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민주주의는 사는 재미다

국민발의 국민소환, 만민공동회에 가서 들어보니... "제도가 중요한 것 아니다. 말할 권리를 되찾는 것 자체가 자본에 저항하는 것"

▲직접민주주의는 사는 재미다.-4월 10일 열린 직접민주주의 만민공동회는 거의 3시간여 동안 사람들은 자유롭게 발언도 하고, 노래가 준비된 사람은 노래도 불렀다.


따로 연사도 없었다. 선전, 선동적인 말짓, 몸짓도 없었다. 음향기기를 만지던 스탭들이 틈틈이 메모한 것을 들고 나와 자유발언에 나서기도 했고 북을 두드리며 무대에 서기도 했다. 북소리와 노래소리에 이끌려 찾아온 세 아이를 동반한 어머니가 마이크를 잡기도 했고, 공원이면 으레 있기 마련인 노숙자가 무대에서 노래꾼과 함께 어깨춤을 추기도 했다. 4월 10일 국민발의, 국민소환을 위한 만민공동회, 그것도 선거 5일 전, 소비문화와 구경꾼 문화의 메카인 대학로에서 열렸다.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하자 귀를 찢는 듯한 괴성에 어디가 어딘지 방향조차 잃어버릴 것 같았다. 노천인데다가 소리가 쩡쩡 울리는 소라관을 어느 하드코어 밴드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공원의 다양한 소리를 모두 흡수해버리면서까지 저들이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공원문화가 박살난 틈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비집고 들어가자 이주노동자 농성단의 헤미니가 땀을 뻘뻘 흘리며 선전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의 발 밑으로 선전물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노란 햇살이 안타까웠다. 사람들의 화사한 옷차림도. 그러면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서 만민공동회라니. 강하고 쎈 것들 틈서리에서 개개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나는 이미 공원에 도착하기 전에 들른 화장품 가게에서 기가 죽어 있던 참이었다. 옆 손님에게 무언가를 물었더니, 똑 부러지게 되돌아온 말은, "점원 아니거든요." 말 한마디 섞는데도 돈이 드나부다. 아니면 무언가를 잘 아는 사람은 언제나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건지.

다양한 문화를 가로막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서명부스에서 이번행사 기획에 참여한 사회진보연대의 김예니 씨를 만났다. 그리고 얼마만한 뚝심이 있어 이런 용감한 행사를 준비했나 싶어 앞으로의 계획부터 물었다. 그랬더니 천연덕스럽게 없다고 한다. 오늘 행사 되는거 보면서 고민할 거라고 했다. 허긴 아닌 걸 죽어도 기라고 못하는 사람에게 두려울 게 뭐가 있겠나. 벌여놓고 보는 거지. 그래서 행사의 취지로 넘어갔다.

"당장 국민소환, 국민발의를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탄핵사태 이후 국민들이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던 정치권력에 대한 회의, 생계에 대한 불안이 한표행사로 국한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대신해주는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대변당하지 않는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일상적으로 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보는 것이 중요했을 뿐 행사의 규모나 내용에는 욕심을 낸 것 같지가 않았다.

하드코어 소리가 잦아들 무렵, 반전의 메시지가 아름다운 그림으로 채색된 '평화바람유랑단'(단장 문정현)의 차량 앞으로 시민들(학생연대의 회원들과 여러 시민단체의 회원들이 다수인 듯 했지만)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차량의 호소력 있는 그림도 좋았지만 행사의 출발도 산뜻했다. 자칭 문예노동자인 연영석 씨의 노래. 기분좋은 것은 사람을 불러들인다. 무대근처를 지나가던 아줌마 아저씨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손박자를 맞췄다. 공원의 거지 아저씨도 어깨춤을 덩실덩실. 연영석 씨가 노래 중간에 뼈있는 한 마디를 떨어뜨렸다. "직업정치인은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우리 스스로가 명확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3시간여 동안 사람들은 자유롭게 발언도 하고, 노래가 준비된 사람은 노래도 불렀다. 처음에는 준비나 한 듯 한 사람씩 발언에 나섰으나 분위기가 무르익자 많은 이들이 발언에 나서고 싶어했다.

"부안에서 주민투표까지 실시했으나 법적효력이 없는 투표라고 한수원은 다시 핵폐기장을 강행하려 하고 있습니다."(청년환경센터 이헌석)

"이주노동자 농성단의 샤말타파는 파병을 반대했기 때문에 구속됐습니다. 우리도 운동하는 권리를 갖고 싶습니다. 우리는 법을 못 만들어 불법체류자로 살고 있어요. 하지만 일본, 독일 등의 이주노동자를 보면 그 나라의 법에 따라 살고 있어요.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평화적인 집회도 하면서 말이에요."(꼬빌)

그런가 하면 지금은 민노당의 원내진출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원내진출이 이루어지면 탈퇴해 의회정치를 비판하는 일을 할꺼라는 사람, 국민발의가 가능해지면 군대반대를 위해 무슨일이든 하겠다는 사람, 40대까지 인턴사원이라는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싶지 않으면 청년실업자로 남아야 하는 청년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사람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음향과 북소리, 기타반주 등을 맡아준 평화바람유랑단의 한사람도 발언에 나섰다.
"미국은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95개의 미군기지를 3개로 모아 동북아시아를 점령할 사령부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패전국이 아님에도 미군이 점령하는 기간이 무기한입니다. 이런 원칙도 없는 법은 평화를 바라는 국민들의 발의로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또 네이스나 집시법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벌을 받게 하는 법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민주주의로 나가는 것은 쉽고 후퇴는 어렵게 되어야 하는데 지금의 정치제도 안에서는 거꾸로 통제는 쉽고, 진전은 매우 어렵습니다." 눈에 뜨이는 초록색 잠바에 삭발한 머리가 심상치 않더니, 그는 할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손에는 메모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민주주의는 문화라고 생각해요. 근데 이 문화가 꽃피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군대와 학교 때문입니다. 군대라는 상명하복의 체제는 문화를 짓밟을 수밖에 없어요. 또 의무교육이라는 학교는 의무만 이야기할 뿐 학생들의 권리는 이야기하지 않아요. 권리가 없는 곳에서 학교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감옥으로 돌변합니다. 제가 교사출신인데 삭발한지 4년 됐습니다. 아이들에게 교복을 입히고 머리를 자르게 하는 권력이 통제하는 몹쓸 짓을 보면서 신체표현의 자유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니 오늘따라 머리 긴 남자가 많이 보인다. 머리짧은 여자도. 내친김에 무대뒤로 돌아가 좀전에 북채를 잡았던 잘생긴 청년을 만났다. 궁금한 것은 그가 만들어냈던 북소리와 직접민주주의와의 상관관계. 발언 중간중간에 노래를 많이 부르고 하니 분위기가 부드러워져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자기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치의 표현이냐, 표현의 정치냐

"예전에 누드사진으로 논란을 만들었던 김인규 교사가 이런 말을 했죠. 정치의 표현이냐, 표현의 정치냐. 정치의 표현인 경우가 대부분이죠. 헌데 표현의 정치가 좀 더 핵심을 관통하는 말이 아닌가 싶어요. 자기를 표현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거든요. 근데 그 소통과정에서 흥이 모아지면서 힘을 만들고 평화를 만들어가게 되는 것 같아요. 북을 두드린 사람 중에 전문 문예패는 아무도 없어요. 근데 연습을 통해 서로와 교감하고 느끼며 이만큼 컸어요."

직접민주주의, 어려울 것 없다. 서로 느끼며 교감하는 것. 예전에 봤던 어느 건축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수도원을 설계하며 너비 75센치의 복도를 만들었다. 그 복도에서 두 사람이 만나면 한 사람은 양보를 하거나 서로 몸을 비스듬이 피해주어야 한다. 그 복도를 보고 처음에는 욕을 바가지로 하던 수녀와 수사들이 나중에는 그 복도를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는데. 일명 자비의 침묵 수도원의 겸손의 복도... 여튼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만나서 살 부딪고, 문제를 나누며, 흥을 만들어 힘을 나눠갖고 싶다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서로의 문제를 나누고 의견의 일치를 만들어가는 것,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청년을 만나고 오며 초록색 삭발남자에게 슬쩍 다가갔다. 이 사람이 피부로 느끼는 직접민주주의는 뭘까?

"원론적인 얘기밖에 할 게 없는데... 직접민주주의밖에 없어요. 이 자본의 시스템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길고 지루하고 험난한 과정이겠어요." 뭔가 더 나올 듯. 하지만 그는 무대 스텝을 하기 위해 금방 자리를 떴다. 다행히 연관된 듯한 이야기가 발언대에서 나왔다.

"학교에서 교육투쟁을 하며 본관을 점거했습니다. 그때 부총장 일행과 협상을 하는데, 그 자리에는 간부뿐만 아니라 300여명의 학우들이 모였어요. 근데 놀라웠던 것은 평소에는 간부 외에 발언에 나서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막상 협상을 시작하자 일반학우들이 너도나도 발언에 나서게 됐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협상이 4시간 가까이 이어졌지만 너무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직접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 흔히 속도와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문제로 삼습니다. 하지만 이 효율성과 속도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오히려 이 효율성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권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멕시코의 사파스티타 농민군은 몇날 며칠의 회의를 통해 동등하게 의견을 나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권리를 찾는 것이 공동체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주최측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발언할 사람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굳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끝으로 정리하는 발언을 들어볼까 하고 만민공동회 자리를 묵묵히 지킨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 상임활동가를 만났다.

"스위스는 국민발의를 하기 위해 평균 2년의 시간을 준비한다고 해요. 분명 지금의 효율과는 거리가 멀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대상화된 사람들과 전문가의 구별이 없어집니다. 근데 작년에 개악된 우리나라 법들을 보면 하루아침에 통과된 누더기 법들이거든요. 국민발의가 악용될 소지가 없지 않지만 충분한 토론을 거친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갈 거라 생각합니다.

직접민주주의가 꽃 피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상상력 발동이 아닌가 해요. 스스로 노력할 지점들을 찾아야 하니까. 오늘 만민공동회는 산발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됐지만, 다음번에는 집시법이면 집시법 등 한 주제를 잡고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에 나서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식으로 토론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탄핵국면으로 국민발의, 국민소환이라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지 이제 한달이 지났습니다. 앞으로 인식이 더 넓어지면 우리나라에서도 반드시 시행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거리로, 거리로 나왔으면 좋겠다. 거리의 문화가 점점 재밌어지고 있다. 수많은 걷기들이 생겨나오고 있고, 만민공동회에, 유랑단도 나오지 않았나. 우리의 일상이 역동적인데 따로 전문예술인, 문화인을 숭상할 이유가 없다. 오늘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직접민주주의는 더 많은 이들의 잔치, 축제, 카니발의 정신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잔치의 정신도 투철해지면 무서운 힘으로 분출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관리자나 대변자를 만들지 않고 자신의 감각, 자신의 목소리를 숭상한다는 점에서 불온하다. 비협력적일 수 있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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