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허허'를 필명으로 사용하는 한 네티즌은 지난 7월 13일 인터넷 싸이트 진보누리 게시판에 '친일진상규명법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글을 게재한 바 있다. 그 글에서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의 부친 신상묵이 친일 행적을 보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문제가 불거지자 열린우리당의 엄포와 신기남 의장 본인이 강력하게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는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제 신기남 의장 부친의 행적이 폭로됨에 따라 논란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느낀 심경을 피력했다. '으허허'라는 필명의 사용자 윤태곤 씨는 현재 미디어참세상에서 수습기자로 활동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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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7월 13일 '친일진상규명법 무엇이 문제인가?' 라는 글을 진보누리에 쓴 바 있다. 주된 내용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범위에 고등관(군수-경시-소위) 이상을 당연직으로 포함시킨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최소한 반민특위법의 규정을 준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수립 직후 통과된 반민법의 규정을 보면 군,경의 경우에는 판임관(지금으로 치면 7급 정도, 중앙부처 주사 혹은 경위 이상 급이 이에 해당한다) 이상의 지위를 지닌 자를 포함시켰고 또한 특례로서 판임관 이상의 지위에 있지 아니하더라도 고등계 형사, 일본 헌병 간부들은 그 대상으로 편입시켰다."
글 말미에 열린우리당 신기남 당의장의 부친 신상묵 또한 일경 간부라는 기록이 있는 바 일제 하 경찰간부는 경시(경찰서장) 이상이 아니라도 친일파가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했었다. 댓글로 개정친일진상규명법의 맹점과 만주국의 성격과 간도특설대 등에 대해 다른 네티즌과 의견을 나누기도 했는데 사건은 그 다음날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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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지난 15일 내 글 가운데 신기남 관련 부분만 떼어 네티즌의 문제제기라며 기사화했고, 신기남 당의장은 "부친은 해방 당시까지 화순초등학교 훈도로 재직했을 뿐 친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분"이라며 자신있게 반박했다. 또 열린우리당 부대변인은 공식 논평을 통해 "법의 단죄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며 엄포를 놓았을 뿐 아니라 진보누리에 전화를 걸어 엄포를 놓기도 하였다.
나는 글 자체에 대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신기남 당의장의 부친이 친일 행위를 했었다는 사실 확인을 했었기 때문에 나름의 확신을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사건이 확대되기를 바랬으나, 열린우리당 측에서 아무런 추가 조치가 없었기에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그런데 16일 신기남 당의장 부친의 헌병간부 경력(지원병)이 폭로가 되고 모든 언론과 인터넷 게시판에서 이 문제가 들끓고 있다.
잘 됐다는 마음보다 뭐랄까 씁쓸하다는 마음이 앞서는 걸 어쩔 수 없다. 문제가 된 그 글을 썼을 때는 공개하지 않았던 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약간 풀어놓아 보련다.
신기남 당의장의 부친은 1916년 생으로 1938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40년 2월 실시된 조선특별지원병 공개 모집에서 무려 28대 1의 경쟁을 통과하여 그 해 7월 일본제국군에 입대했고 헌병의 길을 걸으며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좌담회에 참가 황군으로서의 각오를 털어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우리 할아버지는 1910년 생으로 1931년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셨다. 1938년 2월 청년동지회 비밀 활동이 왜관지역 일경에 인지되어 피체되었다. 조선총독부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기록한 형사 사건부에 의하면 1939년 10월 14일 90명의 동지들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대검찰에 송치되었으며 그 중 26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구 형무소에 투옥 당하셨다. 일경에 피체된 이후 수많은 고문을 당하였고 동지들 중 이두석이라는 분은 경찰 피체 1개월만에 고문으로 사망하셨다.(그의 항일을 기리는 비석이 칠곡에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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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대구형무소에서 발행한 수용자 신분장에 따르면 할아버지께선 7회의 구류 갱신 처분 끝에 17개월 간 옥고를 치른 끝에 1941년 3월 8일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신기남 의장의 부친이 황국군에 입대했을 1940년 7월에는 아마 세 번째 구류갱신 기간이었을 듯 하다. 이후 1942년 2월 23일 조선총독부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일년을 언도 받았으나 이미 17개월 간 미결 구류를 당하였기에 이 미결구류 일수를 산입하여 집행 방면되었다.
치안유지법이란 무엇인가? 국가보안법의 모체로 불리는 치안유지법은 '국체변혁' 혁명운동·식민지독립운동의 탄압을 목적으로 1925년에 제정되어 28년과 41년에 개정되어 최고형은 사형이었으며 형기 만료자·기소유예자 마저 구속하는 최강의 억압법규였다고 한다. 국가보안법이 해방이후 수많은 무죄한 인사들의 족쇄가 되었던 것처럼 일제 강점기 당시에 치안유지법은 사회주의자, 조직활동가들의 족쇄였었다. 할아버지께서 조선총독부 대구지방법원에서 일 년 언도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형무소에서 7회의 구류연장 끝에 17개월의 옥고를 치른 것 또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혐의만으로 불법적 감금과 고문이 자행된 해방 이후 역사와 정확히 닮은 꼴이다.
신기남 당의장 부친과 우리 할아버지의 우울한 콘트라스트는 조국 광복과 국가 수립으로 끝을 맺은 것이 아니라 더더욱 심화되었다. 1946년 미군정 경찰에 투신하여 경북도경 보안과장, 빨치산 토벌대장, 제주도경국장, 경무관의 길을 걸었던 그와 달리 우리 할아버지께선 해방 직후 건준 참여를 비롯한 잠깐의 활동밖에 하지 못하셨다. 명실상부하게 일본제국주의 경찰의 뒤를 이은 미군정-한국 경찰에 의해 일제 하 치안유지법 위반자들은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으며 결국 보도연맹 가입 강요를 벗어나기 위해 부산으로 이사하시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신부전증, 심장병에 시달리다가 51세를 일기로 사망하셨다.
사실 자기 당 내부에서조차 공격을 당하고 있는 신기남 본인에 대해선 별다른 감정이 없다. 그러나 신기남 의장은 지난 7월 미국에 가서 부친이 지리산 공비토벌사령관을 지낸것을 자랑하면서 자신이 있는한 한미공조는 문제없다고, 한국의 유일한 동맹은 미국이라고, 추가 파병은 국민 대다수의 뜻이라고 강변한 바가 있다. 미국만이 우리의 살 길임을, 추가파병 만이 국익임을 외치는 신기남 의장의 모습을 보고 대동아공영권과 내선일체를 외치며 민중들을 짓밟던 친일군상을 떠올리지 않을 재주가 내게는 없다.
또한 일제 하에서 피와 땀을 바쳐 투쟁했던 수많은 투사들과 그 자손들, 그리고 오늘날 치안유지법의 후예인 국가보안법에 고통 받고 있거나 부당한 권력과 자본에 맞서고 있는 활동가들은 일본 헌병대 오장의 아들과 만주군 중위의 딸이 양편에서 연좌제라느니 정치적 의도가 있다느니 하는 췌언에 의해 진흙탕 싸움에 빠져버린 친일 진상규명 논의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보수정치권과 언론들은 알고나 있을까?
1852년 칼 맑스는 루이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에서 헤겔의 경구를 원용해 "역사적 사건은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겼다. 1940년 조선인 황국군 헌병과 만주군 장교들이 조선인 항일 활동가들을 탄압했던 역사가 비극인 것은 분명할 게다.
그렇다면 그들의 자손들이 여전히 여야의 대표로 권력을 틀어쥐고 민중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오늘의 풍경은 희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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