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자와 남은 자들17]"내 자식만 훌륭하다고 생각진 않아"

장현구 열사 아버지 장남수

문선영 ahimsa@kdlpnews.org
“내 자식만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민주화를 위해 수없이 사라져간 정의로운 청년 가운데 한 사람이 내 아들이지.”

장현구 열사의 아버지 장남수씨(62·사진)씨는 아들의 죽음을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여느 어머님이나 유족들처럼 눈물로 하소연하거나, 그리워 사무치는 마음에 통한하지 않는다. “그저 내 아들도 시대의 부름에 대답했을 뿐, 현구의 죽음은 한 사람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나직하게 말할 뿐이다. 민주화를 위해 명멸해간 많은 열사들의 넋을 기리는 일이 ‘내 아들’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현구(당시 26세)는 13대 대통령 선거의 정치적 혼란과 경원대학교 재단이 바뀌면서 기업화된 학원 운영에 맞서 92년 학원자주화 추진위원장을 맡고 대통령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을 했다.

하지만 학교 당국의 터무니없는 고발로 인해 구속 영장도 없이 잠복중이던 성남 경찰서 소속 전담반 형사들과 경찰들에게 폭력적인 방법으로 연행당했다. 구속 수감된 그는 3개월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혹독한 고문수사를 받은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정신과 입원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후유증을 견디지 못한 그는 3차례에 걸친 자살 기도 끝에 95년 12월 4일 서울 송파동 송파 사거리에서 분신, 현재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치돼 있다. 장남수씨에게 ‘운동’은 4.19의 기억으로각인돼 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4.19를 맞았어. 군사독재 정치에 항거한다며 학생들이 경복궁을 돌아 청와대 인근까지 진입했지. 경찰들이 바리게이트를 치며 우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어. 난 그저 겁주려나 보다, 설마 총을 쏘진 않겠지 생각했어. 근데 순간 총알이 난사하면서 옆에 있던 여학생의 가슴에서 튀어 흘렀어. 한 명 두 명씩 쓰러져 가는데 하수구에 핏물이 흘렀어. 그 때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 개죽음 당하면 안 된다고 결심했어.”

이후로 장남수씨는 민주화 운동을 지지는 했지만, 감히 앞으로 나서서 외칠 수는 없었다. 아들도 학업에 열중하다가 졸업해서 평범하게 살기를 마음속으로 바랬다. 한 사회를 변혁시키는데는 희생자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게 내 아들이 아니길 바랬다.

그래서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고 운동을 한다며 쫓아다닐 때에도 말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동료들이 같이 시위하는데, 혼자 도망 올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면서부터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한다.

아들이 죽자, 장남수씨는 어느새 열사의 아버지가 돼 있었다. 1백34일간의 장례투쟁을 벌이고, 98년에는 가업으로 하던 화훼 꽃단지도 접고 4백22일 동안의 국회 앞 천막농성을 벌여 특별법 제정에 힘을 쏟았다. 지난해 12월에는 장현구를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죽음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유가협 수도권 지회장을 3년째 맞고 있는 장남수씨는 최근 ‘민주공원설립추진위원회’ 기획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주화 운동가들의 민주공원과 묘역 유치를 추진해 수유리에 2005년까지 공원을 완공한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열사의 죽음은 부모의 몫만은 아니야. 근데 요즘은 나이 많은 유가협 부모들만 뛰어다니고 있어. 젊은이들도 함께 해야 하는데…” 젊은이들이 부쩍 줄어든 ‘현장’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말이다.
[ 104호] 9.16 ~ 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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