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고무장갑을 끼며


[Copyleft by 교육희망] 조국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OECD 가입국인 우리 나라의 남녀평등의 수준은 여전히 ‘저개발’ 상태이다. 정치인, 장관 및 고위공직자, 국회의원 중 여성의 수는 미미하고, 사기업 내에서의 여성회사원의 임원 승진에는 ‘유리 천장’이 가로막고 있다.

나의 일자리인 법과대학 상황을 보면, 현재 여성 법학교수의 수는 매우 적다. 남성 교수 사이에 암묵적으로 여성 지원자를 배제하는 경향 탓이다. 남자가 직장을 먼저 가져야 한다, 여성교수는 가정일 때문에 학과운영에 충실하지 못하다 등등의 남성 중심적 이유가 은근한 이유가 된다.

한편 화폐 속의 인물도 완전 남성이고, 동상으로 기념되는 사람도 대부분 남성이다. 게다가 낙태를 통해 죽어 가는 태아의 다수는 여성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관비(官婢)에게 산기가 보이면 한달 휴가. 출산 후엔 산모에게 50일, 그 남편에게 15일 휴가를 주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21세기를 사는 한국 여성이 봉건시대의 관비 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상황을 생각하면 나의 초등학생 딸이 이 사회에서 자기의 뜻을 펼치면서도 평등한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을지 심히 걱정이 된다. 다만, 지구 건너편에서 여성의 성욕을 억제하기 위한 유아기의 음핵 절제 수술이 우리 사회에서 저질러지지 않고 있음에 대해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이다.

남녀평등의 문제는 단지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남녀평등이 상당히 이루어졌다는 서구 여러 나라의 경우도 조금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엄존한다.

사실 서구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참정권을 획득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이다. 미국의 경우 1920년, 영국의 경우는 1928년, 프랑스의 경우 1944년이었으며, 스위스의 경우는 1944년에 이르러서야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이 여성에서 주어지지 않았던가! 우리 나라 경제가 ‘압축성장’하였듯이 우리 여성인권도 ‘압축성장’ 해왔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기는 하지만 법과 제도의 차원에서는 남녀평등이 상당 수준 확보되었다고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문화와 관행 차원으로 눈을 돌려보면 남성중심주의의 메커니즘은 강고하게 존재하고 있다.

다른 거창한 얘기보다 가정내 평등에 대하여 말해보자. 사적인 얘기를 하자면, 아내의 공부를 강권한 덕에 수 년째 방학 동안에는 가사와 육아 등 집안 일을 혼자서 떠맡아야 한다. 고교졸업 때까지 부엌출입을 엄금하는 분위기에서 살아 온 ‘경상도 남성’인 내가 일으킨 ‘자초위난’(自初危難)이지만, 가사 일을 전담할 때 때 맨 처음 들었던 생각은 “내가 이 시간을 더 가치 있는(?) 일에 쓸 수 있지 않을까”였다. 또한 나의 아내가 ‘전업주부’이었다면 내가 연구와 사회활동을 더 많이, 또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몽상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집안 일을 아내에게 전담시키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지 않으니, 나는 여전히 “무늬만 페미니스트”인 것이 틀림없다. 아무리 숭고한 목표도 그것을 실현하는 세세한 과정에서 힘이 들면 말과 몸이 따로 가게 되는 법.

이론적으로 여성해방과 남녀평등을 논하는데는 능숙하였으나, 생활에서 이를 실천하는 일은 어려우니 나는 “얼치기 책상물림” 부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이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오늘 저녁도 나는 빨간 고무장갑을 끼면서,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은 제도적, 거시적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미시적 차원에서, 생활 속에서, 그리고 어떤 '큰 목표' 이후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 자기가 서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고민되고 실천되어야 할 사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바로 그러할 때만 역사는 단지 ‘His+Story’로 축소·왜곡되지 않을 것이다.

조국(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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