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정치적인 연구소 EPI

민주당 진보세력ㆍ미국노총 개혁세력 이론 뒷받침

주진우/민주노총 정책국장
나는 2001년 7월부터 2002년 5월까지 10개월 동안 미국 경제정책연구소(Economic Policy Institute, 이하 EPI) 방문 연구원으로 있었다. EPI는 미국 사회 내에서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진 진보적인 연구소 가운데 하나로 일정한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1986년 창립했는데, 그 시기가 시사적이다. 1980년 레이건 집권 뒤 횡행했던 이른바 신보수주의 물결 속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줄어들고, 사회복지는 후퇴해 빈부격차가 심화되었고, 노동권도 심하게 공격당했던 시기였다.

EPI는 이처럼 노동대중의 삶이 미국경제의 바닥으로 급속하게 추락하던 시기에 노동자와 저소득자의 생활의 관점에서 경제정책을 분석하고 정책적 대안을 제시할 필요성을 느낀, 제프 포, 레스터 소로우 등의 진보적 경제학자들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EPI는 노동자의 생활 조건과 이해라는 관점을 기본으로 시장의 개입과 통제를 통한 공정하고 민주적인 경제 발전을 추구한다. 미국 현실 운동 속에서 보면 민주당 내 진보파와 노동조합 내 개혁파들에게 정책 방향과 그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EPI에서 노동 문제의 비중은 연구소의 구성에서도 확인된다. 21명의 이사진 가운데 이사장을 포함해 노동조합 임원이 8명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미국노총 내 개혁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EPI의 연구 주제는 크게 5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노동자 생활 및 노동시장(임금 및 고용, 비정규노동자, 교육훈련, 노사관계) △정부와 경제(예산 정책과 세제, 규제완화와 사영화, 통화 및 거시경제정책, 사회보장정책) △세계화와 무역 △정치와 여론 △지속가능한 경제(환경정책)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노동자의 생활과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광범위한 주제들을 모두 다루고 있지만, 이를 관통하는 한가지 공통점은 바로 노동자 생활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이러한 주제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EPI는 노동조합의 연구소도 아니고 어떤 정당의 연구소는 아니지만, 그 활동은 매우 ‘정치적’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구하여 연구 성과를 실천의 주체들에게 ‘슬쩍’ 전달해주는 것이 아니라, 연구의 결과를 바로 대중에게 가져가 노동자 대중이 경제정책의 논쟁과 결정과정에서 ‘자신의 정책’을 내걸고 싸우도록 매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수단은 물론 ‘언론’이다. 연구 결과는 보도자료가 첨부된 10쪽 내외의 보고서 형태로 수시로 나온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유수한 언론에 수시로 인용되고, 연구자의 인터뷰가 실리고, 연구원들에 의한 신문 기고, 국회 청문회 증언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들의 활동은 현재 진행되는 경제정책의 논점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 노동자의 생활의 입장에서 대안을 중심으로 분석 및 제안을 한다는 점, 이러한 연구 결과를 언론을 통해 가능한 한 많은 대중에게 알리려 한다는 점 등에서 매우 실제적이고 현실 개입력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9.11테러 이후 미국에는 경기 활성화를 둘러싼 상당한 논쟁이 이루어졌는데, 부시-공화당-기업 측에서는 세금 환급과 법인세 인하를 통한 기업 지원을, 민주당-미국노총 측에서는 테러 이후 타격을 받은 항공, 관광 등의 산업에 대한 직접 자금 지원과 고용안정 사업의 지원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EPI는 후자의 입장에서 매우 활발한 정책 생산 및 논쟁 활동을 전개했다.

최저임금 관련도 마찬가지이다. 작년 9.11 테러 사건 전에 최저임금은 노동 관련 최대 이슈였고, EPI는 최저임금 인상의 필요성과 효과,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기회를 줄인다는 주장에 대한 실증적 반박 등의 내용을 담은 연구 보고서를 집중적으로 만들어냈고, 언론을 통해 광범위한 대중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유력 언론인 <워싱턴포스트>가 최저임금의 인상을 적극 지지하는 사설을 실을 정도로 최저임금 인상을 대세로 만들어냈다. 현재 미국 내에서 최저임금과 관련해서는 EPI가 가장 권위있는 연구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화에 대한 노동의 전략도 EPI 연구의 주안점 가운데 하나다.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 등 세계 28개국의 노동조합 관련 또는 진보적인 연구소들과 연대해 국제정책네트워크를 구성, 운영하여 세계화에 대응하는 노동정책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각 국의 노동시장 상황에 대한 공유, 사영화 정책의 현황과 결과 및 평가 등을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2002년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도 참여해 초국자금융자본과 그 기구인 WTO, IMF, 세계은행에 대한 대안을 중심으로 하는 전 지구적 노동의 연대를 제안하기도 했다.

탄탄한 연구소로 성장하는 데, 연구 인력과 재정의 안정성을 빼놓을 수 없다. 연구소에서 상근하는 연구자들은 한결같이 높은 수준의 연구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해당 분야에서 일정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또한 전국에 흩어져 있는 광범위한 연구자 네트워크(노동조합 활동가, 진보적 학계, 진보적 시민단체 활동가 등)를 활용해 연구의 질을 더욱 높이고 있다. 재정(수입 기준)은 2000년 기준으로 5백55만 달러(70억원 정도)로 민주노총 예산의 2배정도 된다. 이러한 예산 가운데 65%는 일반 재단에서 25%는 노동조합에서 댄다.

EPI의 연구 방향과 활동 방식을 앞으로 만들어질 한국의 노동조합이나 진보정당의 연구소의 활동에 들여오는 데에는 많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몇 가지 점은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현재의 논쟁점을 놓치지 않는 순발력 있는 연구와 끈질기고 지속적인 대응, 대중과의 호흡을 중요시하는 차원에서의 대 언론 사업의 높은 비중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념적 방향은 꼭 같지 않다 하더라도, 모든 문제를 노동자 삶의 구체적 처지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 그러한 일관된 시각이 굵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최대의 무기일 것이다.
[ 99호] 8.12 ~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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