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여성의 권리선언

13일의 금요일, 어두운 밤 인사동 거리에는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피켓을 들고나온 모양으로 봐서는 분명 재미삼아 귀신놀이를 하려고 모인 것을 아닌 것 같다. 어느새 긴 행렬을 이룬 사람들이 “여성의 밤길을 위협하는 너, 집에 일찍 들어가!", "여자보고 일찍일찍 다니라고 말하는 너, 너나 일찍 들어가!" 라는 구호들을 외치면서 후레시를 켜들었다. 참 어지간히도 지겨웠던 모양이다. 그놈의 ‘어두워졌으니 집에 일찍 들어가’라는 말이...

하긴 자라면서 한번쯤 뒤에서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에 괜히 주눅들어 본 적 없는 여자들이 몇이나 있을까? 게다가 요즘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청혼을 거절당해 여자혐오증이 생긴 희대의 연쇄살인범 이야기로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다. 아담하고 예쁜 여성들만 범행대상으로 삼았다는 둥, 결혼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처녀도 살해했다는 둥 기사를 늘어놓으면서 결국 ‘그러길래 여자들은 낮이고, 밤이고 함부로 돌아다녀서는 안된다’는 식의 극약처방만 내놓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그 어떤 곳에서도 흉악한 범죄행각을 모방하는 범죄심리나 현대인들의 정신병리학적, 사회구조적 문제들은 분석할 지언정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희생당한 여성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신경쓰지 않는다. 또한 그로 인해 수많은 여성들이 얼마나 더 가정에서, 사회에서 억압받고 위축되고 통제당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사진 출처 : 일다


그래서 여성들이 스스로 소복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들의 목소리로 그동안 억눌려왔던 분노들을 터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조심해야지’, ‘어딜 여자가’ 라는 말로 온갖 횡포와 욕설그리고 폭력까지 마음껏 휘둘러왔던 한국 사회의 잘못된 가부장적 문화, 의식들에 온 몸으로 저항하기 위해서 말이다.

밤길을 되찾자는 말은 결국 성폭력에 의해 희생되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침해받아왔던 수많은 여성들이 그러한 억압과 통제에서 벗어나 몸에 대한 자유를 되찾고 싶다는 지독한 열망이자 열렬한 권리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몸에 대한 억압은 곧 정신에 대한 억압, 그리고 성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져왔다.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등등 성에 관련된 범죄 앞에서 가해자보다도 더 죄인 취급당하고, 사회적 비난과 삐딱한 시선들에 더 많이 노출되어야 했던 것은 바로 여성들이었다.

더군다나 성매매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형 화제참사의 희생자가 되고 나서도 제대로된 보상을 받지 못했던 가부장적 낙인, 반미감정에 호소해서야 겨우 ‘민족의 딸’로서 처참한 시체의 모습으로 사회적 관심의 대상으로 주목받을 수 있었던 남성중심적 시선 그 모두가 여성의 몸을 향한 가부장제의 왜곡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민우회, 언니네, 서울여성의 전화, 숭실대학교 총여학생회, 고려대학교 여성위원회, 연세대학교 여성위원회, 관악여성모임연대를 주축으로 모인 수많은 여성들은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편견에 꽉막힌 시선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자 한다. 성폭력의 문제는 더럽거나 무서워서 피한다고 없어질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문제는 제 2의, 제 3의 형태로 얼마든지 반복, 재발할 수 있을 뿐이다.

한국사회는 아직까지도 이런 간단한 상식조차도 무시한 채 여성들만 꽁꽁 묶어두면 그런 폭력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호언장담을 하고 있다. 과연 언제까지 남성들은 아무런 책임의식이나 도덕적 의무도 지려하지 않으면서 그들만의 면죄부 놀이를 계속하려 것인가?

서하나 / 이화여대 여성학과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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