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쿼터를 축소하는 문제로 다시 후끈하다. 영화인들은 공식적인(!) 표정은 ‘(이창동 이라는)믿었던 도끼가 발등찍어 깜짝 놀랐다는’ 얼굴이다. 그러나 소위 쿼터 인사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주구장창' 주장하는 문화적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스크린쿼터 축소보다 훨씬 안타까운 일은 최근 폐관위기를 맞은 ‘서울아트씨네마’ 문제이다.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주옥’같은 립서비스와 영화산업의 절대 호황속에서 '서울아트씨네마'의 폐관은 문화다양성을 대하는 너무나도 초라한 ‘정책과 의지’를 상징한다. 서울아트씨네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유의미
<운하임리 스페셜, 인디포럼2004, 인권영화제,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 프랑스 아발가드르,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 구로사와 기요시 회고전, 할리우드 코미디 클래식, 일본영화 걸작선, 프랑수와 오종 특별전> 올해 초부터 현재까지 서울아트씨네마에서 진행한 ‘쟁쟁한’ 프로그램들의 목록이다. 이 외에도 서울아트씨네마는 소수 씨네필들의 문화적 감수성을 위한 공간을 넘어 사회의 변화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상호작용을 통해 성장해 온 공간이었다. 퀴어와 페미니즘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지속적인 연대를 맺어 온 공간이었다. 또한 장 뤽 고다르와 히치콕 등 영화사에 흔치 않은 성취를 이룬 클래식 무비들에 대한 열정적인 회고전 및 초청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열적으로 이어 온 공간이었다. 서울아트씨네마의 존재는 다른 구차한 이유들을 부치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다양성’이고, 견딜 수 없이 소중하다.
스크린쿼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의미
스크린쿼터 운동이 문화적 다양성을 수호하는 이 땅의 대표적 문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한국 영화는 천만 관객시대를 맞이하였으며, 국내외 자본으로 만들어진 ‘Made In Korea' 영화들이 아시아 지역에 ‘직배’되는 상황을 맞았다.(UIP영화가 직배 수입 된다고 극장에 뱀을 풀며 저항했다는 충무로의 전설적 영웅담을 기억하라!) 누가 뭐래도 한국 영화는 사상 유례없는 성장을 하였으며, 이 열매를 독점한 이들은 어느새 하나둘 두터운 ‘권력’이 되었다. 물론, 문화를 교류의 대상이 아닌 교역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모든 경제적 관점에 ‘완전’ 반대한다. 손톱만큼의 타협도 양보도 할 수 없다. 스크린쿼터 운동의 초심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다만 묻고 싶은 것은, 지금 이땅의 스크린쿼터 운동이 어디쯤 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전국의 스크린 수는 1,132개 달하고(극장연합회 발표 기준) 이 중 한국영화의 관객점유율은 49.4%(영화진흥위원회 발표 기준)에 이른다. 신화처럼 이야기되는 천만 관객시대는 간단히 이뤄질 수 있는 수치가 아니다. ‘산업’적 이해에 기반한 멀티플렉스의 급격한 증가와 ‘산업’화를 위한 배급 유통망의 부단한 노력, 영화 리뷰 시장의 ‘산업’화가 동시에 어우러지고 노력하여 이뤄낸 필연적 결과이다. 그리고 스크린쿼터는 이런 산업적 호황을 가능케하는 부동의 상수로서, 당당한 한 몫을 해냈다. 그렇다고 그 동안의 스크린쿼터 운동이 산업적 측면의 ‘시스템 혁신 운동’이었다고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스크린쿼터 운동의 점검이 필요한 이유는, 영화산업이 시장 논리의 절학인 ‘규모의 경제학’을 익히며, 정부의 보호아래 벌어온 어마한 이익을 보호주의 철갑옷 안으로 감추고 주머니에서 꺼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호의 그림자 뒤에 숨어서 헐리웃 깡패의 모습을 흉내내는 자가당착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방관한채 무엇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크린쿼터 운동이 ‘영화는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특별히 산업적으로 더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면, 스크린쿼터 운동의 정신이 문화적 다양성을 옹호하고, 현실적으로는 ‘헐리웃’으로 대변되는 초국적 신자유주의 자본으로부터 문화적 종다양성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라면, 스크린쿼터 운동이 문화를 교역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협상의 테이블에 올리려는 한미 BIT 협정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라면, 스크린쿼터 운동은 지금까지의 과오를 대오 각성하고 새로운 비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자본들간의 합병이 자국 영화의 경쟁력을 강화할거라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이 부끄러운 짓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시아에 대한 직배를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자는 논리가 아시아의 작은 영화들의 자생력은 물론 영화의 종다양성을 짓밟는 행위임을 감춰서는 곤란한다. 멀티플렉스를 빨판 삼아 손쉽게 관객의 주머니를 털려는 강도짓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국내 영상문화의 종다양성 유지를 위해 지금 당장 나서야 한다.
서울아트씨네마와 스크린쿼터, 그리고 ‘공공영상문화’를 위하여
국내의 영화 자본들이 그리고 ‘영화진흥’을 위한 위원회가 ‘산업적 이해’에 기반한 ‘경제적 실익’ 조금 나아가서는 해외 영화제 수상을 통한 ‘국위선양’이라는 코미디를 위한 ‘작가영화’에 대한 지원 정도를 고민하면서 주장하는 ‘문화다양성’은 더 이상 누구의 공감도 얻지 못할 것이다. ‘독립영화 지원’, ‘영화 노동자 처우 개선’, ‘예술영화 전용관 건립’, ‘영등위 폐지 및 심의 제도 개선’ 등등 그 동안 ‘스크린쿼터’ 덕에 가려진 많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너무나 미비했다. 동시에 그동안 ‘스크린쿼터’를 통해 벌어들인 유∙무형의 수익을 적극적으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와 합의의 바탕속에서 '공공적 영상문화'를 위한 공세적인 투자와 정책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문화다양성이고, '진짜 스크린쿼터 이다.
서울아트씨네마의 폐관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소중하고 ‘유의미’했던 많은 것들이 잃어버렸다. 그리고 ‘유의미’ 안의 수많은 열정들을 추억으로 잊어가려 하고 있다. 서울아트씨네마가 사라지는 이 상황에서 스크린쿼터가 주장하는 ‘문화적 다양성’의 ‘무의미’를 견디기 어렵다.
사진 : 서울아트시네마 개관2주년 기념영화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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