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과 김정일위원장 답방의 방정식]대안없고 무조건 비난만

한나라당 대북정책 비판│이회창 무능과 초조감 자인하는 꼴

이제훈/<한겨레> 남북관계부 기자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와 한나라당엔 대북정책이라고 할만한 게 없다. 남북관계가 지지부진하면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실패했다”고 비판하고, 남북관계가 속도를 내면 “북풍공작”이라고 몰아부친다.

얼마 전 6.29서해교전 때처럼 남북간 군사적 긴장이 높아져 정부가 위기관리를 위해 남북대화를 모색하면 “끌려다닌다”고 비난한다.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에 쌀이나 비료를 지원하려고 하면 “대북 퍼주기”라고 조진다. 대안은 없고 비난만 있다.


한나라당 눈엔 모든게 음모


이 후보와 한나라당의 이런 태도에도 나름의 일관성은 있다. 김대중 정부가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됐고, 김대중 정부에 유리하면 모두 “음모”이며 “나쁜 것”이라는 주장이다. 남북관계 그 자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최근 한나라당이 남북관계와 관련해 자주 입에 올리는 단어는 단연 “신북풍”이다. 7월 말 이후 남북 당국이 7차 장관급회담, 경제협력추진위원회 2차 회의, 금강산관광 활성화를 위한 당국간 2차 회담, 4차 적십자회담, 철도·도로 연결 실무협의회 1차 회의 등 각급 대화에서 굵직한 합의를 쏟아내고, 대규모 북쪽 대표단의 서울 8.15행사와 부산아시아경기대회 참가 등 민간급 교류까지 봇물 터진 듯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그들 나름의 방어 전술이다.

최근의 남북관계 진전은 “DJ정권의 연장을 위한 김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합작음모”라는 절규가 이 전술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는 이 후보와 한나라당의 무능과 초조를 자인하는 것이다.

최근의 한반도 정세 변화는 전략적 지형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중대하다. 북한은 ‘경제관리개선 조처’라는 이름의 북한식 경제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체제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정책변화여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북한 권력층은 이 개혁의 성패에 운명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 당국은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과 개성공단 건설 일정표를 만들어냈는데, 이 합의가 현실로 나타난다면 남북관계는 한 단계 높아진 공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일본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방북을 지렛대 삼아 북-일관계의 전략적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 푸틴의 러시아는 정권의 명운이 걸렸다고 판단하고 있는 시베리아 대개발 사업의 성공에 필수적인 시베리아횡단철도와 한반도종단철도의 연결 사업에 맹목적일 정도로 적극적이다. “악의 축”과 “테러와의 전쟁”을 연발하고 있는 부시의 미국을 제외한다면, 한반도엔 공존과 협력이 기운이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후보와 한나라당의 딜레마는 불가피하다. 정세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적극적으로 호응하자니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동조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린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전처럼 비난만 퍼붓고 있자니, 최근의 한반도 정세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많은 국민들한테 ‘냉전 수구 세력’으로 비쳐질 위험이 있다.


반DJ정서 이용한 선거용 자충수


아마도 이 후보와 한나라당은 ‘이원전략’으로 이 난국에 대응하기로 한 것 같다. 당은 지금까지처럼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마구잡이로 비난하고, 이 후보는 나름의 대북정책을 제시하며 강성 이미지를 눅이고 ‘미래지향적 수권능력’을 과시하겠다는 전략이다.

대부분 실현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는 “김정일 위원장의 연내 답방”설을 한나라당이 최근들어 부쩍 자주 들먹이는 것은, 실제로 답방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 듯 하다. 그보다는 현재의 대화 진전을 “DJ 정권의 신북풍 음모”로 몰아감으로써 평균 30% 수준인 이 후보에 대한 지지의 원천인 이른바 ‘반DJ 정서’에 의지하는 한편, 이를 자극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2월 대통령 선거만을 염두에 둔 정략의 소산이다. 그러나 미국을 제외한 중국, 러시아, 일본 등 한반도 주변국 정부와 남북한이 대화를 모색하는 것을 “음모”로 몰아가는 것은 이 후보와 한나라당의 외로운 처지를 부각시키는 자충수에 불과하다.

이 후보는 8월 21일 ‘희망포럼’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대북 3원칙과 5대 과제’가 담긴 ‘평화정책’이라는 이름의 전보다 다듬어진 대북정책을 내놓았는데, 이 또한 문제가 많다. 이 후보의 새로운 대북정책은 한마디로 군사문제의 우선 해결을 전제로 한 ‘빅딜전략’이다.

이는 경제·사회·문화 분야 교류·협력을 토대로 남북간 신뢰를 쌓아나가며 군사적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을 모색한다는 노태우 정부 이래 역대 남한 정부 대북정책의 기본 노선에 반하는 것이다.

또 “북한이∼한다면, 남한은∼을 하겠다”는 식의 접근법은 수동적일뿐만 아니라 현실성이 없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이 후보의 ‘군사 우선 접근법’은 대화보다는 갈등의 증폭으로 나아갈 소지가 크다는 점에서 수정이 필요하다.

오죽하면 탕자쉬안 중국 외교부장이 8월 2일 이 후보를 찾아가 “대선 뒤에도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유지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을까.
이 후보와 한나라당의 이런 대북 태도는 무엇보다 12월 대선에서 표를 더 얻기 위한 것인데, 결과가 뜻과 같을지는 알 수 없다.

문제는 만약 이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지난 5년간 거침없이 내뱉었던 수많은 말들은 부메랑이 되어 ‘이회창 대통령’을 괴롭힐 것이라는 점이다. 슬프고 불행한 일이다.
[ 104호] 9.16 ~ 9.22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클리핑기사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