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일장기 :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후기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를 만나다

‘시네마떼끄 문화학교 서울’이 주최한 ‘금기와 저항 :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이 지난 1월 18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오시마 나기사는 군국주의의 열풍 한복판에서 국가이데올로기에 대항하면서 일본이 틀렸다고 말한 첫 번째 일본 감독이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쇼치쿠 누벨바그의 도화선이 된 <청춘 잔혹 이야기>, 60년대 전공투 세대에 대한 성찰이 담긴 <일본의 밤과 안개> <도쿄전쟁전후비화>, 오시마의 혁명적 걸작으로 칭송되는 <교사형> <의식>, 그리고 성과 범죄에 대한 센세이셔널한 작품 <감각의 제국> <열정의 제국> 등 오시마의 대표작 12편이 상영되었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진술과 다양하고 실험적인 영화 감각을 자랑한다. 잭 씨 엘리스가 『세계영화사』에서 기술한 것처럼 오시마 나기사는 ‘일본의 장 뤽 고다르’라고 얘기할 수 있을 만큼 현대적인 감독이다. 평생 국가와 사회가 인간에게 부여한 금기와 싸웠으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곧 범죄적 행위”라고 인식할 만큼 전복적 에너지로 충만했던 오시마 나기사 감독. 이번 회고전은 오시마의 영화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기회이자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그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오시마 나기사 기획기사를 준비하기 전에는 오시마의 영화를 단 한편도 보지 못했다. 국내에서 개봉했던 <감각의 제국> <열정의 제국>은 그다지 보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색보정 상태로 개봉했기에 제대로 된 영상미를 확인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적나라한 성의 묘사와 극단적인 에로티시즘의 향연이 그 당시로서는 그리 매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뒤늦게 보게 된 <감각의 제국>은 파괴적인 에로티시즘에 대한 도발이라고만 말하기엔 가슴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일본이 대동아제국의 야망을 불태우던 그 시절, 유곽에 틀어박힌 채 육체에 탐욕했던 한 사나이가 쓸쓸히 걸어간다. 길 반대편에는 일장기를 손에 든 인파들이 몰려있다. 그 한가운데로 총을 받든 일본군인들이 행진한다. 오시마는 이 한 장면 안에 군국주의 열망에 대한 통렬한 비웃음을 담아낸다.

이번 회고전에서 첫 번째로 본 작품은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였다. 로렌스 반 델 포스트의 소설『The Seed And the Sower』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일본군 포로 수용소를 무대로 하고 있다. <전장…>는 데이비드 보위, 기타노 다케시, 사카모토 류이치 등의 호화 캐스팅과 동성애를 전면에 부각시킨 소재로 커다란 반향을 낳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관심을 끄는 부분은 따로 있다. <감각의 제국> 이후 국제적 감독으로 부상한 오시마는 이 영화에서 서구인이 바라본 일본인의 모습을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그대로 그려낸다. 그 때문에 이 작품은 일본에서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지만, 누구보다도 일본에 대한 통렬한 자의식을 보여주었던 오시마가 그저 국제주의 바람에 휩쓸려 서구의 시각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바짝 마를수록 점점 매워지는 고추 혹은 죽어서 새 잎을 틔우는 보리


이번 회고전에서 본 영화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영화는 24분짜리 사진영화 <윤복이의 일기>와 오시마의 영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 손꼽히는 <소년>이었다. 10살 된 신문팔이 소년 이윤복의 일기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윤복이의 일기>는 1964년 한국을 방문한 오시마가 직접 촬영한 스틸 컷들로 구성된 중편 사진영화로, 다양한 영상과 음향의 몽타주 기법이 두드러진 독창적인 작품이다. 오시마는 보이스 오프를 통해 ‘윤복이의 일기’를 들려주는 한편, 세상 모든 곳의 윤복이들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코멘트를 병치시킨다. “이윤복, 너는 10살짜리 소년”이라는 내레이션은 처음에는 윤복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것처럼 들리지만, 육성의 강도가 높아지고 확대되면서 세상 모든 곳의 윤복이에게로 향한다. 그 가운데 뼈에 사무치는 슬픔을 전해주는 내레이션. “고추는 바짝 말라 점점 더 매워지고, 보리는 죽어 새 잎을 틔운다.”이 영화는 해방 전후 피폐한 한국의 거리를 비추고 있지만, 바짝 마를수록 점점 매워지는 고추처럼 혹은 죽어서 새 잎을 틔우는 보리처럼 신난 속에서 더욱 더 삶에의 의지를 불태우는 거리의 소년들을 통해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문화학교 서울 프로그래머인 김성욱씨는 오시마 나기사가 한국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한국 자체에 대한 애정에서 기인했다기보다 일본인으로서 전쟁 유발국 일본에 대한 자기반성을 하는 과정에서 얻은 타자의 개념이었다. 오시마 나기사에게 있어서 ‘일본인으로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재일 한국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그 준거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오시마는 “재일 한국인은 일본인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라고 얘기하면서 “재일 한국인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일그러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소년>은 아이를 자동차에 일부러 부딪치게 하고 치료비를 갈취하는 방법으로 각지를 여행하면서 자해공갈 사기극을 벌인 한 부부의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다. 소년은 자신의 행위가 범죄라는 것을 자각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는 자신이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시코쿠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열도를 종단하면서 촬영된 <소년>은 각 지방의 시적인 풍물을 통해서 가족을 위해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소년의 비애를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 손꼽히는 <소년>은 탄탄한 시나리오와 주연배우들의 탁월한 연기, 특히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려야 했던 비극적 소년 역을 연기한 아베 테츠오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소년>은 가난 때문에 세상살이의 고통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소년의 시점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윤복이의 일기>와 비슷한 면이 있다. 하지만 <소년>에서 오시마는 일말의 동정이나 이해심 같은 것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아주 건조하고 차갑게, 마치 르포르타쥬를 보듯 극영화를 구성한다. <소년>의 인상적인 오프닝 크레딧에는 붉은 일장기가 아니라 ‘검은 일장기’가 등장한다. ‘검은 일장기’에 포위된 소년의 이미지는 평생 국가와 사회가 부여한 금기와 싸웠던 오시마 나기사의 초상처럼 비친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소년은 자신을 안드로메다 성계에서 온 우주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지금 이곳에는 없는 정의를 갈망한다. 오시마 나기사 또한 안드로메다 성계에서 온 우주인처럼 틀린 일본에 맞서며 전투적인 영화인생을 살아갔던 것이 아닐까.


이주영 / e Movie 기자 youki73@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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