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폐쇄된 프롤레타리아 학교"(2회)

경성 고학당의 교육활동과 성과

남신동(서울대학교 교육학과 박사과정)


1940년대 말 빈민층의 가정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부친의 만성적인 불안정 고용상태에서 가정은 늘 음울한 분위기와 가난으로 고통받는다. 그러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배움의 기회로부터 멀어진다. 배움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그 아이가 선택할 수 있었던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는 가출하여 서울에서의 고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대도시는 그의 포부를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는다. 그는 노상에서 잠을 자며 구두닦이, 신문팔이, 껌팔이 등을 하며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그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운명'처럼 예정되었을 삶의 경로대로, 결국 노동자가 된다. 그는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일단은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불결한 작업환경, 장시간 노동, 저임금, 폭언과 폭력 등 온갖 악덕으로 가득 찬 작업장에서 노동자의 육신과 인격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슬픈 현실을 목격하며, 그는 이 기이한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왜 이럴 수밖에 없는가? 대안은 없는가? 왜 가난한 자는 계속 가난하고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이 진지한 질문은 그로 하여금 근로기준법을 만나게 한다. 태어나서 사회로부터 한번도 존중을 받아 본 경험이 없던 그에겐 법적·제도적으로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감격스럽다. 그는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어려운 법조문을 하나하나 해독하며, 노동의 희망을 꿈꾼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다시 좌절감으로 '회귀'하고 만다. 기업주와 국가관료가 더 이상 노동자의 편이 아님을 간파하자 그는 작업장 내에서 노동자의 저항을 조직한다.
드라마틱해 보이는 위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노동열사 전태일의 생애를 약술한 것이다. 필자는 그의 생애사를 읽으며 그가 '노동소외', '계급모순', '착취' 등의 용어를 몰랐을 뿐, 자기 나름대로의 어법을 통해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매우 분명하게 인식하고 또한 표현하였다는 대목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스스로의 목마름에 의해 학습하며 변화·성장하는 그의 내적 동력에 눈길이 모아졌다. [전태일 평전]의 저자 조영래 선생이 진술한 대로 현실이 곧 그의 훌륭한 교사였다. - 그리고 그의 생애기록은 필자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노동현실을 깨우치는 '교사'가 되었다. - 그의 생애사를 염두하면서 다음의 질문에 대한 답을 상상해 보자. 1920년대 대도시에서 극심한 상대적 박탈감을 일상적으로 경험했던 고학생이 고학당에서 무상중등교육기회의 수혜를 받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깨우쳐주는 언어, 지식, 사상을 만났을 때 그들이 느꼈을 감격과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세계관적 인식욕구가 충만해 있는 1920년대 무산계급의 청년들에게 있어서 말이다.
1911년도에 충북 영동군 봉현리에 한 몰락한 양반 가문의 후예가 태어났다. 산세로 둘러싸인 고립된 지역은 대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화라는 사회변화와는 무관하였으며 여전히 전통적인 삶의 양식이 지배적이었다. 신지식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지닌 부친의 완고함과 극빈한 가정형편은 그에게 신식학교 기회를 차단하는 높은 벽과 같았다. 마을에는 보통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단발을 하고 신식 옷을 입은 청년들에 의해 주장되는 구습타파 및 조혼 반대 등의 선전구호가 빈번하게 들리며, 우체통, 자전거, 안경 등과 같은 생경한 신식 문물들도 부락에 등장한다. 반면, 일본 순사들에게 뺨을 맞고 저항하지 못하는 무력한 마을사람들, 그리고 도박과 술에 빠진 청장년들의 모습이 암울한 자신의 미래상이 될 것 같다. 사춘기도 지나지 않은 나이에 조혼을 하고 상투를 틀고 한문책만 보고 있는 자신의 삶은 "조롱"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존재는 작아만 진다. 모친의 삯바느질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는 장작을 패어 시장에 내다 판다. 거리에서 부딪히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마치 "천국"에 있는 것 같다. 어느 날 그는 {개벽}이라는 잡지를 접하게 된다. 그 안에는 각종의 근대적 사상과 담론, 철학, 문예작품, 광고 등이 담겨져 있는데 그것들은 그가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하거나 상상해보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들'이다. 의미가 통하지 않는 글이 많았지만, 이 신식 매체는 신선한 '문화적 충격'이 되어 그의 존재 전체를 전율시킨다. 그 전율은 그에게 "대처에 가서 배워야 한다, 성공을 해야한다"고 주문하였고, 7대 종손이라는 귀속적인 지위는 그를 더이상 현존의 상태로 묶어둘 수 없었다. 그는 서울에서 고학생활을 계획하며 가출을 단행한다. 그러나 대도시의 삶의 조건은 상투를 틀고 있는 이 고학지망생을 철저히 냉대하였다.

"무색두루마기에 통영갓 차림 그대로 밤 여덟시경 경성역에 내리니 불바다 불야성이다. (중략) 하루 50전이면 공동 숙박소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갈 수 없었다. 파출소에 가서 일할 곳을 주선해 달라고 하니 부립 직업 소개소로 가란다. 거기 갔더니 일인에게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중략) 2,3일 굶은 데다 밤바람조차 차가와서 어느 집 굴뚝 옆에 가마니 뙈기를 쓰고 쓰러져 신음하는데 날 샐 무렵 주인인 듯한 사람이 몽둥이를 가지고 와서 쿡쿡 찌르면서 어서 떠나라고 욕질이다.(이종, 회고록)

돈이 떨어지면 걸어서 고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불길 같은 '향학열'에 이끌려 상경하는 주기가 반복된다. 대도시의 유흥가에 약을 팔고 막노동도 해서 어떻게든 경성에서 자리를 잡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이 양반가문의 후예는 애초의 포부와는 달리 대도시의 주변부에 위치한 하층집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당시의 대다수 고학지망생들이 그랬듯이. 1920년대 말경 4번째 상경한 그는 그간의 '노하우'를 살려서 대도시에서의 생존법을 조금은 터득하였다. 이제는 엿방에서 생활하며 숙박문제 정도는 해결한다. 어느 날 그는 동료 엿장수로부터 동대문 밖에 있는 어떤 학교가 무상으로 중등정도의 교과를 가르쳐준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알고 보니 엿방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학교를 찾아가 보니 [苦學堂]이라는 현판이 붙은 교문에는 각목이 X자로 못질되어 있다. 소문에 따르면 광주학생운동에서 이 학교의 학생들이 깊게 관여하였기 때문에 학무국에서 강제 휴교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 해 4월에 고학당의 닫힌 교문은 다시 열리게 되었다. 간단한 입학전형을 통과한 그에게 마침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중등교육기회가 주어졌다. 입학식 날 자신과 비슷한 몰골을 한 무산청년들이 100여 명이 몰려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행사는 참으로 질서정연하고 일사분란하였다. 이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모습들은 전부 그에게 새롭고 감격적이었다. 재학생들은 망치와 펜촉이 교차하는 그림이 새겨진 교모을 머리에 착용하고 "苦"자가 새겨진 금단추의 교복을 입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동무"라고 불렀다. 한 선생님이 연단에 올라가 1923년도 5월에 개교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고학당이 겪어온 역사를 감명 깊게 들려준다.

3.1운동을 경험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송강 이준렬 선생은 그의 동창생과 함께 {조선공예학원}을 운영하며 대중들에게 공업지식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대한광복회} 회장 박상진의 아들 박응수으로부터 3만원 정도의 사업자금(사형당한 부친의 운동자금)을 기부 받았다. 예기치 않게 거액의 자금을 확보하게 된 송강은 당시 조선인 사회에서 교육계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고학생 구제문제에 착안하여 학교설립계획을 구상하였다. 그는 고학생들에게 5년제 중학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고 숙식을 제공한다는 획기적인 고학생 구체책을 입안하고, 학교 이름을 '고학생들을 위한 학교'라는 의미에서 '苦學堂'(고학당)이라고 지었다. 5년제 중등교육과정을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각 교과담당 교사도 적절히 확보되었다. 경성에 있는 다른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교사들도 영입해 왔으며, 토월회 멤버였던 연학년과 김복진 같은 동경 유학생들도 귀국 후 고학당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송강 선생의 공전 동창생들도 교사진으로 결합해 왔다. 그들은 무보수로 교수하면서 [고학당 협회]의 운영진으로서 고학당의 재정사업에도 헌신하였다.
고학당 설립이 한창 추진되고 있던 중, 학교 설립자금의 출처를 파악한 종로경찰서에 의해 설립자금 일체가 압수 당하는 불운이 닥쳤다. 이로 인해 학생모집이 이미 진행된 상황에서 학교설립계획은 진퇴양란에 빠지게 되었다. 궁여지책으로 송강 선생은 자신의 가옥을 처분하여 훈정동 2번지의 한 허름한 창고를 전세로 얻어서 교수공간을 마련하였다. 1923년 5월 1일 고학당은 마침내 개교하였으나, 외부의 재정조건이 전무한 상태에서 어떻게 5년제 무상 중등교육이 정상화될 수 있었겠는가? 고학당은 한동안 존폐위기 상황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생계비와 학교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현미빵공장과 야시장 사업을 벌렸지만, 미숙한 경영으로 적자만 보았다. 설상가상으로 개교 후 3개월 만에 교실로 사용하고 있던 건물이 팔려서 수업 도중에 강제철거가 이루어졌다. 이후 고학당은 1개월 동안 견지동 천도교당에서 잠시 머물다가 10월에는 신설동의 가축 도살장을 얻어서 교실로 개조하였다. 그곳에서 낮에는 수업이 이루어졌고, 밤에는 학생들이 잠을 잤다.
{고학당 협회}는 고학당의 재정위기를 돌파할 대책을 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활동하였고, 그 성과로 1925년도에 [서울고무공장]과 계약을 맺게 되면서 학생들의 취업이 알선되었다. 초창기의 존폐위기의 상황이 진정되자, 고학당의 교육운영은 상대적으로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교내에 도서실도 만들고, {苦聲}이라는 제목의 교지로 발행하고, 부속시설로 {광성학원}을 설립하여 인근 지역의 빈민계급을 대상으로 문해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25년에 학생수가 300명 수준으로 늘어나자 고학당은 마침내 숙원사업이었던 신교사 건축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학생들은 여름방학 동안 전국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여 모금활동을 벌였으며, [고학당의 협회]의 활동 결과 숭인동에 300평 규모의 학교부지가 마련되었다. 공사비용이 부족하여 완공이 늦어졌지만, 착공한지 1년만에 4개의 교실과 3개실의 기숙사, 이발소, 사무실, 인쇄소, 취사장을 갖춘 신교사 건물이 완성되었다. (인쇄소, 이발소, 취사장은 학생들이 직접 운영하였다.)


고학당이 명실상부한 중등학교로 성장해 가는 동안 대외적으로 계급운동과 대중적 정치투쟁이 고양되고 있었다. 기숙제를 갖춘 교수공간의 마련, 두터워진 사회적 후원, 그간의 난관을 극복해온 집단적 성취감, 그리고 집단적 협력체제에 의한 학교운영의 경험 등은 이후 고학당의 교육활동이 질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주·객관적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내적인 토대를 기반으로 고학당은 대외의 정치정세에 대해 능동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1926년 경 이준렬 교장은 국내 소장파 사회주의 세력인 서울파의 김사국, 이영과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9월에는 [고려공산동맹]에 가입하였다. 1927년 2월에는 고학당의 재학생 정관진, 이학종, 김태래가 이준렬 선생의 자택에서 "각 학교 별로 혁명투사를 양성한다"는 취지로 [조선학생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조선학생혁명당]은 1929년 3월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개편되었다. 전위동맹은 결성직후 경성에 위치한 사립중등학교를 중심으로 독서회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와중에 1929년 11월에 발발한 광주학생시위가 발생하자, 전위동맹은 경성지역에서 분출한 학생시위의 핵심적인 지도세력으로 기능하였다.



[조선학생혁명당]을 배후에 둔 고학당은 1928년을 기점으로 하여 "무산운동의 엄정확립"의 방향으로 자신의 위상을 쇄신하였다. "모든 것은 학생자치의 힘"라는 구호 아래 "교양과 운동, 서무, 재무의 각 부서"의 제반업무는 학생들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또한 학생들의 사회주의적 정치교양교육을 위해 '자치적교양방법'이 도입·실시되었다. 자치적교양방법은, 그 명칭대로, 전적으로 학생들에 의해 전담되었으며, ① 사회과학학습, ② 시사토론 혹은 정세토론 ③ 좌담회(학급운영회의)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1930년도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자치적교양방법 및 학우회 활동은 중단되었지만, 사회과학학습은 1931년 7월 고학당이 해산되기까지 지속되었다. 고학당 말기에 입학한 이종 선생에 따르면 당시 사회과학 학습은 기숙사에서 진행되었는데, 기숙사 방별로 대략 7∼8명이 1개 팀으로 조직되어 주 1회 정도 토론회가 이루어졌다. 저학년 학생들은 주로 {資本主義の 機巧 자본주의의 기교}, {社會主義 大要 사회주의 대요} 등과 같은 사회주의 입문 서적류를 읽고 토론했다. 이 서적을 통해 고학생들이 읽고 토론했을 새로운 이상사회에 대한 설명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적 생산에 따른 사회적 소유이다. 빈자가 없는 사회, 반목이 없는 사회, 투쟁이 없는 사회,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가 없는 사회, 압박하는 자와 압박당하는 자가 없는 사회,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는 진정한 공동생활의 사회, 그것이 우리의 이상이다." (堺利彦, {改正 社會主義 大要}, 東京 : 無産社, 1928, p.30.에서 인용)

대도시의 하층집단으로서 겪었던 극빈한 생활경험, 그리고 객관적 기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상대적 박탈감을 일상적으로 경험한 고학생들에게 빈부격차문제, 불평등 문제, 인간소외 문제 등 계급사회의 모순을 설명하고 그의 대안적 사회구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내면적으로 '공명'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새 환경과 학습에서 나는 막연하던 희망과 앞길에 주관이 서고 의식화되어 갔다. 지금까지 허위와 불신, 증오와 공포의 콤플렉스 속에 살아왔고, 인간관계가 그런 것으로 여겨왔는데 진실과 신뢰, 애정과 화합의 세계를 체험한 것이다. 미로의 협곡에서 트인 지평을 본 셈이다. 세속에서 추구하는 부귀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진 고난을 겪으며 소외된 청년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사도와 각지방에서 올라온 팔면 부지의 얼굴들이 한뜻 같은 길에 어울리는 동지애의 삶의 보람을 느끼었으며, 듣고 본 사회주의 세계관이 이상을 갈구하는 젊은 피에 신화로 스며들었다"(이종 회고록. 강조는 필자)

인용문에서 위 개인이 " 듣고 본 사회주의"라고 표현한 대목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9년도에 설립된 [조선학생전위동맹]의 행동강령은 단순히 선언적인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다. - 강령 및 행동강령은 당시 춘경원당 공청계에서 책임 간부로 활약하고 있었던 고학당의 정관진(청년운동부)이나 김태래(학생부)에 의해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각 항의 내용들은 고학당에서 적극적으로 구현돼온 것들이다. 고학당은 공교육 이념을 구현하여 무상으로 교육기회를 보급하였으며, 남녀공학제를 운영하여 교육기회 배분에 있어서 여성차별을 극복하였다. 또한 1920년대 중반 이후 "모든 것은 학생군의 힘으로"라는 표어 아래 학생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는 등 교내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구현하였으며, '자치적교양방법'을 통하여 학생들의 자유로운 정치사상학습을 보장해 주었다. 즉, 설립이래 누적돼온 고학당의 집단적 경험, 민주적인 인간관계, 학교문화가 전위동맹의 이념적 '모태'가 된 것이다. 요컨대, 위 개인이 고학당을 매개로 획득하게 된 사회주의는 고학당이라는 '생태학적'인 환경에서 체험했던 내용 일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저번 호에서 인용되었듯이, 그에게 사회주의는 "고학당 정신"과 동일시된다.

<조선학생전위동맹 강령 및 행동강령>

출전: 鐘路警察署, "三一運動記念日ニ際シ不穩計劃ニ關スル件", 京鐘警高秘 第2601號, 京城地方法 院檢事局, {思想ニ關スル情報綴和} 第三冊, 昭化5年(1930) (필자 번역 / *는 필자 강조)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고학당에서 시작된 비밀결사운동이 일경에게 완전히 파악되면서 대다수의 핵심간부들이 검거되었다. 고학당의 [학우회] 활동은 전면적으로 폐지되었다. 일제는 고학당의 교육활동을 치밀하게 감시하였고 불시에 기숙사를 덮쳐 '불온서적'를 압수하거나 독서회 관련 학생들을 연행하기도 하였다. 메이데이 전날에는 "위험 인물"의 '예방구금'도 이루어졌다. 총독부 학무국은 사립학교규칙을 근거로 1931년 4월 고학당에게 폐쇄조치를 통보했다. 자진해산하지 않은 경우 헌병대가 출두할 기세였다. 더 이상의 존립이 불가능해지자, 1931년 7월 11일 교사와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집회를 열고 현 상황을 성토하며 비장한 분위기에서 고학당의 깃발을 내렸다. 고학당은 폐쇄되었지만, 고학당의 경험은 개인들의 삶에서 지속되었다. - 해방 후 남로당 2인자로 알려진 김상룡이 고학당의 출신이며, 1920년대 사회주의 학생운동조직의 핵심 간부로서 활약하였던 정관진, 이학종, 김태래, 이능종, 유축운, 김종원, 이원봉, 최진석, 허미순, 정윤필, 조성택 등이 고학당의 재학생들이었으며, 이들과 더불어 강덕선, 허균, 홍종언, 정후균, 김한동, 김두진, 이종 등 고학당 출신의 다수가 해산 이후에도 한국 사회주의·공산주의 조직운동에서 유명·무명으로 활약하였다.

"거기 들어가서 물론 일반적인 그런 배움도 있었지만, 주로 그때 선생들의 말이라던가 또는 상급생들의 행동하는 그런 그 모든 것에서 많이 체험을 했습니다. 체험을 하고서 그때 비로써 막연하나마 그 일생을, 이렇게까지 이런 사상적인 기초, 조금도 허물어뜨린 적이 없습니다.."(이종 구술, 1996.8.20.)

고학당은 해방 후 사회주의 교육이 소련으로부터 이식되기 이전부터 한국 사회 내부의 역동 속에서 자생적으로 출현한 최초의 사회주의 교육기관이다. 고학당에서 이루어진 사회주의 교육은 외부의 정치조직의 영향력에 의한 것이나, 외국의 특정 교육이론이나 모델을 모방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부에서 축적돼온 경험에 기반한 고유한 특질을 갖춘 교육이었다. 마지막으로 고학당이라는 "유일한 무산자 학교"는 1920년대 계급운동과 민중교육운동의 특정한 결합물이며, 예외적인 한 사례는 아니다. -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와 유사하거나 다른 형태로 전개된 사회주의적 교육실천들은 적잖게 존재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주동인물이었던 김사국은 대회가 끝나자마자 1923년도 3월 간도지방에서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사회주의 운동의 간부양성을 위한 교육과정을 개설하였다. 간도 용정지방의 {동흥중학}의 경우 1922년경 주청송, 박윤서 등이 관여하면서 1925년에 이르러 사회주의적 교원과 학생들에 의해 학교운영의 헤게모니가 장악되었다. (김책, 김홍선, 나동옥, 문태화, 박기주 등 다수의 조직운동의 간부들이 바로 동흥중학의 출신들로 확인된다) 또한 정평 적색노동조합의 경우 조합 산하에 100 여 개의 노동야학기관을 운영하며 맑스레닌주의를 교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현재 기초적인 수준의 사실조차 파악되지 않았지만, 1920년대 사회주의 사조의 등장이라는 사회변화에 따라 위상, 교육내용과 형식상의 특질, 그리고 기능 면에서 새로운 교육으로서 사회주의적 교육이 역사공간에 등장하였을 가능성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식민지기 사회주의적 교육실천 혹은 노동교육의 역사는 우리들의 집단기억에서 "폐쇄"되어 있는 지점이다. 그 역사를 온전하게 복원할 때 현재의 진보적 교육운동의 자리 매김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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