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여름 서울역 광장.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김대중 정권 규탄 집회의 열기가 고조될 무렵 그가 나타나 ‘돼지 다이어트’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살찐 돼지를 잡자. 돼지 잔치 하자. 이제 잡아먹을 때가 됐어.”
‘연영석’을 처음 보는 대부분이의 사람들은 그의 노래에 잠시 머쓱해했다.
“어서 빨리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자. 너도 한점 나도 한점….”
전형적인 선동가도 아니고, 단합용(?) 노래도 아닌 것이, 팔뚝질을 하거나 손뼉을 치며 함께 하기엔 어려웠지만 직설적인 듯 은유적인 가사는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끄윽~”하는 트림으로 가진 자들을 향해 날리는 조롱은 보는 이들에게 통쾌한 웃음을 선사했다. 연영석은 바로 그런 노래를 부르는 문화노동자다.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업이 됐네요”
그는 언뜻 보기에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행색 때문에 99년에 ‘노래패 꽃다지’와 함께한 연극에서 노숙자 역을 맡기도 했다는 그는 “남들처럼 양복차림으로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생활은 못 할 것 같다”라며, “틀에 끼어 살아가는 답답한 삶을 살 마음은 조금도 없다”고 한다.
연영석씨는 예술가라는 말 대신 ‘문화노동자’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한다. ‘예술가’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예술가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모두 프리랜서 노동자일 뿐입니다.”
“정말 극소수를 제외하면 예술 하는 사람들은 다들 힘들게 살아간다”고 말하는 연영석씨는 마치 자신의 생활로 빠듯한 문화노동자의 삶을 입증하는 듯 했다.
“가끔 돈을 받는 공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돈이 모자라다보니 친구들한테 자주 얻어먹는 편이죠”
누가 들으면 ‘백수’라고도 할 것 같지만 그것은 돈버는 사람만 살 가치가 있다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발상일 뿐. 원하는 일을 하며 ‘동지’들과 공생하는 그의 모습에 그런 단선적인 사고방식을 적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가 처음부터 ‘노래’하는 문화노동자로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의 대학 전공은‘조소’였다. ‘거리의 학생’으로 대학을 보낸 그는 92년에 학교를 졸업한 뒤, 노동현장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해 계획을 바꾸고 주변 사람들을 모아 ‘문화예술생산자연합’을 만들었다.
“문화예술생산자연합에서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 중에 밴드를 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같이 어울리다 보니 기타도 좀 배우고, 노래도 만들게 되고, 또 그러다 보니 직접 불러도 보게 된 거죠.”
이렇게 ‘노래’하는 문화노동자의 길에 들어선 그의 첫 무대 대뷔는 자신도 당혹스런 사건(?)이었다. 97년 락밴드 ‘천지인’의 콘서트에서 게스트였던 윤도현씨의 순서가 ‘펑크’나면서 얼떨결에 데뷔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98년에 첫 노래 모음 ‘돼지 다이어트’를 내고, 서울역에서 거리 공연을 하면서 정식 데뷔를 했다.
연영석의 목소리? 음반가게 아닌 거리에
“투쟁하는 민중과 함께 하는 문화노동자 연영석입니다”라는 말처럼 그의 ‘노래’는 CD플레이어나 TV가 아닌 거리 곳곳에 있다. 98년 첫 공연도 서울역 노숙자들과 함께 하는 공연이었고, 그 이후에도 실업 대책 마련을 위한 인천지역 문화집회 ‘돌아가리라’에서의 장기 거리 공연,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공연,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인천지역문화실천단 활동 등을 하면서 ‘거리의 노래’를 이어왔다.
“요즘엔 매주 월요일에 명동성당 앞에서 산재노동자 자녀 장학기금 조성을 위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특히 애정을 쏟는 부분은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장애인, 산재 노동자 등 흔히 말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과 투쟁의 현장이다. 비록 크고 화려한 무대는 없지만 바로 그곳에서 자신의 노래가 그저 여흥이 아닌 진정한 연대가 되기에 큰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간혹은 그런 현장에서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들도 종종 겪는다. 최근 현대 아산 공장에서 있었던 공연도 그랬다.
“사내 하청노조 결의대회에 연대 공연을 갔었습니다. 같이 공연하는 사람 중에 본청노조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본청노조 사람들이 음향을 정리하고, 불만을 나타내더니…. 그 가수의 공연은 결국 중단 됐죠.”
사내 하청노조원들이 주인이 되어야 할 자리에 본청 노조원들이 감나라 배나라 하면서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문화노동자를 ‘연대하는 동지’로 보지 않고, 분위기를 띄워주는 이벤트 담당 정도로 여기는 생각에는 크게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구하는 데로만 불러주고 오는 것은 분위기 맞춰주는 것이지 연대가 아니”라는 그는 현대 아산 공장에서의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투쟁하는 곳에 연대하러 가면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스스로의 음악으로 서야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음악 하는 세상이 진짜 문화적인 세상
빠듯한 형편에 통기타 하나로 작곡을 하는 그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이 없는 세상이다.
“수준이나 여타의 구별 없이 내가 느끼는 만큼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는 게 진짜 자유로운 문화 세상이죠.”
“내 마음 만큼만 일하는 세상, 내 일한 만큼만 갖는 세상”이라는 ‘간절히’의 노래가사는 이런 그의 예술관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어깨너머로 배우며 시작한 ‘노래’인생이 어느덧 7년째로 접어들었다. “오래 하다보니 노래 만드는 실력이 예전보다는 확실히 좋아졌다”고 하는 그가 앞으로도 계속될 노래를 통해 하고 싶은 것은 투박한 의미의 ‘해방’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규율에 적응하고 익숙해진 모습으로 살아가더라도 가끔씩은 자신의 내면을 쏟아내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쌓인 이런 욕구를 끌어올려주는 매개, 그게 자신의 음악이고, 노래였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을 담아서인지 그가 공연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목청껏 따라 부르는 팬들이 생겼다.
“음반을 만들기는 했지만 상업성 음반이 판치는 유통체계에서는 적극적으로 노래를 보급하는 것이 힘들다”는 연영석씨. 음반가게에서 찾기 힘든 그의 음악을 듣고 싶다면 날 맑은 오후에 서울역 광장이나 명동에서 소외받는 이들이 투쟁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보자. 그곳에서 ‘제자리’에 서있는 노래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영상] 현대기아차비정규직 농성..](http://www.newscham.net/data/coolmedia/0/KakaoTalk_20180411_120413041_copy.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