 받지 못하면 그날 일은 결국 공치게 되는 셈이다. 밥벌이를 하려면 오야지에게 잘 보이는 수밖에 없다.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임금갈취나 체불이 생기는 원인도 이 갑을관계에서 비롯된다. 백 조합원 입장에서 보면 노조 가입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건설노조는 건설사와 직접 근로계약을 체결하기 때문에 팀장급인 오야지 눈치를 볼 필요도 당연히 없다.

  백영식 조합원 [출처: 건설노조 경기중서부지부 선전부장 엄재홍]

“노조가 있으니까 (더 이상) 팀장이랑 계약하지 않는 게 좋아요. 제가 받아야 할 일당에서 이제 얼마를 떼 가도 아무 말 못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순순히 따라줘야 일자리를 얻는 줄로만 알았거든요. 그래서 임금체불이나 고용불안 같은 문제를 노조가 있으니까 더 이상 겪지 않아서 무척 좋았습니다.”

고용 문제에 있어서 ‘노조 효과’는 비단 이주노동자에게만 빛을 발한 것이 아니었다. 여성에게도 건설 현장은 진입 장벽이 꽤 높았던 일터였기 때문이다. 여성 건설노동자 신연옥 조합원은 건설기능학교에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건설기능학교는 건설 현장에 취업하길 희망하는 이들에게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취업연계까지 해주는 기관이다. 전국 47곳 가운데 서울, 파주, 남양주, 안산, 경기광주 등에서는 건설노조가 기관을 직접 운영 중이다.

신연옥(이하 ‘신’)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물류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어요. 거기서 저랑 같이 일하는 동료 언니의 남편 분이 건설 현장에 계셨는데 어느 날 여성노동자가 일하는 걸 보셨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그 여성 분은 기능학교에서 기술을 익히고 현장에 들어왔대요. 이야길 전해 듣고 곧장 저랑 동료 언니도 기능학교에서 함께 일을 배우게 됐어요.”

여자가 노가다를…? 공사판 일이 워낙 힘들고 위험하다는 인식이 높다 보니 걱정이 앞설 만도 했다. 신 조합원 역시 그런 걱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여성이 대접받기 힘든 직종에서, ‘남초직장’에서 흔히 있다는 성차별과 성희롱 문제도 걱정을 더하는 요인이었다.

  신연옥 조합원 [출처: 건설노조 경기중서부지부 선전부장 엄재홍]

“처음에는 여자라고 대놓고 무시하고 차별할까봐 걱정도 많았죠. 주로 남자들이 하는 일이다 보니, 환경도 여성에게 많이 불리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죠. 제가 기능학교 과정을 안 거쳤다면 아마 그런 점들 때문에 취업을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여기서 현장에 필요한 기술을 어느 정도 습득한 게 큰 도움이 됐어요. 아무튼 제가 너무 뭘 모르는 상태에서 들어와서 그런지… 기능학교도 노동조합도 그냥 다 배우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요.”

여성은 체력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남성에 비해 떨어질 거라는 세간의 인식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중장비와 중량물이 즐비한 건설 현장은 그래서 남성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이미지가 깊숙이 박혀 있다. 건설노조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건설기능학교 설립과 운영은 이 같은 구조를 타파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남녀 구분 없이 체계적이고 평등하게 이루어지는 교육훈련과 취업연계 과정 덕분이었다. 오야지를 매개로 한 도급이나 인력사무소를 통한 날품팔이 방식이 아마 유일한 취업경로였다면, 여성노동자가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청년 노동자들에게도 불필요한 문턱을 없애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건설 현장에서 형틀 목수로 일 년 반을 일한 스물아홉 주형우 조합원도 그랬다.

주형우(이하 ‘주’) “대학 등록금도 마련해야 했는데 아르바이트로는 너무 빠듯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휴학을 하고 뭔가 일을 해야겠는데, 그래도 건설이 벌이가 괜찮더라는 얘길 들었거든요.”

건설노조 조합원 열 명 중 한 명은 주 조합원 같은 청년노동자다. 고령층 남성노동자의 숙련과 경험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설 현장에서 청년의 진출은 아직 활발하다고 보긴 어렵다. 갈수록 취업난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건설노조가 일궈 온 공존의 채용 구조는 청년층에게도 조금씩 호응을 얻고 있다.

  주형우 조합원 [출처: 건설노조 경기중서부지부 선전부장 엄재홍]

“그나마 노동조합이 있어서 적자생존이나 다름없는 일자리 경쟁이 여기서는 덜한 편이라고 느끼거든요. 예전에는 지인을 통해서건 인력사무소를 통해서건 어렵게 일자리를 구해도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건설노조 활동을 통해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고용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게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보다시피 불안정노동에 시달리던 건설노동자들의 날품팔이 인생을 바꾼 건 노동조합이었다. 건설노조는 건설사와 직접 근로계약을 맺고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건설노동자의 고용안정을 이끌어냈고, 다반사였던 임금체불도 근절시킬 수 있었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임용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