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독자에게] “인터넷 정치의 폐해”와 정치개혁의 ‘역적들’
최근 문제가 된 이른바 민주당의 ‘살생부’ 파문과 관련해서 “인터넷 정치의 폐해”가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역적’ 또는 ‘역적 중의 역적’으로 살생부에 거론된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언론이나 한나라당까지 “인터넷 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했다”, “인터넷의 장점에만 함몰되지 말고 부작용을 극복하는 것도 고민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 논평을 연일 내보낸 바 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인터넷은 “쌍방향 의사소통”과 “참여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대안적 미디어지만, 역기능을 초래할 가능성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선 기술 예속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경제력, 학력 등의 차이에 의한 불균등한 정보 접근(access)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에 “정보와 권력의 독점”이라는 폐해로 이어질 여지 또한 많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대신에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와 같은 우울한 디스토피아가 현실화될 수도 있는 역설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인터넷 중독증’이나 이른바 “정서적 인간의 죽음” 따위가 인터넷을 둘러싼 대표적 역기능의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살생부’ 파문으로 도마에 올라있는 이른바 ‘익명성’에 의한 역기능입니다.
정보에 대한 폭넓은 접근과 무한한 가능성으로 인해 사랑받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사랑의 근간이 바로 ‘익명성’이라는 점에서, 인터넷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익명성’이 사라진 인터넷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익명성은 인터넷에 대한 무한한 접근 가능성을 열어주는 기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열린 시민사회와 성숙한 시민의식”이 없을 경우 익명성은 자칫 무서운 전근대적 형(刑)틀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살생부’ 파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살생부’ 파문은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듯 합니다. 어느 누가 시작한 것이든 ‘살생부’가 인터넷을 통해 맨 처음 유포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살생부’가 등장한 동기는 인터넷을 탄생시킨 사회문화적 변화와는 무관한 “전근대적인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살생부’ 파문을 ‘인터넷’의 역기능으로만 비난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이른바 ‘살생부’ 파문을 증폭시킨 미디어가 ‘인터넷’이 아니라 조선, 동아일보를 비롯한 보수 언론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전근대적 정치구조와 공존, 공생하고 있는 이들 보수 언론들은 ‘살생부’ 파문을, 새로운 대안 미디어로 떠오른 ‘인터넷’에 대한 혐오를 ‘정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계기로 삼았을 법 합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저는 ‘살생부’ 파문을 ‘인터넷 정치의 폐해’로만 몰아가는 일부 언론과 정치권의 시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살생부’를 유포한 것도 전근대적인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를 증폭시킨 것도 전근대적 정치구조와 결탁한 ‘전근대적 언론’이었기 때문에 ‘인터넷’과는 큰 관계가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인터넷 정치의 폐해”를 주장하는 언론인, 정치인들은 ‘인터넷’을 먼저 탓할 게 아니라 썩어빠진 ‘전근대적 정치’의 폐해부터 거론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정치가 국민들의 불신을 받는 “음모와 모략과 배반”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과연 ‘인터넷 살생부’가 가당하기나 한 것이었을까요? 자신을 돌아보기에 앞서 “인터넷 정치의 폐해”를 먼저 주장하는 언론인이나 정치인들은 이런 질문을 먼저 던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익명의 ‘살생부’가 아니라 국민 모두의 이름으로 된 ‘살생부’에 ‘역적’으로 분류돼 오르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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