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격전의 역사와 세계의 질서재편](2)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네 차례의 중동전쟁


예닌 지역에 상주하고 있는 탱크.2002.3 [사진/znet(http://ww.zmag.org)]



'젖과 꿀의 땅 가나안'을 위하여

B.C.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 하에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비슷한 시기에, 해양민족인 필리스틴 사람들이 같은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 해양 민족 필리스틴이 현 팔레스타인이며, 가나안 지역은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이후 B.C. 1020년 경, 이스라엘 민족은 필리스틴을 비롯한 가나안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다윗 왕 영도 하에 통일 왕국을 이루었으나 B.C. 63년경 분열에 의해 로마에게 점령당하고 결국 B.C. 135년에는 로마에 의해 모두 추방되었다. 그 후로 이 지역은 십자군 원정 시기를 제외하고는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아랍 민족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반 유태인 운동이 전개되자 유태인들은 '트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유태 민족주의 운동인 '시오니즘 운동'을 천명하고 확산시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897년 8월, 스위스 바젤에서 제 1차 시온주의자 회의를 개최하고 자신들의 조국을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설한다는 '바젤계획'을 체택하는데 이 계획은 '유태인 농업, 공업 노동자에 의한 팔레스타인 식민화 촉진', '각 국의 법률에 따라 적절한 지역적 또는 국제적 기관에 의해 유태인 전체의 조직화와 결속 도모' 등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동 지역 국가들의 분란과 대립은 1,2 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1,2 차 세계 대전을 경유하며 중동 각 지역은 강대국에 의해 산산조각 났으며, 전후 각국 독립의 과정에서 다시 강대국들 마음대로 새롭게 분할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영국이 행한 이율배반적인 정책이 결국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중동 지역 격전의 역사와 이를 둘러싼 강대국들 간 패권 다툼의 끔찍한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영국의 이율배반과 전쟁의 역사

1914년 제 1 차 세계대전 당시 중동 영토는 강대국들에 의한 분할의 흥정 대상이 되었다. 특히 영국은 인도로 진출하기 위한 교통로이자 전진 기지로 중동을 확보하고자 하였고, 결국 1916년 4월, 프랑스, 러시아와 중동 영토를 분할 점령하기로 약속하는 비밀서한으로 '사익스-삐꼬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으로 바그다드를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남부와 하이파는 영국, 시리아는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들은 영국과 프랑스 점령 지역 사이에 공동 영향력 하의 아랍국 또는 아랍 연방국 설치를 합의하였다. 한편 남부 지역은 러시아가 점령하고, 팔레스타인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삼국의 협의 하에 특별 관리 하기로 협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1915년 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전시 외교 정책의 내용이 담긴 서한을 멕카의 태수 후세인에게 전달하였는데, (맥마흔-후세인 서한) 이 내용은 아랍인들이 참전할 경우, 영국은 전쟁 이후 후세인이 요구하는 아랍지역의 독립(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 국가 건설 포함)을 보장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아랍인들은 이를 믿고 영국 편에 서서 열심히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유태인들을 이용하여 미국의 대 독일 전쟁 참여를 유도하고 유태계 재벌들의 재정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1917년 영국 국적의 저명한 유태인 로드쉴드(Rothshild)에게 서한을 보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태인이 민족 향토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겠다는 이율배반적인 약속을 하였다. (벨포어 선언)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영국은 이런 약속들을 모두 저버리고, 1920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라크, 요르단과 함께 자신의 위임 통치 하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통치 기간 동안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해 오는 유태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에 팔레스타인에는 유태인 소유의 토지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다시 아랍 민족의 협력을 얻기 위해 유태인 이주를 강력하게 억제하였다. 그러자 유태인들은 반영국 테러를 전개하면서 국가의 창설을 시도했다.

이러한 영국의 행태로 인해 유태인들과 아랍인들 간에 분쟁이 격화되고 영국에 의한 협상 주선도 무산되자 영국은 결국 1947년 유엔 사무총장에게 팔레스타인에 관한 특별 회의를 소집하도록 하여 이 문제를 UN에 떠넘겨 버렸다. 'UN 팔레스타인 특별 위원회'는 1947년 11월, 표결을 통해 팔레스타인을 아랍인 구역과 유태인 구역으로 분할시켰고, 아랍인들은 이를 거부하였으나 유태인들은 이를 적극 수용하고 결국 1948년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였다.

중동 지역 전쟁 역사의 '악의 축' 영국은 곳곳에 분쟁의 씨앗을 심어 놓았는데, 그 중 또 하나는 '레바논'에 있다. 앞서 언급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자국의 이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지역, 곧 전술적. 지리적 요충지이자 석유와 같은 자원이 풍부한 곳에 말 잘 듣는 나라를 세워놓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이라크 영토의 일부를 쪼개 레바논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예닌 지역의 팔레스타인 아이들. 2002.3 [사진/znet )]



이스라엘이 독립 국가 수립을 선포한 이후, 이집트, 이라크 등을 비롯한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4차례의 전쟁(1~4차 중동전쟁)을 치루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북부 접경 지역인 레바논으로 대거 이동하고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가 레바논에 본부를 설치하면서 레바논 역시 내전의 장이 되었다. 시리아 또한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접경 지역으로서, 이스라엘이 정착촌 건설을 시작하자 전쟁에 뛰어 들었고, 결국 네 차례의 중동 전쟁 동안 이스라엘의 건국과 팔레스타인 지역 문제를 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집트,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등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중동 주요 지역은 '젖과 꿀' 대신 '피와 살점'이 넘치는 끊임없는 전쟁의 땅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군사적 전략의 요충지이자 석유 주산지이기도 한 이 지역에서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주요 국가들이 자신들의 이권에 따라 각 국을 지원하면서 중동의 격전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해결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 미국'

미국은 전쟁의 씨앗을 뿌려놓은 영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이 지역에 '해결사의 가면을 쓰고'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4 차례의 중동전쟁 이후 이 지역에서 자신의 입지와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면서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평화협상을 적극 주선하였다. 결국 이에 엉뚱하게도 팔레스타인이나 다른 아랍국과의 상의나 협조도 없이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1979년 미국의 캠프 데이비드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고 이는 결국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만 강화시켜 주었을 뿐 중동 지역에는 어떠한 평화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으로 미국은 이후 중동 지역 분쟁의 '해결사'를 자청하며 개입을 강화하는 명분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의 이라크 전쟁 역시 이와 같은 역사에 근원을 두고 있다.

틈새 / 문화사회 편집위원 rebel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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