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찍으러 온거지, 무슨 관심이나 있겠어”
“노숙인을 만나 대화를 한다면서 경찰을 앞세워 막는 이유는 뭐야”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의 서울역 일일 노숙체험에서 쏟아진 노숙인들의 성토였다. 17일 김근태 장관은 CBS라디오에서 마련한 특별 기획 ‘2004 한국의 사회 안전망’의 ‘명사 현장 체험’의 일환으로 서울역 노숙체험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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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무료진료소를 방문한 김근태 장관 |
이날 저녁 9시 30분 경 김근태 장관은 서소문공원 부근에 위치한 노숙인보호상담소 ‘구세군 드롭인 센터’를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노숙인들, 김근태 장관 방문에 “관심없다”
김근태 장관이 ‘드롭인 센터’를 방문할 즈음 ‘한국 대 몰디브’ 축구경기가 한창이었다. ‘드롭인 센터’에 김근태 장관이 방문하자 기자들과 관계자들은 그를 맞이하느라 분주했지만, 정작 노숙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축구경기를 시청하던 한 노숙인은 “오늘 하루 장관이 우리를 방문한다고 뭐가 그리 달라지겠냐”며 “기자들이나 좋아하는 거지, 오던 말던 난 축구나 보겠다”며 김근태 장관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눈 후 김근태 장관은 김남선 ‘드롭인 센터’ 소장으로부터 상담소 현황에 대한 간략한 보고를 받았다. 김근태 장관이 보고를 받던 중 갑자기 센터 안쪽에서 노숙인들의 ‘와’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한국 대 몰디브 전에서 한국의 첫 골이 터진 것이었다.
웃지 못 할 상황이었다. 한쪽에서는 대한민국 보건복지부 장관이 ‘노숙체험’을 한다며 관계자에게 브리핑을 듣고 있고, 정작 노숙인들은 축구경기에 환호성을 외쳐 브리핑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김근태 장관도 멋쩍었는지 브리핑을 잠시 중단시킨 후 ‘파이팅’을 외쳤다.
“노숙인들과 대화하겠다며 경찰 호위 받나”
‘드롭인 센터’를 나온 김근태 장관은 서울역에 위치한 ‘노숙인 무료 진료소’를 방문한 후 10시 15분 경 본격적으로 노숙인들이 밀집해 있는 서울역 지하도로 향했다. 이때부터 김근태 장관의 ‘노숙체험’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서울역 주변에 있던 노숙인들이 김근태 장관에게 다가와 “일자리를 마련해 달라”, “사진찍으러 온 거냐”며 말을 건넸고, 경찰은 경호상의 이유로 이들을 제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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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배여일 씨(오른쪽)가 김근태 장관과의 대화를 요구하고 있고, 이를 경찰이 제지하고 있다 |
경찰의 제지로 김근태 장관과 대화를 할 수 없었던 배여일 씨(40세)는 “내가 술을 먹긴했다. 노숙생활을 한지 20여 년이 다 되가고,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술을 안 먹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제지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것이 노숙인들의 삶인데, 얘기 좀 하자했더니 경찰이 날 막아세웠다. 노숙인들과 대화를 하겠다면서 경찰에 둘러싸여 온 것 자체가 기분 나쁜데, 왜 얘기하겠다는 나를 막냐”며 하소연했다.
김근태 장관에게 전하고 싶었던 얘기를 묻자 배 씨는 “일자리, 잠자리, 건강 문제 등 노숙인들이 필요한 게 어디 하나, 둘인가”라며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 알면서도 높은 사람이니까 위에서 우리들 위해 힘 좀 써달라고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역에서 노숙생활을 시작한지 3년이 된 또 다른 노숙인은 “사람이 죽어도 (경찰이) 올까 말까한데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경찰들이 많나 했다”며 “(장관이) 노숙인들의 목소리를 듣겠다며, 경찰들의 호위를 받는 이유는 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근태 장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묻자 김 씨 역시 “이야기를 해봤자 뭐하냐”며 “계란으로 바위치기고, 그때 뿐 이지”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빈곤사회연대, “하룻밤 라이브 체험 쇼로 빈민의 삶 우롱말라”
한편, 이날 빈곤사회단체 회원 10여명은 서울역에서 피켓시위를 벌였다. 빈곤사회단체 회원들은 ‘당신도 36만원으로 살아봐라’, ‘하룻밤 라이브 체험쇼로 빈민의 삶을 우롱하지 말라’며 김근태 장관의 ‘빈곤체험’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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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는 '빈곤사회연대' 회원들 |
유의선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김근태 장관의 ‘노숙체험’에 대해 “노숙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도 아니고 잠깐 서울역을 방문해 관계자 몇 명 만나는 것이 무슨 노숙체험인가”라며 “김근태 장관의 노숙체험은 빈민을 이용한 정치적 선전전일 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 유의선 사무국장은 “노숙인 동절기 대책이 나왔는데 상담을 강화한다는 대책 밖에 없었다”며 “공공역사 중심의 현장지원체계 마련, 최저생계비 현실화 등 노숙인과 빈민들을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김근태 장관의 노숙체험에 기자들은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 노숙체험을 끝마치고 김근태 장관은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덕담’을 나눴다. 같은 날 오후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용역철거반들의 불법적인 폭력으로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생명을 위협받는 노점상들이 ‘긴급구제조치’를 요청했다. 단 한명의 기자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곳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빈곤’보다 ‘빈곤체험’이 더 이슈가 되는 한국 사회지만, 이날 노숙인들은 그들의 ‘쇼’에 환호성을 치지 않았다.



서울역 무료진료소를 방문한 김근태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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