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맑스]를 읽고

- 한국의 정보통신운동과 미디어운동의 실천에 대한 총론적인 이론 연구는? -

80년대 이후 '정보화'라는 것이 '국민적 과제'가 된 이래로 수많은 책들이 국내에 쏟아 나왔습니다. 그 중 '지식 사회론'을 끊임없이 우려먹고 있는 피터 드로커나 '제3의 물결' 등으로 유명한 엘빈 토플러 따위가 대표주자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책에는 자본의 정보화에 대한 찬양과 그에 걸맞는 사기성 농후한 처세술만 나열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책들도 이들의 아류작에서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노동자, 노동계급이 그 '정보화'를 어떤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인지 알려주는 책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이버-맑스>는 그 무리에서 벗어나 일관되게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지금의 변화를 서술하고 있고, 부족하나마 그 속에서 변혁적 대안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이 책을 좀 더 눈여겨 볼 만하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사이버-맑스>라는 책을 서점에서 골랐던 것은 작년 이맘때인 2003년 6월입니다. 처음 책을 봤을 때 눈길을 끈 것은 '토플러의 <제3의 물결>에 보내는 좌파의 뛰어난 반론'이라는 카피 문구와 두툼한 책의 두께였습니다.

당시 민주노총 정보통신국에서는 <자본과 국가의 정보화와 이에 대한 노동의 대응 전략>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거창한 주제로 워크샵을 준비 중이었는데, 그 때에 마침 이 책이 눈에 띄었던 것입니다. 그 두께 덕분에 워크샵 때까지 다 읽지 못해서 행사에는 큰 도움이 못 되었지만, 대신 저에게는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활동가들에게 새로운 전망과 연구할 꺼리를 던져주는 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한국의 정보통신운동, 미디어운동은 실천적으로 다른 나라에 결코 뒤지지 않는 전문성과 헌신성으로 눈부신 결과물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실천 속에서 다양한 토론을 거치며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원칙을 수립하고, 실천적인 이론적 축적의 성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그 활동들을 하나로 묶어서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하고 변혁적인 전망 속에서 배치하는 총론적인 이론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사이버-맑스>는 이 총론적인 연구 분야에서 우리에게 모자라던 2%를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제기해주고 있습니다. <사이버-맑스>의 저자인 '닉 다이어-위데포드'와 메일을 주고받을 기회가 있어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닉은 '21세기에 공산주의 이론을 발전시키는데 흥미를 가진 사람들에게, 새롭게 등장한 기술로 가능해진 관계와 투쟁의 형식에 대해 창조적이고 희망적으로 생각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라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즉, 저자는 <사이버-맑스>를 통해 - 아직 거칠지만 - 맑시즘을 다시 지금의 상황에 맞도록 재해석하는 시도를 하면서 현재의 활동들을 변혁적 전략 하에 배치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이버-맑스>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1-3장까지로서 STR(Scientific Technological Revolution, 과학기술론) 등 구소련의 과학기술론, 과학기술의 사회적 형성론, 신러다이트주의, 엘빈 토플러의 정보사회론, 포스트 포디즘 등 20세기 이후 그동안 제시되었던 좌우 이론체계에 대해 비판적인 접근을 시도합니다.

이 책을 읽기 전 저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공부했던 STR론에 대한 문제의식, 그 뒤 90년대 중반 정보통신운동 진영과 과학기술운동 진영에서 공부했던 사회적 형성론의 한계, 그리고 포스트 맑시즘과 포스트 포디즘에 대한 막연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책 서두의 비판은 그 문제의식을 일관된 관점에서 깔끔하게 정리해 놓아서 생각을 정리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분야의 이론을 접하지 못한 분들에게 이 부분은 그동안 소개된 이론들을 개론적으로 훑어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어서 후반부에 서술된 대안이 제출된 과정과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 생각됩니다.

4장부터는 새로운 대안으로 '자율주의 맑시즘'을 철학적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역사 해석과 변혁적 전망 및 활동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이버-맑스>는 역사의 원동력이 생산력의 발전이 아니라 계급투쟁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기존의 맑스-레닌주의 역사발전론을 그대로 뒤집은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집합적으로 '구성'하면 자본은 그 위협적인 결합을 탈구성하기 위해 조직혁신, 기술혁신, 분할, 탈숙련화, 주기적 구조조정 등을 실시합니다.

그러나 자본은 언제나 임금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새로운 생산과정 내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은 재구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 초기에 전문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이 시작되자 이 계급을 파괴하기 위해 자본은 테일러주의적 노동분업, 기계화 등을 통한 대공장 체제를 도입하고, 이 '대중 노동자 시기'에 노동자들이 다시 대공장을 기반으로 집단적이고 강력한 계급투쟁을 전개하자 지금 자본은 이를 탈구성하기 위해 정보산업이라는 기술을 도입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사이버-맑스>는 이 시기를 '사회적 노동자의 투쟁주기'라고 지칭하는데, 정보통신을 통해 자본은 그전 대공장에 집단화되어 있던 노동을 파편화하고, 사회의 모든 노동을 자본에 편입시키려고 시도합니다. 그런데, 기존에 막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레닌주의적 혁명론은 지고지순한 절대적 전략이 아니라 '대중노동자 계급투쟁' 시기의 자본주의 단계에 적합한 맑스주의 전술일 뿐이므로 현재 시기에 부적절하며, '사회적 노동자 투쟁시기'에 적합한 새로운 혁명론을 구성해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새로운 혁명론은 맑스-레닌주의적 혁명론이 가지고 있는 계급환원론, 전위주의, 대리주의, 기술관료주의를 극복하고, 60년대 이후 제기된 다양한 진보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계급 중심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노동계급은 현재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서 전지구적으로 계급 재구성에 들어가야 하며, 자본이 자기 필요에 의해 구축한 정보네트워크 체계의 횡단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대항 집단들 간의 탈규제적이고, 민주적이며, 탈국가적이고, 집합적인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후반부의 대안은 그동안 진행되어 온 정보통신·미디어운동의 여러 가지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또 새로운 공부거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진행하던 몇 가지 고민에 대한 해명도 담겨져 있어서 마치 재미있는 소설을 읽듯이 페이지 뒤를 궁금해 하며 쫒아갔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1) 정보통신운동과 계급운동의 관계 정립 2) 민주주의의 문제 3) 노동주체의 정보통신 및 미디어 활용 4) 자본의 노동자감시·통제에 대한 대응 활동 5) 신자유주의와 자본의 정보화에 대한 이론적인 포괄 6) 촛불 시위를 계기로 대중운동에 대한 새로운 고찰 등등 그동안 능력에 부치는 힘든 과제들을 사방에 펼쳐놓고 헤매던 상황에서 <사이버-맑스>는 보다 정리된 형태로 일관된 관점 하에 이런 이야기들을 풀어가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1997년에 쓰여진 것이라서 9.11 이후 진행된 급격한 정치 지형의 변화와 기술 환경의 변화를 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이 나온 이후 발생한 시애틀 투쟁, 칸쿤 투쟁 등 새로운 국제적 투쟁의 경험과 의미를 해석해내지 못한 아쉬움이 큽니다. 그리고 한국 사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저자의 연구에 반영되지 못한 것도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사이버-맑스>의 대안을 받아들이기에는 책에서 주요한 이론적 배경으로 작동하고 있는 '자율주의'에 대한 연구와 논쟁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동안 한국내 논의가 부족한 자율주의적 관점의 변혁론, 조직론, 대중관을 어떻게 받아들을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이후 고민하고 논의해야 할 남겨진 과제입니다.

이 책은 예전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처럼 잘 짜여진 강령이나 지침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 아직 많은 부분이 거친 것이 사실입니다. 저자도 메일을 통해 '이 책이 잘 짜여진 강령 같은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창조적인 능력에 던져진 제안으로서, 자극으로서, 계기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 이는 독자들이 원한다면, 이 책을 (누구든지 참가해서) 디버깅하고 구조적으로 첨가하는 '오픈 소스'처럼 고민을 더 진척시키기 위한 재료, 동기 같은 것으로 취급하라는 것이다.' 라는 말을 전해왔습니다.

우리의 고민을 진행하기 위해 준비된 토론회에서 하나의 발제 정도로 생각하며, 우리의 상황에 맞게, 우리의 경험에 맞추어 재해석하고 재구성할 새로운 제안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충분히 열린 자세로 이 책의 가치를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최세진 (민주노총 정보통신부장)
태그

사이버 맑스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미디액트 11호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