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실명/익명의 문제를 계급적으로 바라보자

레닌, 본명은 '울리야노프', 이 이름은 혁명기에 사용한 150가지의 가명 중에 하나였다. 트로츠키 또한 본명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으로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탈출을 위해 사용한 가명이었다. 만약 이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한국에서 선거 기간 중에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유명해진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부사령관 마르코스도 본명은 '라페엘 기옌'으로 사망한 동지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예외는 아닐 것이다.

지난 2월 9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이하, 정개특위)는 상위50위의 인터넷언론사에게 실명제를 강제하는 선거법 개정조항을 의결하였다. 개정안 자체도 상당한 인권침해가 예상되는데도 불구하고, 정개특위는 이번 의결에서 더욱 개악 시켜 버렸다. 이 법안의 위헌성 때문에 현재 123개 노동사회단체와 십여 개의 인터넷신문사 그리고 일부 포탈 사이트가 불복종운동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국회통과 절차만 남겨 놓고 있다(*).

정계특위에서 의결된 법안에 따르면 인터넷 언론사를 "정치 경제사회 문화 시사에 관한 보도 논평 및 여론 등을 전파할 목적으로 취재, 편집, 집필한 기사를 인터넷으로 통하여 보도, 제공하거나 매개하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경영 관리하는 자와 이와 유사한 언론의 기능을 행하는 인터넷홈페이지를 경영 관리하는 자"로 사실상 모든 인터넷 웹사이트로 해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법안에 의해 인터넷에 언론매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일부 필자들이 실명사용을 거부하고 있는 [노동자의 힘]이나 일반 노동자·민중들은 선거 기간동안 언제든지 탄압당할 수 있다.

이미 실명제를 도입한 인터넷 상업자본은 정부기관과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으며, 실명제가 아니더라도 인터넷 공간은 정부에 의해 IP추적이나 쿠키 등의 기술적 방법으로 24시간 자동적으로 감시 가능한 통신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터넷에서 노동자 민중의 자발적 토론과 고발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정부만이 아니다. 인터넷 실명제가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언론사(사실상 모든 인터넷 매체)로 하여금 이용자의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를 의무적으로 수집, 확인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이 법안(82조의53항)에서는 행자부에게 주민등록 DB를 개방하도록 규정하였고, 이와 동시에 주민등록법까지도 개정하여 법적근거를 마련하였다.

개인정보가 고가의 상품으로 거래하고 마당에 인터넷 자본이 이 법을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정보의 민간 이용은 현재에도 우려할 수준에 와있다. 지난 1년 동안 인터넷에서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는 범죄가 65% 가량 증가했고, 정보통신부 산하 개인정보침해센터의 1년간 개인정보 침해유형 통계에서도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한 사고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현행 「정보통신이용촉진등에관한법률」(제4장 제16조)에서도 상업자본으로 하여금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수집 할 때에는 정보통신서비스의 제공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를 수집"하게 정해 놓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익명성을 계급적으로 이해하자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위계구조는 주요하게 경제권력을 바탕으로 하는 소유권을 통해 유지 발전한다. 그러나 사회적 위계 문제는 사적소유의 역할이 점진적으로 사라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즉, 화폐-상품관계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사회 권력의 결정적 요소가 일련의 특권적인 장치들(지식, 통제 등에 대한 접근권)로부터 포함·배제된다면 새로운 형태의 위계구조가 형성된다.

이러한 징후는 각 노동사회단체 홈페이지에서 벌어진 실명제와 익명제에 대한 논쟁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실명제를 주장하는 측은, 정부의 논리와 동일하게, 무책임한 발언이나 명예훼손 모욕 유언비어 등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 혹은 책임 있는 토론을 진행하기 위해서 자유게시판을 실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 한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경찰 프락치들도 익명의 '소수'로 글을 올리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점이다. 홈페이지 운영그룹의 권력은 게시판의 훌리건들, 경찰 프락치들 그리고 자본의 무자비한 스팸들로부터 자율토론을 보호하는 명목으로 정당성이 부여된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홈페이지에 기술적 전권을 가진 운영그룹의 관료적 권력과 노동자 민중들의 자생성과의 긴장이 숨겨져 있다. 그 이유는 운영그룹이 가지고 있는 기술에 대한 접근성(홈페이지에 대한 통제권)이 노동자-민중의 것과 비교해서 너무나 비대칭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그 권력을 구조화하며 쉽게 관료화 시켜버릴 것이다. 더구나 실명제는 그 비대칭성을 더욱 비대칭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현 수준에서 익명제은 여러 가지 사회적 위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비판과 거부, 반대 의사를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 다른 측면에서 소유권문제와 결부해서 볼 수 있다. 만약 인터넷에 행해진 지적산물이 한 사람이나 소집단의 산물이 아닌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익명성은 오히려 발전적일 수 있다. 이러한 예는 과거 문학분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문자를 사용하기 이전이나 문자를 사용할 수 없었던 사회에서 생성 전승된 구비문학(춘향전 등)의 경우 활자 문학의 경우와 달리 익명성을 띠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또한 창작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민중이었다.

그러나 문학 창작 활동이 문자를 소유한 선택된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활자 문학의 시대와 달리 구비 문학의 시대에는 문학 텍스트의 전이와 변용 그리고 자유로운 이용이 가능했다. 익명이라는 말은 바로 사회적 소유로서의 의미도 가지게 되는 것이다'.(장경렬, 컴퓨터 인터넷 그리고 문학) 비단 구비문학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제작된 다양한 정보는 다시 노동자 민중들의 손을 거쳐 창조적으로 발전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실명으로 제작된 정보 역시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 소유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에서 리누스 토발즈가 리눅스 커널(**)을 개발하여 완성한 GNU 리눅스(***)가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문제는 실명으로 제작된 정보에는 항상 개인의 '명성(reputation)'이 축적된다는 점이다. 노력한 만큼의 명성이 축적되는 것을 나쁘게 볼 이유는 없지만 그 명성이 새로운 권력관계를 형성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과학기술자 사회는 수백 년의 공유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해 왔지만, 현대에 와서 그 속에 거미줄처럼 얽힌 권력관계는 위험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러므로 그 권력관계를 끊을 수 있는 메커니즘이 필요한데, 익명성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수준에서 개인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한 정보 생산물을 익명으로 공개하는 것은 분명 '무임승차'의 문제와 '동기부여'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완전한 익명성은 최종단계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최종단계란 정보의 생산을 사회에서 분리된 개인의 노동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정보 생산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 명성과 권력을 독점할 수 없는 그러한 생산문화가 정착되는 시점을 의미한다.

(*) 현재 이 법안은 선거구 문제로 16대 국회에서는 통과되지 못했고 3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될 예정이다.
(**) 커널 : 컴퓨터 운영체제에 핵심부분.
(***)GNU 리눅스 :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에서 자유롭게 이용하고 수정 배포할 수 있게 제작된 운영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